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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헌터(City Hunter)

- 28 -

 

 

 

 

 

 

 

굉장히 웅장하고도 세련된 건물의 검찰청에서 나오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중년의 한 남성. 그리고 그 남성을 둘러싸곤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질문세례를 하는 수 십 명의 기자들. 남자는 이미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였지만 고개만은 빳빳이 든 채 유유히 걸어 나왔다. 경호원들에게 보호를 받고 있긴 했지만 기자들의 수가 하도 많았던 터라, 그 눈부신 카메라의 빛들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말소리 때문에 짜증은 점점 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검은색의 고급 세단에 간신히 몸을 실은 남자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짜증난다는 듯 주먹을 꽈악- 쥐곤 검은색의 차 시트를 세게 내리쳤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거친 숨을 쌕쌕 내뱉으며 입술을 부르르, 떨던 남자는 자신의 옆에 앉은 젊은 비서를 홱- 노려보며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래서, 조사는 잘 되어가고 있나? 김명수 고 영악한 놈에 대해 말이야.”

“ 조사를 하긴 했습니다만…. 그게 좀 애매합니다, 회장님.”

“ 그게 무슨 소리지? ”

“ 놀라울 정도로 깨끗합니다. 뭐 더 파볼 것도 없이 말입니다. 김명수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건 이름 석 자와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전직형사 출신의 능력 있는 젊은 변호사라는 것 밖에는 더 이상의 수확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다라….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턱을 슥슥- 매만지는 남자였다.

 


W그룹. 겉은 다른 대기업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해 보이는 기업이었지만, 그 속은 뿌리 끝까지 잔혹한 피와 살덩이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한 마디로 조직이 이끄는 그룹이라는 것이다. W그룹은 새나라당의 세 의원 모두에게 불법으로 선거자금을 내준 것은 물론, 검찰의 눈을 피해 금품들을 주고받기도 했다. 시티헌터들이 첫 번째로 벌린 사건으로 인해 국회에는 비상이 걸렸었고, 새나라당의 의원들은 불안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해서 명수에게 그동안의 비리를 모두 자백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명수에 의해 시티헌터들에게 전해졌고, 시티헌터는 그 모든 것을 언론에 공개하고 말았다.

 

셀 수도 없이 검찰청을 들락날락거렸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주식이 폭락했고, 이 회사는 곧 망할 거라며 자진해서 퇴사를 한 직원들도 벌써 수십이었다. 김명수만 아니었어도, 그 영악한 놈만 아니었어도 자신의 회사가 이정도로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또 다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그것을 억누른 채 조용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 목소리를 낮게 깐 채 입을 여는 남자였다.

 

 

 

 

“ 시티헌터와의 연관성은? ”

“ 한 편인지 아닌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비서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내 찌푸려진 미간을 곱게 펴고는 입을 앙- 다물었다. 그래. 그래야 재미있지. 한 번에 잡혀버리면, 너희도 시시하고 우리도 시시하지 않겠어? 나는 지루한 게임은 하지 않는 편이라 말이야. 그렇게 계속 길고 날뛰어봐, 김명수. 곧 너를 찾아 처참히,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망가뜨려 줄 테니. 

 


남자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짧은 단도 하나를 꺼내어 자신의 손 안에 꽈악- 쥐었다. 그것은 굉장히 고풍스럽고도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있어 언뜻 보면 장식용 칼이라고 볼 정도로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남자는 곧 물건을 쥐고 있는 엄지손가락으로 단도를 살살 쓸어내리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무섭도록 소름 끼치게.

 

 

 

 

 

 

 

 

 

 

 

 

* * *

 

 

 

 

 

 

고막을 찢을 듯 울려오는 총성. 한 남성이 비 오 듯 흐르는 땀을 손으로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오른 손으로 다시 총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훈련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힘을 잃은 남자의 팔은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남자가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 남자의 팔목을 세게 잡아챘다.

 

 

 

 

“ 오늘은 그만하자.”

“ 아직 더 할 수 있어.”

“ 우현아. 너 그러다 또 병 나.”

“ 할 수 있어. 아직 더 할 수 있어, 성규야.”

 

 

 

 

다투듯, 꽤나 격정적인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다름 아닌 성규와 우현이었다. 근 일주일 만에 깨어난 우현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아직 몸이 다 회복되기도 채 전에 훈련을 해야 한다며 자신의 총을 챙겨 훈련장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말려보기도 했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우현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벌써 2주가 흘렀다. 그 2주 동안 우현은 단 한 번도 훈련을 거르지 않았고, 때문에 그가 걱정스러운 성규는 다친 발을 하고도 우현을 따라 훈련장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약간은 짜증스러운, 그러나 걱정스러운 감정을 더 많이 내포한 성규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현이 작게 미소 지었다.

 

 

 

“ 알았어. 그럼 10분만 더 할게. 그럼 됐지? ”

 

 

 

장시간 서있었던 성규를, 옆에 놓인 의자에 앉힌 우현이 그와 눈높이를 맞추려 낮게 쪼그려 앉아 싱긋- 웃었다.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우현을 따라 작게 웃어버리고 마는 성규였다. 사실 우현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여유를 부린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인 것도 잘 알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매우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몸은 추스른 후에 훈련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훈련하는 우현을 막는 것이었다. 한숨을 푸욱- 내쉰 성규가 남은 10분 동안 조금이라도 더 많이 명중시키려 과녁에 집중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규가 고개를 돌려 저 반대편에서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는 아란과 호원을 바라보았다. 그간 열심히 훈련을 한 것인지 웬만한 공격도 제법 막을 수 있고, 호원의 빈틈을 노려 공격까지 시도할 수 있게 된 아란이었다. 시간이 참 빨리도 흘러 지나가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임무를 마친지 어느덧 3주째에 들어섰다. 호원과 아란, 그리고 우현까지. 모두가 이를 악물고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려 애를 쓰고 있었다. 뿌듯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 바짝 마른 입술 사이를 비집고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의자에서 일어난 성규는 아까 닦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땀으로 샤워를 하고 있는 우현에게 다가가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그에 우현이 놀라 옆을 바라보자, 성규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싱긋- 미소 지으며 자신도 총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우현이 표정을 살짝 구긴 채 입을 열었다.

 

 

 

“ 너 아직 다리 불편하잖아.”

“ 많이 나았어. 이제는 목발 없이도 잘 걷잖아. 동우 형도 일주일만 있으면 깁스 풀어도 된다고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

“ ……… ”

“ 모두가 이렇게 열심인데 아프다고 나만 놀아서야 되겠어? ”

 

 

 

철컥- 총을 장전하고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긴 성규였다. 그 모습을 보며, 우현은 그가 자신과 같은 황소고집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저 옅게 미소 지으며 이미 감각이 사라진 팔을 여러 번 털고는 다시 한 번 총을 고쳐 쥐었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들려오는 장난기 가득 어린 성규의 음성.

 

 

 

“ 남우현씨? 10분 다 됐거든요? ”

“ 아….”

 

 

 

성규의 말에, 잠시 벙찐 표정을 해보이던 우현이 이내 비식, 웃음을 흘리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곤 성규와의 약속대로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성규가 앉아있던 의자에 털썩- 앉아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약간 불편한 듯 보호대를 찬 발을 공중에 살짝 띄운 상태였지만, 총을 잡은 자세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내 탕- 하고 고막을 파고 들어오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성규가 쏜 총알이 과녁의 정중앙을 무섭게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살짝 뒤를 돌아 자신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 그 모습이 예뻐, 우현 또한 엄지를 치켜 올려주며 잘 했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독 자신에게만 온전한 김성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우현이었다. 성규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쉰 우현이 이내 곧 시선을 돌려 호원과 아란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진지하게 훈련을 하고 있더니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티격태격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 아악!! 너 왜 이렇게 못하냐, 정아란!? ”

“ 야! 이 정도면 잘 하는 거지! 3주 만에 내가 네 정강이도 까고 옆구리도 쑤시고! 응? 얼마나 잘해! ”

“ 아이구, 퍽이나 잘 한다 잘해! 방금 알려준 자세 하나 못 따라 하는 게 말은 더럽게 많네.”

“ 야! 이호원!! ”

 

 

 

귀를 후비적후비적- 열심히 파며 자신을 우습게 보는 호원의 모습에 화난 아란이, 훈련장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꽤액- 질렀다. 덕분에 우현과 성규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고, 그에 혀를 쯧쯧- 차며 한 쪽 입 꼬리를 올려 비릿하게 미소 짓는 호원이었다.

 

 

 

“ 잘한다, 잘 해. 훈련하는 애들 방해나 하고 정아란 너 진짜 완전 최고다, 최고.”

 

 

 

엄지손가락까지 치켜 올리며 얄밉게 말하는 호원에게 단단히 화가 난 아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열 받는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는 아란이었지만 호원은 그에 또 다시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 그렇게 화낼 시간에 자세 연습부터 더… 어어? 야, 야! 정아란!!  ”

“ 이야아아!! ”

 

 

 

여전히 훈련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아란의 목소리. 그 기합소리에 놀란 호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그는 곧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아란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크헉- 하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어버리고 말았다. 아란의 주먹은 정확히 호원의 명치를 강타했고, 그로 인해 호원은 한참이나 바닥에 누워 꺽꺽대더니 이내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을 한 채 거칠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쿨럭! 크윽….”

