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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선] 우리에게 끝은 없다 0 8 | 인스티즈









달의 잠행







 그 주의 일요일에 김주영은 집에 있었다. 김주영과 단둘이 집에 있으면 우리 사이엔 너무 많이 싸우며 자란 이복남매처럼 무덤덤하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적의와 혐오가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소파에 그가 다가와 곁에 앉거나 싱크대 곁에 나란히 설 때면 나는 흠칫 놀라 재빨리 물러났다. 그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뭘, 이라고 얼버무렸다. 나는 김주영의 냄새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김주영의 냄새가 상기시키게 될 기억들을 피해다녔고 그 냄새 때문에 내가 무력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건 정확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에서 내가 그리워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냄새니까. 나는 그를 부정하고 그를 무의식적으로 차단하면서 한사코 다른 곳에서 그 냄새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불쾌한 자각이 들 때가 있었다. 생에 대한 긴장이 완전히 이완되는 그런 완전한 평화로움과 순수함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김주영은 아침에 나와 잠시 투닥거리다가 다시 잠을 잤다. 오후 한시에 일어난 김주영은 러닝 바람으로 점심을 먹은 뒤 바다로 낚시를 가자고 했다. 나는 더워서 싫다고 말하고 웃옷을 입으라고 핀잔을 주었다. 김주영은 그러면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의 독창회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서점에서도 티켓을 팔았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 혼자 낚시를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싫다고 했다. 그는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혼자 백화점을 간다거나 미용실 혹은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은 모처럼의 휴일에 너무 잔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마트에 가 필요한 것을 산 뒤에 바닷가의 횟집에서 회를 먹기로 했다.


 온천에서 일부러 세시 오십분에 맞추어 나왔다. 김주영은 많이 기다렸기 때문에 투덜댔다. 시계를 보면서 목욕탕 안에서 버티다 보니 나의 손가락이 물에 불었다. 차를 타고 나가다가 나는 고갯마루에 있는 휴게소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가자고 가볍게 말했다. 휴게소 길가엔 빈 트레일러가 세워져 있고 승용차들이 줄을 이어서 있었다. 일요일이라 가족 단위의 피서객이 많았다. 두 군데 등나무 아래도 비치 파라솔 아래에도 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냉방된 차안에서 커피를 마셨다.


 네시 팔분쯤에 김창수의 차가 나타났다. 그는 휴게소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나의 차가 있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휴게소 입구에 차를 세웠다. 나는 김주영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야겠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 안에서 그가 볼 수 있도록 꽃이 활짝 핀 나무 앞을 지나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 창문으로 김창수를 관찰했다. 짙은 청색의 니트를 입은 김창수는 나를 보았는지 단정한 공무원처럼 골똘하게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당장 달려가 그 얼굴을 일그러지도록 두 개의 손바닥으로 누르고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아이스크림을 사 가게에서 나오자 김창수가 클락션을 가볍게 울렸다. 그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나의 시선이 한순간 김창수를 스쳤다. 그는 나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관망한 하고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김주영의 차에 올랐다. 김주영은 피우던 담배를 다 피우고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김창수가 있는 쪽을 돌아보니 그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우리 차의 꽁무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건 열시경이었다. 횟집에서 맥주를 마신 탓에 바닷가의 방파제에 차를 세우고 술이 깰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보니 윗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과장되게 술이 취한 척, 몹시 피곤한 척하며 이를 닦고 곧바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 김주영은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켜더니, 갯벌의 생태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 새의 마음 같을 거야… ’ 그 말이 다정하게 내 몸 속을 흘러다녔다. 그는 내 기분을 알고 있었다. 숲속의 양치류같이 그늘진 곳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음습한 마음을. 그 말은 천천히 나를 데워 결국은 뱃속이 뒤집히도록 만들었다.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한밤중에 김창수를 만나는 일. 충동을 인내하기에는 김창수는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한 시간쯤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마침내 실내 슬리퍼를 손에 쥐고 창문의 방충망 문을 열고 창틀을 타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덕길을 타고 윗집을 향해 살금살금 오르기 시작했다. 만월이었다. 만월이구나,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 달은 고래처럼 커다란 검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길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어둠의 결이 너울너울 머리 위에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다섯개의 돌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것이 소용없자 곧바로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열리더니 김창수가 아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눈 속엔 무슨 이런 짓을 하느냐의 금지의 뜻이 완연했다. 그러나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폭발물의 뇌관을 닫듯이 황급히 현관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의 집은 화가나 조각가의 작업실, 혹은 사진가의 스튜디오 같은 특별한 용도로 지어진 집 같았다. 천장이 높은 홀과 드러난 목조 계단과 기울어진 천장의 다락방들과 벽난로를 가진 훨씬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그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 난 이런 위험한 짓을 좋아하지 않아요 ”



 그는 나무라는 듯이 깍듯한 경어를 썼다. 그는 기분에 따라 어린 여자를 대하듯이 반말을 하기도 하고 깍듯한 경어를 쓰기도 했다. 경어를 쓸 때면 긴장감이 감돌았다.