“ 어때? 이래도 내가 더럽게 못하냐? 어? ”

“ 하아, 하으으…. 야, 이건 반칙, 이지! ”

“ 반칙? 그게 뭐지? 싸움에서는 룰이고 뭐고 없다고 한 게 누구더라? ”

 

 

 

자신이 얄밉게 했던 행동을 똑같이 취하며 귀를 후비적대는 아란이었다. 그에 호원이 미간을 곱지 않게 찌푸린 채 여전히 잔기침을 하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란에게 맞아 아픈 배를 감싸 쥐더니 이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란은 또 자신을 놀리려는 것인 줄 알고 이번엔 그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까줄 생각으로 발목을 살살 돌리고 있는데, 그런 호원이 고개를 들어 조금 더 크게 웃더니 이내 씨익- 멋들어진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 뭐, 이 정도면 잘했네.”

“ …뭐? ”

“ 넌 하도 인내심이 없어서 이렇게 자극 안 하면 치고 못 들어오잖아.”

 

 

 

호원의 말에, 아란이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이내 작게 입을 벌린 채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호원이 가르쳐 준 동작을 해내지 못해 고생을 하고 있을 때, 한 대 패주고 싶을 만큼 너무 얄밉게 말을 하는 호원 덕에 열이 받아 자신도 모르게 달려들었었다. 그 때문에 한동안은 호원의 정강이에 피멍이 붉게 자리 잡고 있었고. 멍한 표정으로 호원을 바라보자, 그는 짜증난다는 듯 표정을 확- 구긴 채였다.

 

 

 

“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치가 뭐냐, 명치가? 너 여기 맞으면 얼마나 아픈 줄 알아!? ”

 

 

 

어린아이처럼 마구 툴툴대는 호원의 모습에, 아란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우현은 의자 팔걸이에 팔을 세워 턱을 괴고는 자신들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또 다시 자신이 방해만 되었던 것 같은 그때의 기분에 사로잡혀, 차마 그 얼굴을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우현에게서 먼저 시선을 돌리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살짝은 굳은 얼굴로 호원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란이었다.

 

 

 

“ 이호원, 다음 거 알려줘.”

“ 뭐? 야, 오늘은 여기서 이만 쉬어야… ”

“ 부탁해. 하나만. 하나만 더 알려주고 가.”

 

 

 

갑작스레 진지해진 아란의 모습에, 호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다 이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우현을 한 번, 자신의 앞에 서있는 아란을 한 번 바라보았다. 아란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강해지려고 하는지 잘 아는 자신으로써는, 그 마음이 어떤지 알 것도 같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알았다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호원의 모습에, 약간은 쓴 미소를 지은 아란이 곁눈질로 우현을 슬쩍 바라보고는, 이내 다시 눈을 돌려 표정을 굳혔다.

 

강해져야 한다. 지금까지 아팠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도움이 되는 존재여야만 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많은 것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왔다. 저 자신에게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꼭 강해져야만 했다. 아란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자세를 고쳐 호원에게 주먹을 뻗었다. 그에게로 뻗은 주먹이, 꼭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압박감 같이 느껴져 아란이 이를 악 물었다. 두려움, 공포심. 이 모든 것을 없애고 강해질 것이다.

 

 

 


이 하나의 목표만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 *

 

 

 

 

 

 

우현, 성규, 호원, 아란이 모두 훈련장으로 가 조용하다 못해 썰렁한 집 안. 명수는 밖에 나가 있었고, 성열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동우와 성종만이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정말 질릴 정도로 시티헌터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추측성 보도들도 많았고 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검찰측의 입장도 표명이 되었다.

 

이번 건으로 인해 노조고 일반 시민이고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나라 국민들의 대표가 된 자들이 나라를 위해, 국민들을 위해 일하지는 않고 오로지 저 자신들만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고 돈을 빼돌린 것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뉴스를 보던 동우와 성종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릇에 예쁘게 담겨 있는 사과를 포크로 콕- 집어 우적우적 씹어대었다. 처음엔 자신들도 흥미롭게 보던 뉴스였지만 매번 똑같은 형식의 뉴스보도만 보다보니 이제는 질릴 대로 질렸다.

 

 

 

“ 성종아,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도 썩어빠졌을까.”

 

 

 

동우의 발언에, 성종은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글쎄요, 우리나라는 왜 그렇게도 못났을까요, 형. 국가에 손해를 입혔다고 죄도 없는 사람들을 몰살하고, 자신의 부와 명예에 심취해 가장 소중한 사람을 무참히 버리고, 그 사람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 걸까요. 부와 명예를 가지면, 그렇게 되면 모두가 그렇게 변해버리는 걸까요? 만약, 정말 그렇다면…

 

 


신은 왜 이리도 잔인한 걸까요, 형.

 

 

 

 


어째서 인간을 그렇게도 잔인한 생물체로 만드신 걸까요. 인간에 의해 상처 받고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꼭 같은 종족끼리 싸우고, 죽이는 그런 온라인게임 같아요. 가상의 그것들과 인간이 다를 게 과연 뭘까요? 우리도 그들과 같이 서로를 이기지 못해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데 말이에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동우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는 걸 아주 잘 아는 성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어놓고 대답을 보채지도 않는 것이겠지. 한참동안이나 넋을 놓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TV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들이 어떤 모션을 취하는지, 뭐라고 말을 하는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역겨워서. 이 나라가, 자신이 태어난 이 대한민국이 너무나도 더럽고 무서워서.

 

동우는 이내 다른 것이 보고 싶었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딱히 볼 것도 없어 바로 윗채널로 돌렸는데, 화면에 꽉 들어찬 익숙한 영상 하나. 그것은 명수의 사무실에 찾아와 자백을 하는 의원들의 영상이었다. 비록 호텔에서는 조금 더 자극적인 기사가 쓰여지게끔 음성 편집한 것을 틀었지만, 굳이 음성 편집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들에게는 불리한 영상임이 틀림없었다. 그 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우가 고개를 돌려 마지막 사과를 맛있게 씹고 있는 성종에게 물었다.

 

 

 

“ 성종아, 저거 너희가 한 짓이지? ”

“ 네. 밤새 성열이 형이랑 같이 시간마다 저 영상 나오게 조작하느라 되게 힘들었어요.”
 

 

 


동우의 물음에 성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고생했다며 동글동글한 성종의 머리통을 쓰다듬어주는 동우였다. 그 느낌이 좋은 듯, 성종이 피곤한 눈꺼풀을 스르륵, 내리 감으며 입을 열었다. 잠에 심취한 목소리였지만, 그 발음만은 정확해 동우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어왔다.

 

 

 

“ 언론과 뉴스는 거짓만을 떠들어대요. 지나치게 포장을 많이 한 달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 형들이 고생한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성열이 형하고 제가 경고하는 거예요.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라고. 국민들은 허투루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성종은 다시 눈을 떠보였다. 피곤한 듯, 쌍꺼풀이 짙게 졌지만 자고 싶지는 않은 듯 했다. 한숨을 푸욱- 내쉰 동우가 다 먹고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를 치우려 일어나려 할 때, 괴상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방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성열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 동우와 성종 모두가 놀라 성열을 쳐다보자, 그는 얼굴을 잔뜩 뭉그러뜨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 아아, 왜! 왜 안 깨웠어어! ”

“ 어? 그야… 어제까지 성종이랑 같이 밤새서 언론 조작하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더 자라고 안 깨웠지.”

“ 그래도 좀 깨워주지! 명수한테 도시락 갖다 주려고 했단 말이야…! ”

“ 명수? ”

 

 

 

되묻는 동우의 말에 대답할 여유도 없었는지, 성열은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가 10분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부엌에서 자신이 미리 만들어두었던, 무려 5단으로 되어있는 도시락 통을 들고 현관으로 뛰어가 대충 신발을 구겨 신었다. 그 모습을 본 동우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소리쳤다.

 

 

 

“ 너 신발 똑바로 신고 가라? 그러다 넘어져서 다치면 명수한테 혼난다.”

 

 

 

동우의 잔소리에, 성열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신발을 제대로 고쳐 신고 빠르게 집을 나섰다. 그 엄청난 속도에 놀란 동우와 성종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고, 이내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간, 이성열.

역시 성열이 형.

 


이라고 말이다.

 

 

 

 

 

 

 

 

 


* * *

 

 

 

 

 

무거운 도시락 통을 들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운 성열이 해사한 미소를 한껏 지으며 명수가 있을 변호사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부신 햇살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성열의 작고 귀여운 머리통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날씨가 맑은 건 좋지만, 거의 뒷통수가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귀엽게 인상을 찡그린 성열이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애써 가렸지만 햇볕은 그런 성열의 손마저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 아오씨, 왜 나한테만 비추고 난리야! ”

 

 

 

결국엔 횡단보도를 건너, 그늘진 쪽으로 옮긴 성열이 그제 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팔랑팔랑,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근 2주간, 자신은 명수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이 바쁘다며 집에서 옷가지 몇 벌을 챙겨 갔고, 그 이후로는 집에 들를 생각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간간히 전화통화로 자신의 안부를 전해오기만 했다. 그에 서운한 마음도 있긴 했지만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커, 이렇게 몰래 도시락을 들고 찾아가기로 한 성열이었다. 자신의 음식이라면 뭐든 맛있게 먹어주는 명수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 더 신경을 써주고 싶은 마음에 평소에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꽤나 넉넉하게 만들어 싸왔다.

 

그렇게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 한 30분 쯤 걸었을까, 한 코너만 돌면 명수의 사무실이 나올 것을 알기에, 성열은 혹여나 명수가 바쁠 것을 고려해 미리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무거운 도시락 통을 자신의 품에 꼭- 안은 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누르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이쁜아, 왜?

“ 명수야! 김명수우- ”

- 풉- 왜애, 이성여얼-

 

 

 

서로 말꼬리를 늘리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연인이었다. 자신의 장난을 맞받아쳐 주는 명수가 고마워, 성열이 예쁘게 웃으며 입을 뗐다.

 

 

 

“ 나 너네 사무실 다 와 가는데. 너 어디야, 명수야? ”

- …어? 사무실 앞이라고?

“ 응! 너한테 도시락 주려고 내가 다 싸왔… ”

- 아, 성열아 미안한데 어떡하지? 나 지금 밖인데….

“ 밖…? 어딘데? ”

- 의뢰받은 일 증거자료 수집 좀 하느라 지금 잠시 외출했어. 미안해서 어떡하지….

 

 

 

정말 미안하다는 듯 풀죽은 목소리로 말해오는 명수에, 성열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렇게 열심히 도시락도 싸왔는데, 오늘도 명수 얼굴을 못 보고 가는 건가…. 밀려오는 서운함에 대답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달래는 명수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명수의 사과만 받기도 뭐해 성열은 아쉬움이 잔뜩 어린 목소리를 하며 알았다며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지금 현재 밖에 나가있는 명수의 잘못도 아닌데, 오히려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자신의 잘못인데 괜스레 명수가 원망스러워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리곤 자신의 손에 들린 죄 없는 도시락 통만 찌릿- 노려보았다. 내가 이걸 도대체 왜 만든 거지? 안에 있는 음식이 망가지건 말건,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락 통을 마구 흔들며 쿵쿵, 성난 발걸음을 옮기는 성열이었다.

 

 

 

“ 칫, 김명수 나빠. 못됐어.”

 

 

 

하지만 그 말을 내뱉자마자 죄 없는 명수에게 괜히 화를 내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도는 성열이었다. 명수 앞에서는 늘 이렇게 어린애가 되어버리는 자신이 밉고 짜증이 났다. 피가 베여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성열이 여전히 햇살이 밝게 내리쬐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미운데, 미운데….”

 

 

 

 

 

 

 

 

 


또, 그만큼 보고 싶어, 명수야.

 

 

 

 

 

 

 

 

 

 

 


* * *

 

 

 

 


한편, 성열과의 통화를 끝낸 명수는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허공에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가슴은 여전한지 명수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눈으로 자신의 주위를 한 번 둥글게 훑었다. 사실 자신은 현재 밖이 아닌 사무실 안이었다. 성열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매우 못나고 한심스러웠다.

 

 

 

“ 보고 싶다, 우리 성열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목을 답답하게 죄여오고 있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의자에 눕듯이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2주간 보지 못한 성열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현재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사실 2주 전부터 자신의 주위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미행을 당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처음엔 부정 했었다. 그저 자신이 예민해 착각을 하는 것일 뿐이라며, 그렇게 아닐 거라 단정 지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강해졌고, 밥을 먹으러 식당을 가던, 잠시 볼일이 있어 외부로 나가던, 수상한 사람이 늘 두 명씩 자신에게 따라붙었다.

 

이런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의 신상정보와 얼굴이 공개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 그 일은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들은 현재 자신을 시티헌터의 팀원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일 거라 생각을 하고 있을 뿐. 그래서였다. 팀원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싫어 근 2주 간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혹여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살고 있는 집이 밝혀진다면 팀원 전체에게 해가 갈 것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형들과 동생, 그리고 성열이 위험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방금 전, 거짓말로 성열을 돌려보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들은 24시간 교대를 해가며 자신의 사무실 앞을 지켰다. 도대체 무엇을 알아내려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해코지를 하지 않으니 다행이었지만, 혹여나 자신과 관련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시, 언제 그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협박을 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혹여나 자신으로 인해 성열이 위험해질까, 어쩔 수 없이 도시락까지 싸들고 찾아온 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었다. 피곤함도 뒤로 하고 자신을 위해 만들었을 도시락일 텐데, 분명 자신과 함께 먹을 생각에 매우 들뜬 기분을 하고 이곳으로 왔을 텐데, 그런 성열을 자신이 돌려보냈다는 사실이, 가슴에 통증을 일게 했다.

 

 

 


“ 하아….”

 

 

 

혼자 이 문제를 고민하려니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닥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명수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을 집어 들었다. 위험하긴 했지만 사람 둘 쯤 따돌리는 거, 못할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아까 그렇게 보낸 것도 미안하고, 성열이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자켓을 걸치고 핸드폰을 챙겨든 명수가 이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단 채 사무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서늘한 바람이 몸을 휘감고 돌았다. 명수가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보는 척, 눈을 내리깔고는 티 나지 않게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셋. 제길, 한 명 더 늘은 건가. 명수가 재미있다는 듯 잘생긴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 오랜만에 달리기 실력 좀 뽐내볼까.”

 

 

 

이래봬도, 고등학교 때 달리기는 늘 1등이었거든! 그 말과 함께 명수가 남자들이 서있던 곳의 반대방향으로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에 남자들은 당황한 얼굴을 하며 뒤늦게 명수를 쫓았다. 무려 세 명이나 되는 남자들에게 쫓기는 신세였지만 명수의 얼굴은 어린아이마냥 해맑기 그지없었다.

 

 

 

 

 

 

 

마치, 따라올 테면 와보라는 듯이.

 

 

 

 

 

 

 

 

 

 

 

 

 

 

 

 

 

 

- 29 -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가만히 누워있는 성규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우현과 호원, 아란은 걱정이 가득 어린 표정을 하고는 어서 빨리 성규가 눈을 뜨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 중 우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성규의 하얀 손을 꼭 붙든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도 심장이 빨리 뛰고 진정이 되지가 않았다. 훈련 도중 그에게서 연락을 받은 호원은 설명할 시간조차 없다며 재빨리 성종에게 연락을 넣어 성규의 위치를 파악하라 일렀다. 그때부터였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한 것은. 불길한 느낌. 분명 아침에 나올 때만 해도 곤히 잠들어 있는 너의 위치를 어째서 파악하라는 건지. 너는 명수와 함께 어디를 가려고 한 것인지. 그런 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발 빠른 성종이의 추적 덕분에 우리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차가운 도로위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너의 모습. 그게 다였다. 함께 나갔다던 명수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이호원은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냐며 욕을 하기 바빴고 아란이는 쓰러져 있는 너의 상처를 확인하고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나, 남우현은.

 

그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났다. 그 많은 양의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네가, 김성규가,

 

 


죽었을까봐.

 

 

 

 

날 두고, 영영 가 버렸을까봐.


정말 미련하게도,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하지도 못했다.

 

 

 

 

 

“ 하, 김성규가 얼른 일어나야 상황을 알 텐데.”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마구 찡그린 호원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다친 성규를 보자마자 급히 차로 옮겨 최대한 빨리 집으로 데려왔고, 다행히도 그저 옆구리만 스친 정도의 상처에서 그쳐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다친 성규의 모습과, 사라진 명수의 소식에 성열은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있더니 이내 혼자 방으로 들어가 그 후로는 방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 성열을 살피러 그의 방에는 동우와 성종이 가있는 상태였고.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과도 같은 이 상황에, 아란 또한 심란한 듯 곱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성규가 상처를 입었고 명수는 납치가 되었으며 성열은 자신 때문에 명수가 납치된 거라고 저 자신을 책망하기 바빴다. 하루아침에 거의 풍비박산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안 분위기는 살벌하고 또한 싸늘했다. 어서 성규가 깨어나야 명수를 구하러 가던, 추적을 하던 할 텐데.

 

그때 마침, 우현은 제 손을 타고 느껴지는 감촉에 감고 있던 눈을 떠 재빨리 성규를 살폈다. 무언가 괴로운 듯 식은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움찔거리는 그가 안쓰러워, 잡고 있던 손을 더욱 힘주어 쥐자 거짓말처럼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떠 보이는 성규였다. 그는 잠시 동안 방안을 살피더니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레 치켜뜨며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곧 바로 느껴지는 옆구리의 통증에, 손으로 상처부위를 잡은 채 허리를 깊숙이 숙일 수밖에 없었다.

 

 

 

“ 하윽….”

“ 성규야! ”

 

 

 

덕분에 놀란 우현이 급하게 성규의 안색을 살폈고, 아란과 호원 또한 침대 가까이로 달려와 성규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성규는 그런 이들의 관심은 안중에도 없다는 냥, 잇새로 흘러나오는 고통 어린 신음을 꾹 눌러 참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옆구리를 부여잡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물론, 자신의 리볼버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우현이 사색이 된 얼굴을 한 채 가만히 성규를 바라보았다.

 

 

 

“ 너, 뭐하는 거야? ”

“ ……… ”

“ 김성규. 너 지금 뭐하냐고.”

“ …명수, 찾으러 갈 거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하고,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도대체 누가 누굴 찾으러 가겠다는 건지. 우현은 지금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다, 이내 자켓을 걸치는 성규의 손을 급히 잡아챘다. 얌전히 그의 손에 잡혀준 성규는 그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였고, 우현은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서있는 호원과 아란에게 잠시만 자리를 비켜달라며 눈짓을 해보였다. 그에 두 사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고, 우현은 다시 성규에게로 시선을 돌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는 성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리며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 지금 이 상태로 가면, 네가 먼저 죽어.”