“ 오늘 약속을 못 지킨게 마음에 걸려서… ”



 그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자신이 적징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해야 했다. 말을 중단했다. 그러나 달리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를테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우리의 약속은, 실은 약속이라고 하기 어려운 거예요. 잠정적으로 늘 깨어질 것이 예정되어 있는 약속. 그건 지켜야 한다는게 아니라 그저 물 위에 띄워놓은 부표 같은 거예요. 여기쯤이라는 정도… ”



 그는 설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냐는 얼굴로 말했다. 그뿐인 것에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실내복 차림으로 창틀을 넘은 것이다. 거의 이십 분쯤이 흘렀을 것이다. 그는 그저 커다랗고 검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영화만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 머리카락들을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이마에 입 맞추고 그리고 그의 머리통을 두 손에 끌어안고 마루에 뒹구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겹쳐서 눈앞에 떠올랐다. 실내는 초록색 가죽 소파 세트와 장롱처럼 큰 스피커들, 텔레비전이 있을 뿐 큰 공간에 비해 텅 빈 느낌이었다. 멀리 살림살이가 조금 드러난 주방이 보였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환영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을 한 뒤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거의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 허락없이 틈입한 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침내 내가 일어서자 그가 나의 어깨를 몇 번 토닥거려주었다.



“ 나한테 별달리 기대하지 말아요. 남자와 여자 사이엔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예요. 하긴 삶 자체의 근본적인 결함이기도 하지만. ”



 나는 모멸감을 느끼며 그 집에서 나왔다. 그는 재빨리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편협하고 냉정하고 약삭빠른 남자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데도 혐오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돌아서는 순간 지독한 상실감이 이미 나를 해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샛노란 달이 고래처럼 큰 구름 속에서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집에서 나온 그 방향대로 곧장 숲길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짐승이었던 것처럼 어두운 숲속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멧돼지처럼 깊은 동굴 속에서 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고 다람쥐처럼 나무를 쏜살같이 타고 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검푸른 숲속에서 새들이 다른 가지로 옮겨앉는 작은 기척도 들렸다. 담비 같은 작은 짐승이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소리도 해묵은 나뭇잎들 아래로 뱀이 스쳐지나가는 소리도, 풍뎅이와 나방이 날갯짓하는 소리도….






“ 어디 갔다 오는 거야? ”



 뜻밖에도 김주영이 마당에 서 있었다. 기가 막힌 얼굴에다 잔뜩 화가 난 음성이었다.



“ 산책 ”

“ 너 몽유병환자야? 이해가 안 돼. 그 옷차림에 실내화 바람으로? 어디로 나갔어? ”

“ …현관문으로 ”

“ 거실에 앉아 있던 내가 모르게? ”

“ 오빠 없었어, 화장실에 간 사이였나 보지. ”



 김주영은 다행이 납득하는 것 같았다.



“ 불은 꺼져 있는데 자는 줄로 알았던 너는 침대에 없고, 네 방에 창문은 방충망 문까지 활짝 열려 있었어. 놀랬잖아, 넌 겁도 없어? 이 산 속에서 한밤중에 돌아다니게? ”

“ 이제 무섭지 않아, 전혀. 난 이제 혼자 저 무덤들 뒤로 난 숲길로 들어갈 수 있어. 해봐? 우리 같이 가볼까? ”

“ 관둬 ”



 김주영은 섹스를 원했다. 나는 김주영을 받아들였다. 내 몸은 변했다. 나 자신마저도 낯설어 깜짝 놀라는 위험한 관능이 그 속에 은닉되어 있었다. 그건 참으로 낯설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불안한 것이었다. 생을 가장 어둡고 질척한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동물적인 몰입. 이것은 평범한 여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일까, 혹은 극복해야 할 재앙일까. 김창수과 섹스를 할 때면, 더이상 먹지도 말고 잠들지도 말고, 낮이 되지도 말고, 밤이 되지도 말고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꿈에 빠진다. 김창수를 생각하자 불안하고, 자극적인 이상한 활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의 몸을 감쌌다. 내 몸은 절정에 이르러 밤의 숲이 올리도록 커다랗게 소리를 냈다.



“ 너 이곳에 온 후로 달라졌어. 이상해. 네 몸에서 낯선 진동이 느껴져. ”



 잠들기 전에 김주영이 중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부정하고 혼란스러운 관능에 빠져 있었다. 마치 두 남자와 정사를 한 것 같았다. 네 개의 눈동자, 두 개의 입술, 네 개의 손, 스무 개의 손가락, 네 개의 다리, 그리고 분간할 수 없는 겹겹의 숨소리… 김주영이 깊은 잠이 들어갈수록 나는 또렷하게 깨어났다. 바로 윗집에 있는 김창수가 또다시 그리웠다. 그와 함께 온전한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갈망이 나를 괴롭혔다. 밤이 지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더 그를 볼 수 있다면, 그가 냉정한 얼굴을 풀고 나를 향해 웃어준다면… 오랜 뒤에야 깨닫게 된 일이지만 나는 믿어지지 않게도 그토록 급속하게 그에게 예속되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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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볼때마다 생각하는데 작가님은 금손b 잘 읽고갑니다!
11년 전
독자1
이번편 잘읽고갑니다!ㅠ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2
김창수는 철저하게 적정선을 유지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못하네요. 그를 냉정하다고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좋은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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