“ ……… ”

“ 성규야. 네 탓이라고 생각해? ”

“ …내, 탓… 맞, 잖아…. 내가, 내가 명수를 데리고만 가지 않았어도…! 그랬으면 명수가…! ”

“ 잡혀가지 않았을 거라고? 글쎄, 과연 그랬을까.”

 

 

 

우현은 줄곧 제 탓만 하는 성규의 손을 여전히 꼭 쥔 채 침대 가까이로 데려와 앉혔다. 그리고는 성규의 다친 부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그러자마자 성규가 움찔-하며 약간의 인상을 찡그렸고, 그 모습에 성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우현이었다. 너는 어째서 그렇게나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일까. 널 걱정하는 내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혹여나 네가 나를 두고 가버렸을까 혼자 마음을 졸이며 두려움에 떨었던 나를 모르는 것인지. 명수가 잡혀간 것이 네 탓이라며 자책하는 너를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미어지는지 알기는 하는 것인지.

 

 

 


“ 그놈들은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명수를 납치해갔을 거야. 네 탓이 아니야, 성규야.”

“ 그치만….”

“ 그렇게 치면 너보다는 내가 더 큰 죄인이 아니겠어? 명수를 직접적으로 그런 위험에 노출되게 한 건 나 남우현이니까. 명수에게 국회의원들을 상대하라고 지시한 거, 나잖아.”

“ 우현아….”

“ 찾을 수 있어. 명수가 전혀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있을 거라고 장담 하지는 못해도, 죽게는 안 둘 거야. 내가 살려.”

 

 

 

어떠한 믿는 구석이 있어 큰소리를 치는지는 몰라도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그 모습에, 성규는 굳게 닫힌 입술을 꾸욱-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우현은 그런 성규를 제 품에 꼬옥- 안은 채 그 마르고 가녀린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주었다. 걱정하지 마, 성규야. 반드시 살릴 거야. 명수 내가 꼭 구해올게. 그 다정한 말에 성규는 조금 안심이 된 듯 우현의 어깨에 대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대신 부탁이 있어, 성규야.”

“ 부탁? ”

“ 명수를 찾으러 가는 데에 우리는 널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야. 너는 집에서 성종이, 성열이, 동우 형과 우리를 기다려줘.”

“ 뭐…? ”

 

 

 

그 말에 놀란 듯, 우현의 품에서 빠져나와 한껏 표정을 구기는 성규였다. 하지만 우현은 그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눈과 똑바로 마주보며 성규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겨주었다.

 

 

 

“ 우리 믿어. 셋이서 꼭 명수 구해올게.”

“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남우현, 너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 ”

“ 왜 말이 안 돼? 지금 네가 명수를 구하러 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

 

 

 

우현의 말에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제 앞에 있는 그의 눈을 떨리는 시선으로 마주보는 성규였다. 지금까지의 그는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고집이어도 계속해서 우기면 못 이긴 척, 허락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우현의 모습은 이번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마음을 확실히 굳힌 모습이었다. 이번엔 어떻게 해도 데려가주지 않을 그라는 걸 알아서, 성규는 분한 마음에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괴롭혔다. 그런 제게 올라오는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 늘 그래왔듯, 우현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버린 성규의 입술을 보듬듯 살살 만져주며 작게 미소 지었다.

 

 

 

“ 입술 상하게 하지 말랬잖아.”

“ …남우현.”

 

 

 

그렇게 잘 다독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렇게도 못마땅한 것인지 여전히 표정을 구긴 채 앉아있는 성규를 바라보며, 우현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제 앞에 있는 성규를 설득하는 것도, 명수를 어떻게 구해야하는지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것도. 모두 너무나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우현은 지끈거리는 머리 탓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피곤한 눈을 잠시 동안 감았다 떠 보였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성규의 손을 감싸 쥐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네가 고집을 부려도, 그렇게 표정을 구겨도 소용없어.”

“ ……… ”

“ 나는 다친 너, 절대로 그 전쟁터에 못 데리고 가니까.”

 

 

 

그 말을 끝으로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규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그를 등진 채 시선을 맞추지 않는 우현이었다. 그리고는 ‘푹 쉬어. 동우 형이 너 절대안정이랬으니까.’ 라고 하며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그 차디찬 방문 앞에 스르륵 주저앉아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은 우현은 이내 얼굴에 헛웃음을 내비치며 고개를 푹- 숙였다.

 

 

 

“ 하…. 이제 어떡한담? ”

 

 

 

엉덩이를 대충 훌훌 털고 일어난 우현이 뻐근한 어깨를 두어 번 빙빙 돌리고는 이내 성규의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네가 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만은. 정말로 이번만큼은 네가 내 의견을 따라줬으면 좋겠어, 성규야. 만일 네가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우리를 따라나선다면, 나는 너를 지키지 못한 내 자신에게 무척이나 화가 날 것 같거든. 우현은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성규의 방문 앞에 서서 그에게 들리지 않을 부탁을 하고 또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정말 많이.

 

 

 

 

 

 

 

 

 

 

 

 

* * *

 

 

 

 

 

 

 

 

“ 성열아…. 괜,찮아? ”

“ ……… ”

 

 

 

동우와 성종은 명수의 소식 이후로 전혀 말을 하지 않는 그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성열은 그런 두 사람을 올려다보지도, 그렇다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침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우와 성종의 마음 또한 좋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차라리 울지. 속 시원하게 울고 같이 명수 찾으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데…. 성열은 울지를 않았다. 그저 아무런 표정 없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거나 무언가를 그리는 듯 손을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그런 그에게 성종이 뭐라고 말이라도 걸려던 찰나,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목소리가 드디어 그 긴 침묵을 깨고 들려왔다.

 

 

 

“ 사람 일… 진짜 웃겨. 그치, 형? ”

“ 성…열아….”

“ 하, 나쁜 새끼. 개새끼. 바보천치 김명수. 왜 말을 안 해? 내가, 내가 있는데 왜 말을 안 해! 왜 말을 안 해서, 그래서… 그렇게…. 으으….”

 

 

 

그 긴 시간 동안 참고 참았던 성열의 눈물이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 덕에 함께 눈물이 터져버린 동우가 재빨리 자신의 눈가를 훔쳤고, 성종 또한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침대 시트를 잡고 있는 성열의 손이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아파 감싸 안아주고 싶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여린 몸을 안아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성열 또한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고.

 

 

 

“ 내가, 갈 걸…. 아무리 졸려도, 피곤해도…! 세수라도 하고 잠 깨서, 내가 갈 걸. 왜 멀쩡히 잘 자고 있는 애를 깨워서 그런 꼴을 당하게… 한 거야, 나는…? ”

“ 네 탓 아니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성열아….”

 

 

 

동우가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넸지만 그마저도 독이 되어 날아올 뿐이었다.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 위로 얹어보았다. 그 심장 뛰는 소리마저도 죄스럽게 느껴졌다. 이내 성열이 생채기가 날 정도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미안한 것 투성이었다. 자신의 못난 이기심으로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명수를 이 일에 끌어들였고, 만인의 적으로 만든 것도 자신이었다. 변호사라는 일을 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던 그를, 이 위험한 늪지대로 끌고 온 것이 바로 자신. 이성열이었다.

 

 

 

“ 명수… 괜찮겠지? 안 죽었겠지? 응? ”

“ 명수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이제 우현이 호원이 아란이가 명수 구하러 갈 테니까, 그 아이들 믿고 기다리자, 성열아.”

“ 성열이 형. 형이 이럴 때일수록 강해져야 돼요. 명수 형은 자기가 잡혀간 게 형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자기 때문에 울고 있을 형을 걱정할 사람이라구요, 명수 형은.”

 

 

 

성종의 말에,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성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성종과 동우의 말 중 틀린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자신이 아는 명수는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저 때문에 울고 있을 자신을 걱정할 사람이었다. 성열은 나오는 울음을 애써 꾹- 눌러 참으며 촉촉한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 같게도 울음이 멈추었고 이상하리만치 명수가 아직 살아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 내가 뭐부터 하면 돼? ”

“ …어? ”

“ …명수 찾는 거 도울게. 형들은 어디 있어? ”

“ 괜찮겠어? ”

“ 응. 이렇게 울고 있는다고 해서 명수가 오는 것도 아니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성열이 굳은 다짐이 어려 있는 얼굴을 해보이며 말을 해왔다. 그 모습에 조금은 놀랐지만, 이내 다행이라는 듯 웃음 짓는 동우와 성종이었다. 역시나 사람은 안 좋은 일을 겪을수록 강해진다는 게 사실인가보다. 저번만 해도 명수의 상처에 어린아이처럼 울며 상처를 받던 성열이, 이번에는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며 돕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동우는 몰라보게 성장한 제 동생을 바라보며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심각했기에 그런 마음을 곧바로 지워버리는 동우였다.

성열은 자신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다독여주는 동우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지금도 명수만 생각하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를 위해 참아야했다. 현재 자신보다 더 힘들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그 아이를 위해서.

 

…금방 너 구해줄게 명수야. 너 꼭 구할 거니까, 그럴 거니까.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해.

 

 

 

 

 

 

제발.

 

 

 

 

 

 

 

 

 


* * *

 

 

 

 


잠시 성규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나가달라는 부탁을 받은 호원은, 그들의 방을 나와 복잡한 머리를 감싸 쥔 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납치를 당할 수가 있는 것인지.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줄 걸.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줬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 제기랄…! ”

 

 

 

뜨거운 숨과 함께 욕이 절로 새어 나왔다. 요새 들어 명수가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었다. 그가 심상치 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것이 대충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감지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명수를 잡아주지 못했고, 지키지 못했다. 말로만 그를 위로하고 다독였을 뿐 정작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그 죄책감에, 호원은 당장이라도 혼자 명수를 구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재 그의 위치를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명수의 핸드폰은 이미 놈들이 버렸는지 그가 납치된 그 장소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 하, 잠깐….”

 

 

 

한참동안이나 자책하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던 그가, 행동을 멈추고 작게 탄성을 내지른 건 그 순간이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호원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쪽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는 뭐에 홀린 사람마냥 서랍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 있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렇다면 분명히…!

 

 

 

“ ……… ”

 

 

 

뭐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정신이 없었다. 호원은 서랍에서 찾은 물건에 잠시 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손에 놓인 작고 심플한 여자시계를 바라보며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덕분에 마른 입술에서 피가 흘러 입 안으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호원은 그 시계를 손에 꽉- 쥐고는 입술을 더 세게 깨물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 하, 이 병신. 병신 이호원.”

 

 

 

사실 호원은 몇 달 전, 우현과 성규, 명수가 자주 차고 다니는 시계를 몰래 가져오거나 양해를 구하고 빌려와 아무도 모르게 그 안에 작은 칩을 심어두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소형 위치추적기로, 혹여나 나중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시계는 최근에 합류한 아란의 것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명수의 시계에도 분명 이 칩이 존재할 것이다. 어째서 이것을 잊고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잊고 있던 그 사실에, 얼굴을 뭉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호원이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성규의 방으로 곧장 향했다.

 

 

 

“ 김성규! ”

 

 

 

그의 방으로 들어가자, 성규는 무슨 생각에 그리 잠겨있는지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는 채였다. 큰 소리를 치며 등장한 호원 탓에 놀란 성규가 약간의 짜증 어린 표정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호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뭔가 매우 급할 얼굴을 하고는 다짜고짜 그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 김성규, 너 똑바로 말해봐. 오늘 김명수가 입고 나간 옷. 악세서리 기억해? ”

“ …뭐? 너 그게 갑자기 무슨….”

“ 김명수가 그 때 시계 같은 거 차고 있었어? 중요한 일이야. 잘 기억해봐.”

 

 

 

호원의 요구에 당황스러운 듯, 표정을 구기는 성규였지만 이내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표정에 못이긴 척 잠시 동안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 날 명수의 옷차림새는 회색의 티셔츠에 검은 가디건. 그리고 짙은 색의 청바지였다. 그리고 악세서리는…. 늘 하고 다니던 은색의 팬던트 목걸이와, 시계였는데 그게 뭐였더라….

 

 

 

“ 잉거솔Tipi. 맞아? ”

“ 어? 이호원 그걸 네가 어떻게….”

“ 오케이, 됐다. 고맙다, 김성규! ”

 

 

 

호원은 궁금해 하는 성규를 둔 채 그대로 방에서 나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시계라면 몇 달 전 자신이 빌려갔던 시계가 맞았다.

 

 

 

아, 쫌! 빌려달라니까? 우리 사이에 물건 아끼고 그러기냐?]

[그거 선물 받은 시게란 말이에요! 절-대 안 돼요!]

[어? 빌려준다고? 고맙다, 김명수! 내가 내일 바로 갖다 줄게!]

[어어? 형! 호원이 형! 야, 이호원!!]

 

 

 

문득 떠오르는 그 때의 기억에 잠시 동안 쓴 웃음을 지은 호원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여전히 명수의 흔적을 찾아 전국 CCTV를 뒤지고 있는 성열과 성종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지만 워낙 집중을 하고 있었던 터라 호원이 들어온 줄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그에 호원이 나란히 앉아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성열과 성종 각각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나즈막히 말했다.

 

 

 

“ 코드번호 C368-W331CT1-PBO ”

“ 어? 그게 뭐야, 형? ”

“ 설명할 시간 없어. 얼른 추적해봐.”

 

 

 

궁금함도 잠시, 무언가 확신에 찬 호원의 모습에 성종이 입을 삐죽- 내밀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옆에 있던 성열도 함께 코드번호를 입력해 추적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모니터에 빨간색의 점이 깜빡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성열과 성종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자, 호원은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한 가득 머금은 채 성열과 성종의 머리를 부스스, 헤집었다.

 

 

 

“ 오케이, 접수. 명수 금방 구해서 올게. 그러니 걱정 말고 기다려라 동생들.”

“ 어어? 형! 호원이 형!! ”

 

 

 

자신을 부르는 성종의 목소리에도, 호원은 대답하지 않고 그들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겉옷에 거의 팔을 구겨 넣듯 입고는 자신의 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 다시 거실로 나와 각자 방에 있는 우현과 아란을 큰 소리로 불렀다.

 

 

 

“ 남우현! 정아란! 얼른 나와! ”

 

 

 

우렁찬 호원의 목소리에 놀란 우현과 아란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고, 호원은 이미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차키까지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며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멀뚱멀뚱 호원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는 웃음기 가득 머금은 표정을 금방 지우고는 단호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해왔다.

 

 

 

“ 김명수 위치 알아냈어. 여기서 멀지 않아. 서둘러.”

 

 

 

그 말에 한동안 벙쪄있던 두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1분 내로 모두 준비를 마치고 나와 호원과 마찬가지로 거의 발을 쑤셔 넣다시피 하며 겨우겨우 신발을 신었다. 우현과 아란 모두 대체 어찌된 일인지 묻고 답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둘 중 누구도 호원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는 없었다. 이내 준비를 마친 세 사람이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 찰나, 성열이 다급하게 뛰쳐나와 무언가를 건넸다.

 

 

 

“ 이거 챙겨가야지. 그대로 가면 형들하고 누나, 정체가 발각 된다고.”

“ 아아…. 고마워, 성열아.”

 

 


그것은 세 사람의 신분을 보호해줄 가면이었다. 아란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성열은 잠시 동안 무언가를 망설이더니 이내 애써 웃어 보이며 작게 입을 열어 말했다.

 

 

 

“ 꼭… 명수랑 함께 돌아와 줘….”

“ 걱정하지 마.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끼리는 안 돌아올 거니까. 그렇지? ”

 

 

 

그 물음에 호원과 우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고, 아란 또한 걱정 말라는 듯 성열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또 다시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눈에 힘을 줘 간신히 참은 성열이, 이내 그들과 마찬가지로 입 꼬리를 한껏 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다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혹시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그 신께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저 세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김명수.

 

 

 

 

 

 

 

그 아이를 부디 다시 볼 수 있게만 해달라고.

 

 

 

 

 

 

 

 

 

 

 

 

 

 

 

 

 

- 30 -

 

 

 

 

 


성규와 우현의 시선이 허공에서 아프게 얽혀들었고, 이내 성규가 우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아란은 꽤나 많이 놀란 눈치였지만,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상황을 살폈다. 성규는 이곳저곳 많이도 다친 우현의 모습에 얼굴을 아프게 뭉그러뜨리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처 가득한 그 얼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규의 손을 피해버린 우현은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너는, 이곳에 왔으면 안 됐어.”
 
“ …우현아.”
 
“ 너에게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었어. 그 부탁을 하는 내내 너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되게… 절박했어. 알아? 제발 오지 말라고. 오지 말아달라고.”
 
“ ……… ”
 
“ 어떡할까. 내가 너에게 뭐라고 해주길 바래? 잘 왔다고?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줄까? 성규야, 나는 대체… ”
 
“ ……… ”
 
“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널 지키지 못한, 무능력한 내 자신에게 말이야.”
 
 
 
 
 
 
우현의 말에 성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꽈악- 쥐어 보일 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부탁을 해온 것인지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명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심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결국엔 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발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피가 베여 나올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고 늘 예쁘게 빛나던 두 동공은 저 자신을 아프게 담아내고 있었다. 미안했고, 죄스러웠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처를 주고 말았다.
 
 

 


“ 김성규 너보다,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다….”

나 김성규가, 남우현에게.
 
 
 


…그것도, 아주 많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가늘게 떨고 있는 너의 몸을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지만. 김성규는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너에게 죄인이기 때문에. 현재 너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존재가, 나. 김성규이기 때문에.
 
나는 명수를 데리고 밖으로 외출을 했다. 네가 모르는 그 사이에 명수는 납치가 되었고, 나는 총상을 입었다.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급하게 달려온 너의 눈에 비친 것은 명수의 빈자리와, 피를 잔뜩 흘리며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나의 모습이었겠지. 무서웠을 것이다. 또 다시 너의 소중한 그 누군가를 잃는다는 게. 그래서 너는 그것을 네 탓으로 돌려버린 거야. 내가 다친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내가 이렇게 다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남우현의 죄라고. 명수를 놓친 것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 것도 모두 너의 죄라고. 때문에 너 자신의 잘못으로 다친 내가 이곳에 나타난 순간, 너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의 절망을 맛봐야 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서있는 나의 존재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너에게 날아갔을 것이다.
 
 
 
 
 
 
“ 네 잘못이… 아니었어.”

이렇게, 진작 말해줬어야 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너를, 내가 그렇게 감싸 안아줬어야 했는데. 나는 너의 상처는 보지 못하고 눈을 뜨자마자 명수를 찾기에만 급급했다.
 

 


“ 아니. 내 잘못이야. 명수도, 그리고 너도.”
 
그때 말해줄 걸. 너를 안아줄 걸.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만큼 아프고 죄스러운 건 없을 텐데…. 어째서 나는, 그런 너를 이제야 발견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을 깨달은 순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너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큰 상처를 입어버리고야 말았다.
 
 
 
 
 
 
“ 우현아.”
 
 
 
 
 
 
아파하는 너에게 한 걸음 다가섰지만 너는 그만큼 내게서 멀어졌다. 또 한 걸음. 용기를 내 다가서봤지만 오지 말라는 듯, 너는 또다시 나와의 거리를 넓혔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애써 꾹- 참고는 알았다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내가 다가가 봤자 그것은 너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들고 있던 리볼버를 힘없이 재킷 안으로 넣으려던 그 순간.
 
 
 
 
 
 
“ 세상에…. 이호원!! ”
 
 
 
 
 
 
경악에 찬 얼굴을 한 채 비명을 지르듯 호원의 이름을 부르는 아란의 목소리에, 우현과 성규 모두 고개를 들어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누가 보아도 위급해 보이는 명수를 등에 업은 채, 힘겹게 철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호원이 있었다. 그는 이내 마지막 한 계단을 밟고 1층 시멘트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고, 그에 놀란 세 사람이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호원은 제 쪽으로 다가온 우현의 옷소매를 붙잡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 명수… 빨리 데려가야 돼…! ”
 
 
 
 
 
 
피를 많이 흘린 듯, 그의 왼쪽 팔 부근은 모두 새빨간 피로 적셔져 있었고 그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명수부터 챙기라는 호원의 말에 우현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끔찍하리만치 무서운 광경.
 
 
 
 
 
 
“ …명수야….”
 
 
 
 
 
 
다행히 아직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고, 간간히 검붉은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 우현은 상황파악보다도 일단은 명수가 먼저라는 생각에 그를 들쳐 업고 빠른 속도로 그 넓은 창고 안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 명수 데리고 먼저 갈게. 호원이 좀 부탁해! ”
 
 
 
 
 
 
차는 성규가 끌고 온 것까지 해서 총 두 대였으니 명수를 데리고 먼저 가도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우현이 먼저 창고를 빠르게 벗어나고, 뒤늦게 밀려오는 현기증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호원을 부축하려는 성규를, 아란이 제지하고는 자신의 어깨에 호원의 오른쪽 팔을 걸치게 한 뒤 장난스런 미소를 씨익- 지었다.
 
 
 
 
 
 
“ 부축은 내가 할게. 김성규 너도 무리해서는 안 되는 거 잘 알잖아. 너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우현이한테 신경써줘. 상처 많이 받은 거 같더라.”
 
“ ……… ”
 
“ 으휴- 그러게 여길 오긴 왜 와? 하여간, 김성규를 누가 말려.”
 
 
 
 
 
 
아란의 말에 입 꼬리만 살짝 올려 작게 웃음 성규가, 이내 호원을 부축한 채 앞서 걷는 아란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다친 우현의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고, 눈앞이 깜깜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나 김성규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줬다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다니…. 지금까지 상처로만 저 자신을 돌돌 싸매고 왔던 탓에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어도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신경이 쓰이지가 않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 그렇지만 우현에게 상처를 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샘솟았고, 그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 아닐 수 없다.
 
 
 
 
 
 
“ 진짜, 웃기네….”
 
 
 
 
 
 
상황에 맞지 않게 붉은 입술을 타고 헛웃음이 피실피실 흘러나왔다. 창고 안의 퀴퀴한 먼지들이 이미 폐부까지 들어차 금방이라도 기침을 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규는 그 공기를 한꺼번에 들이마셨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숨이 막힐 것 같아서. 그대로 질식해버릴 것 같아서.
남우현으로 인해 변해가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리만치 신기해서.
 
 
 
 
 
 
“ 우현아, 나는 네가 참 궁금해.”
 
 
 
 
 
 
도대체 너는 어디까지 나를 변하게 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너로 인해 과연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우리 두 사람의 감정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 김성규! 너 빨리 안 와!? ”
 
 
 
 
 
 
성규는 저를 부르는 아란의 목소리에도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꿈쩍을 않고 허공을 응시하다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이상할 건 뭐고 두려울 건 또 뭐야. 그냥 그걸로 된 거야.

남우현. 그 자체가 나를 바꾼다는 거. 그거면 됐어.
 
 
 
 
남우현이니까. 남우현이라서….
 
내 자신이 변한다 할지라도,
 
 
 
 
 
 
 
 

 
 
 
 
 
괜찮아, 나는.
 
 
 
 
 
 
 
 

 

 

 


 
 
 
 
 
 
 
* * *
 

 

 

 

 


 

TV가 켜져 있기는 했지만 축- 가라앉은 분위기의 거실 한 가운데엔 동우, 성열, 성종 세 사람이 각자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불안감을 달래고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제일 부산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 건 단연 성열이었다. 그는 다리를 덜덜 떨며 제 손톱을 있는 대로 마구 물어뜯고 있었다. 하도 물어뜯은 탓에 손톱의 모양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렸고, 심지어는 피가 나는데도 성열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결국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동우가 멍하니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가 한껏 망가져 있는 그 손을 잡아채며 말했다.
 
 
 
 
 
 
“ 성열아, 그만해.”
 
“ 응? ”
 
“ 너 손톱을 계속 물어뜯고 있잖아. 이거 봐. 다 망가지고 피까지 나는 거.”
 
“ …아.”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듯 아무 감흥도 없는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는 성열의 모습에 동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고, 자신 또한 명수를 구하러 간 이들이 걱정돼 미칠 지경이었다. 살짝 벌어진 잇새로 크고 긴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혹시나 있을 부상자를 대비해 의료실도, 그 안의 도구들도 모두 깨끗하게 소독을 해놓았고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두었지만 이왕이면 부상자가 없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제발… 다들 무사히 웃으며 돌아오길. 하지만 그런 동우의 바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 동우 형, 성열이 형,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
 
 
 
 
 
 
살짝 찌푸린 얼굴로 말해오는 성종의 목소리에 동우와 성열이 TV를 끄고 숨을 죽인 채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누굴… 부르는 거 같은데? 우… 동우… 동우 형…?
 
 
 
 
 
 
“ 나 부르는 거야? ”
 
“ 형 부르는 소리 맞는 거 같아요! ”
 
 
 
 
 
 
자신을 부르는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에, 동우가 재빨리 달려 나가 현관문을 벌컥- 열어 제켰다. 그리고 보이는 낮 익은 인영이 둘.
 
 
 
 
 
 
“ 우현아, 명수야! ”
 
“ 형, 수술이 필요해요. 명수가 많이, 하아… 다쳤어요.”
 
“ 아, 응! 준비는 다 됐으니까 의료실에 눕히기만 하면 돼! ”
 
 
 
 
 
 
한시라도 급한 명수를 위해 정원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동우를 부른 우현이었다. 하지만 동우는 이미 발 빠르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덕분에 명수를 업은 채 곧바로 집으로 들어와 의료실로 달려간 우현은 수술대 위에 조심스레 명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밖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처절한 울음소리. 보지 않아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주 잘 알았다. 아무래도 들어오지 못하게끔 성종이 붙잡고 있는지 그는 의료실 안으로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동우는 일단 수술대에 누워 거칠게 호흡하고 있는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거의 쇠가 긁히는 듯한 소리를 내며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고, 기침을 수시로 하고 간혹 가다 검붉은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 명수의 입가에 흩뿌려져 있는 붉은 피를 깨끗한 물수건으로 닦아낸 동우가 이내 그에게 산소 호흡기를 씌웠고, 덕분에 아까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된 명수였다. 동우는 지금 현재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대충 보기만 해도 알 것 같았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차마 CT를 찍어볼 여유가 없어 무작정 자신의 감대로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동우는 명수에게 조금 아플 거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주사바늘을 명수의 흉부에 깊숙이 찔렀고, 이내 폐에 고인 피를 빼내었다. 역시나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물론 이것으로 완치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 응급처치 하나로 명수는 얼마 동안의 수명은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일단은 한숨 돌렸다는 생각에 작게 숨을 내뱉은 동우가 들어 올렸던 명수의 티셔츠를 다시 내려주며 우현에게 물었다.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
 
 
 
 
 
 
동우의 물음에,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이는 우현이었다. 자신은 1층에서 사투를 벌이느라 어째서 명수가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호원이라면 모를까. 우현이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입을 떼려던 그 순간, 의료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성규와 호원, 아란이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 쇠파이프로 배를 가격 당했어요.”
 
 
 
 
 
 
동우는 갑작스레 나타난 이들의 등장에 놀람과 동시에, 총상을 입은 탓에 왼쪽 팔 부근이 모두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는 호원의 옷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일단 크게 다친 쪽은 명수였기에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내었다.
 
 
 
 
 
 
“ 외상성 혈흉.”
 
 
 
 
 
 
의학적 지식이 없는 이들은 동우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 물었고, 동우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이내 허공에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 워낙 급박한 상황이어서 호원이 너는 명수가 배를 맞았다고 착각했을 거야. 하지만 명수가 맞은 곳은 그보다 조금 더 위쪽인 흉부.”
 
“ ……… ”
 
“ 쇠파이프로 흉부를 가격 당하면서 늑골이 부러졌고, 그것이 그대로 폐를 찌르고 들어와 폐에 피가 고이고 있어. 때문에 명수는 지금…”
 
“ ……… ”
 
“ 숨 쉬는 것 자체가 고역. 굉장히 괴로울 거야.”
 
 
 
 
 
 
그 말에 모두가 인상을 찡그리며 주먹을 꽈악- 쥐어보였다. 그 누가 보아도 명수는 무척이나 괴롭게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지만 그 고통까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었기에, 그저 눈앞이 깜깜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동우가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꺼낸 건 그 순간이었다.
 
 
 
 
 
 
“ 수술하면, 살 수 있어. 하지만….”
 
“ ……… ”
 
“ 나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해. 엄청난 대수술이 될 거야. 때문에 내가 수술을 하는 동안 바이탈[*Vital Sign : 인간이 살아있다는 의학적 징후(호흡, 맥박, 체온, 혈압)]을 잡아줄 마취과 의사선생님이 꼭 필요해. 내가 두 개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이 두 개를 한꺼번에 해가면서 수술을 할 수는 없거든.”
 
“ 그럼 어떻게….”
 
“ 여기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일신대병원에 아는 선배가 근무하고 있어. 물론, 실력 좋은 마취과 전문의고.”
 
“ 과연 들어줄까? 불법인데.”
 
 
 
 
 
 
불법이라는 성규의 말에, 동우의 표정이 금방 굳어져 버렸다. 성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것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 수술은 해야 하고 마취과 의사는 더더욱 필요하다. 제가 아는 그 선배라면, 들어줄 것이다. 분명, 들어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서 거절을 당한다면 명수는 이대로 죽고 말 것이다. 명수가 언제까지 버텨줄 지도 의문이고, 현재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그곳밖에 없었으니 명수의 목숨을 걸 수 있는 희망은 단 하나였다.
 
 
 
 
 
 
“ 그럼. 명수 저렇게 죽게 둘래? ”
 
 
 
 
 
 
무섭도록 차가운 음성으로 말해오는 동우의 모습에, 그곳에 있던 사람 모두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동우를 응시했다. 이렇게나 무섭게 몰아붙이는 동우는 처음이었기에 다들 물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꾹-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성규만은 동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두 눈 안에 담겨있는 감당 못할 부담감과, 또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동우에게서는 그 두 가지가 느껴졌다. 이내 성규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들고 있던 차키를 꽉- 쥐고 입술을 떼었다.
 
 
 
 
 
 
“ 아니. 명수를 죽게 할 수야 없지. 가자. 운전은 내가 할게.”
 
“ 성규 너는 안 돼. 그 병원엔 아란이와 내가 가. 아깐 그렇게 보내줬으니 이번엔 내 말 들어.”
 
 
 
 
 
 
동우의 말에 성규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자신이 쥐고 있던 차키를 아란에게 넘겼다. 얼떨결에 차키를 받아든 아란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그곳에 동우와 함께 갈 수 있는 가장 멀쩡한 멤버는 자신밖에 없다고 판단을 했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현재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명수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동우와 함께 의료실을 나가려고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동우의 팔이 누군가에게 잡힘과 동시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도 갑니다.”
 
 
 
 
 
 
그는 다름 아닌 호원이었다. 말도 안 되는 호원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동우가 절대 안 된다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그에게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점점 화가 나려고 했다. 도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것인지. 처음으로 호원에게 눈을 치켜뜬 동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그 찰나, 호원이 살짝 미소 지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 나 때문에…. 저 자식이 나 때문에… 저렇게 다쳤잖아요. 그냥 내가 그때 쏴버렸으면 됐어요. 그 새끼 내가 그냥 총으로 쏴버렸으면 됐다고…! 근데 내가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려서 명수에게 기회를 줬어요. 이미 다칠 대로 다치고 지칠 대로 지친 애한테 되지도 않는 걸 시켜서, 그래서 저렇게 됐다고요.”
 
“ ……… ”
 
“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그 사람, 쉽게 들어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설득합니다. 아니, 협박을 해서라도 데리고 올 거예요.”
 
“ ……… ”
 
“ 명수도 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저렇게 힘든데도, 끝까지 의식 놓지 않고 악바리로 버티고 있잖아요. 형, 저 명수 도와주고 싶어요.”
 
 
 
 
 
 
진심 어린 호원의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참느라 붉게 충혈이 된 눈을 한 호원은, 잡고 있던 동우의 팔을 더 힘주어 잡으며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동우 또한 그런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동우는 이내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호원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 그래, 가자. 셋이 가서 설득해보자. 그래서, 명수 꼭 살리자.
 
“ …형.”
 
“ 대신 너 성종이한테 고마워 해. 성종이가 네 상처 응급처치 해주지 않았으면 나 너 데리고 못 갔어. 응급처치라도 안 했으면 그 전에 열이 펄펄 끓어서 정신 잃었을 거야, 너. 알아? ”
 
 
 
 
 
 
동우와 성규가 이야기를 하는 새에, 성열을 진정시킨 뒤 의료실로 들어온 성종은 구급상자를 들고 와 멍하니 앉아있는 제 형의 상처를 묵묵히 치료해주었다. 워낙 깊게 스친 상처라 나중에 동우가 한 번 더 소독을 하고 꿰매줘야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덧나지 않게 소독을 해주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성종이 제 팔의 상처를 치료해준 것도 몰랐던 호원은 그제 서야 팔에 감긴 흰색의 붕대를 바라보다 이내 성종에게 고맙단 듯이 웃어보였다. 그에 성종은 민망한 듯 괜스레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고, 동우는 문에서 제일 가까이 서있는 우현에게 밖에 있는 성열을 불러 달라 말했다. 다들 그의 말에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성열이 명수의 모습을 본다면 상처를 크게 받을 텐데….
 
머뭇거리는 우현에게 한 번 더 부탁을 한 동우가 싱긋- 웃어보이자, 우현도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성열을 조심스레 부축해 의료실 안으로 데리고 왔다. 성열은 의료실로 들어오자마자 우현의 손을 뿌리치고는 명수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충격적인 명수의 모습에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우는 그런 성열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려세우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성열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 성열아, 지금부터 내 말 똑똑히 잘 들어. 나는 명수를 살릴 거야. 그리고, 다른 형들도 명수가 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줄 거고.”
 
“ 으…흑….”
 
“ 지금으로부터 딱 20분. 그 안에 돌아올게. 성열이 너는 지금부터… ”
 
“ 하으… ”
 
“ 명수가 잠들지 않게… 최선을 다해줘.”
 
 
 
 
 
 
동우의 말에 모든 이들이 두 눈을 크게 떠 보이며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 성열이었다. 그는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될 정도로 더 서럽게 울어 제켰고, 무섭다는 듯 아이처럼 동우의 옷깃을 꽈악-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런 성열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오는 동우였지만 이내 그는 차갑게 그의 손을 쳐내고는 조금 언성을 높여 그에게 쏘아붙였다.
 
 
 
 
 
 
“ 약한 모습 보이지마, 이성열. 명수도 저렇게 악바리로 버티고 있어. 살고 싶어서, 너 두고 가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힘내주고 있잖아. 강해지겠다며. 명수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겠다며! 명수… 이대로 보내고 싶어? 그런 거야? ”
 
“ …아니야! 내가, 내가 그럴 리가….”
 
“ 그럼 해. 할 수 있어. 지금 가장 힘들 명수, 네가 도와. 명수 잠들면… 그대로 끝이니까.”
 
“ ……… ”
 
“ 이건 네가 해야 하는 일임과 동시에,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성열아.”
 
 
 
 
 
 
자신을 위하는 동우인 것을 알기에, 성열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고는 굳은 다짐이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동우가 기특하다는 듯이 성열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이내 준비를 마친 호원과 아란에게 이만 가자는 눈짓을 해보이며 마지막으로 당부를 했다.
 
 
 
 
 
 
“ 의료실엔 성열이, 성종이만 남고 모두 나가줘. 성종이는 명수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좀 도와줘.”
 
“ 네, 형.”
 
" 그럼… 갔다 올게."
 
“ ……… ”
 
“ 꼭… 데리고 올 테니까, 그러니까, 믿고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동우는 그 말 한 마디를 남긴 채 호원, 아란과 함께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고, 우현과 성규 또한 동우의 당부대로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기로 한 것인지 별 말 없이 서로 어색하게 의료실을 벗어났다. 이제 의료실에 남은 이는 명수와 성열, 성종 단 세 사람 뿐. 성종은 적막에 휩싸인 그곳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간간히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는 명수에게로 다가가 행여나 체온이 떨어져 위험해질까, 두툼한 담요를 꼼꼼히 덮어주었다. 멍하니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열이 이내 명수에게로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갔다. 그리고 아직은 따뜻한 그의 손을 꼬옥- 붙잡고 땀으로 젖어버린 명수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겨주었다.
 
 
 
 
 
 
“ 명수야. 나 보여? 내 목소리… 들려? ”
 
 
 
 
 
 
성열의 물음에 명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다정스레 만져주었다. 큰 눈망울, 오똑 솟은 코, 앙증맞게 자리 잡은 귀여운 입술까지. 모든 게 다 소중하다는 듯이 그렇게 한참을 성열의 얼굴만 만지던 명수가 이내 힘겹게 미소 지어보였다. 성열 또한 자신의 얼굴을 만져주는 명수의 손을 두 손으로 꽈악- 잡아주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려 애써 웃어 보였다. 힙겹게 올린 그 입 꼬리가, 부르르 떨려올 정도로 성열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신의 눈물로 인해 혹여나 명수가 마음 아파할까봐.
 
 
 
 
 
 
“ 명수야, 기억나? 우리 첫 만남.”
 
 
 
 
 
 
성열의 물음에 간신히 고개만 끄덕. 그 모습에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차올랐지만 눈에 힘을 주어 간신히 눈물을 참아낸 성열이 여전히 힘겨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다짜고짜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이쁜이라 했었잖아. 그래서 난 네가 완전 이상한 애인 줄 알았어. 내가 싫다고,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넌 계속 날 따라오면서 바보같이 웃었잖아. 그게 너무 싫어서, 그대로 네 정강이를 시원하게 걷어 차줬었는데 넌 아파서 다리를 부여잡으면서도 끝까지 날 따라왔었어. 그래서 내가 정말 짜증나니까 저리 좀 가라고 그랬었는데, 네가 되게 멋지게 웃으면서 그때 나한테 그랬었어.”
 
“ ……… ”
 
“ 우리 친구하자, 이성열. 이라고….”
 
“ ……… ”
 
“ 하하, 그때 정말 내 표정 바보 같았을 거야. 정말 벙쪄가지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멍하니 서있었는데 네가 다가와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는 그대로 눈을 맞추면서 그렇게 얘기했어.”
 
“ ……… ”
 
“ 나 꽤 재미있는 애야. 내가, 너, 많이 웃게… 해, 줄게….”
 

 
 
 
 
끝까지 참으려고 그랬는데. 네 마음 아프지 않게 정말로 눈물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바보 같이 나는 네 앞에서 또 울고야 만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 넘쳐 네가 덮고 있는 담요를 적시고야 말았다. 아무리 닦아보아도 그만큼 또 눈물은 흐르기만 했고, 괜스레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는 듯, 다시 한 번 없는 힘을 짜내어 내 눈물을 닦아주는 너의 행동에, 나는 그저 멍하니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울…지마….”
 
“ 하윽…. 명, 수야….”
 
 
 
 
 
 
못 견디게 가슴이 아파왔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 명수야. 이렇게도 아파하는 너를 앞에 두고, 나는 고작 떠드는 것 밖에는 하지 못한다. 너는 숨 쉬는 매 순간 순간이 고통스러울 텐데. 그럼에도 나는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려 왔지만 더 이상 계속 이렇게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여전히 내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는 너의 손을 밑으로 내리고는 환하게. 최대한 밝아보이게 웃음 지었다.
 
 
 
 
 
 
“ 그리고 그것도 기억나? 지금은 법이 많이 바뀌어서 학교에서 체벌을 하지 않지만,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되게 많이 맞고 그랬잖아. 그런데 내가 그만 무섭기로 소문난 수학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안 해온 거야. 분명히 명수 네가 일주일 전부터 그렇게 풀라고 재촉을 해댔는데도, 할 거라고, 할 수 있다고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엔 다 끝내지 못하고 점점 내 자리 쪽으로 다가오는 수학선생님을 보며 덜덜 떨고 있을 때였지. 그런데 갑자기 그런 내 책상으로 수학문제집 하나가 누군가를 통해 전달이 돼서 온 거야. 정말 열심히 푼 흔적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의 완벽한 문제 풀이었어. 나는 그게 누구 건가 하고 문제집의 앞면을 보았는데, 거기엔 그렇게 적혀있었어.”
 
“ ……… ”
 
 
 
 
[그러게 내가 진즉에 숙제하라고 했잖아, 이 등신아.]


 
 
 
 
 

 

성열은 그때 보았던 그 쪽지를 회상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명수 너는 그 시절부터 놀라울 정도로 나에게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티를 냈던 너인데. 나름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나는 그런 너의 마음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네 속을 썩이기 바빴다. 얼마나 답답했어. 이런 내가 얼마나 미웠어?
 
 
 
 
 
 
“ 그렇게 너는 네 문제집을 나에게 넘겨주고 발바닥 스무 대를 내 대신 맞았어. 너 그거 맞고 한동안 걷는 것도 잘 못해서 나한테 매일… 업어달라고 징징댔었는데…. 그것도 기억…나? ”
 
“ 또… 왜, 울…어….”
 
“ 흐으…. 명수야…. 김명수… ”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듯, 거칠게 숨을 내쉬는 네가 불안해서 그래. 그리고 이렇게 허무하게 너를 보내버릴 것 같은 내가 무서워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받기만 하고 해준 것은 하나도 없는 나라서, 그게 너무 미안해서 그래, 명수야…. 격해진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목 끝까지 차올랐고, 나는 이내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고 너에게 쏟아내었다. 아픈 너임을 망각하고, 그대로 너에게 안겨 엉엉 울며 애원했다.
 
 
 
 
 
 
“ 죽지 마…. 하으…. 죽지 마, 죽지 마, 명수야…! ”
 
“ ……… ”
 
“ 나 두고, 으흑…. 이렇게 가버리지 마! 아직 못해준 게 많아. 너에게 아직 해줄 말도 너무 많고, 앞으로 너와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 이렇게, 이렇게 가지 마, 명수야…. 제, 발….”
 
“ 하으윽…. 성, 열아….”
 
 
 
 
 
 
이내 너의 눈에서도 가느다란 물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린다. 너의 가슴팍에 안긴 나를 절절하게 끌어안고, 그렇게 네가 울어버린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울어, 명수야. 꼭 어디론가 가버릴 사람처럼, 그렇게 웃지 말고, 차라리 울어줘. 너도 아프다고, 사실은 많이 두렵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표현 하란 말이야, 이 바보야….
 
 
 
 
 
 
“ 내가, 내가 이기적…이었어…. 평범하게 살고 있는 너를 이렇게 데리고 온 내가, 가장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야…. 그 벌, 내가 받을게. 언젠가…! 으으…. 그 벌 내가 달게 받을게….”
 
“ 하윽….”
 
“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받게 하지는 마…! 언젠가 때가 되면. 내가 받을 벌이지만, 이런 식으로… 명수 너까지 그 벌을 함께 받으려고 하지는 마…! 내가, 내가 잘못했어, 명수야. 내가, 내가 다 잘못…했, 어…. 그러니까 나 두고… 가지 마, 명수야.”
 
“ 성, 열아….”
 
 
 
 
 
 
서로를 껴안고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던 성종은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두 주먹을 굳게 말아 쥔 성종은 이내 피가 베여 나올 정도로 꽈악-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아프게 웃었다. 비참했다. 우리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아픈 일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우리에게도 빛이라는 걸 비춰줄까. 사랑하는 동료들을 잃을까 두렵다. 우리들의 삶을 잃을까 무섭다. 그냥 모든 게 다 싫었다. 복수를 하는 이 과정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대한민국이. 그리고, 
 
 
 
 
우리를 이런 지옥까지 치닫게 한 그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것도.
 
 
 
 
 
 
 
 
 
성종이 다시 고개를 돌려 명수와 성열을 바라보았다. 명수의 상태는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고, 그는 결국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며 괴로워했다. 산소호흡기마저도 명수의 붉은 피로 뒤덮여 버렸다. 시간이 없었다. 명수 형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두 눈을 꾹 감고 기도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이대로 끝나기에 우린 아직 이루어낸 것이 없어요. 제대로 된 복수도 시작하지 못했고, 아팠던 만큼의 보상도 받지 못했어요. 다들 웃으며 지냈어도, 아직 가슴 한 켠엔 치유될 수 없는 크나 큰 상처가 자리 잡고 있어요. 그를 데려가시면 우리의 삶은 그대로 망가지고 말 거예요. 모두가 죄책감에 시달리다 팀은 와해가 될 것이고, 성규 형과 우현이 형은 다시 예전의 그 피폐한 삶으로 돌아가고 말겠죠. 신이 있다면 당신께 간절히 말하고 싶어요. 우리에게 기회를 달라고.


우리에게도,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좀 달라고.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똑같은 인간이라고.
 
 
 
 
 
 
 
 
 
 
 
 
 
 
 

 

 

 

 
 
 

 


* * *
 
 
 

 

 


 
 
 
최대한 속력을 내서 도착한 일신대병원은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크고 웅장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탄을 내지를 시간도 없던 동우와, 호원, 아란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차에서 내려 병원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우는 이미 차 안에서 선배와 통화를 해 만날 장소를 정한 상태였고, 이내 병원 안에 위치한 3층 휴게실로 들어서자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선한 인상의 남자가 동우를 웃는 얼굴로 반기고 있었다.
 
 
 
 
 
 
“ 선배! ”
 
“ 동우야! 야, 이게 얼마만이냐? ”
 
 
 
 
 
 
남자는 정말로 반갑다는 듯 동우를 한 번 껴안아 주고는 그의 머리칼을 부스스- 헤집어 놓았지만 동우는 그런 선배의 기분에 맞춰 웃어줄 상황이 아니었다. 남자는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심상치 않은 동우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 너 왜 그래, 임마? ”
 
“ 선배. 만나자마자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선배가 아니면 정말 안 돼서, 그래서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어요.”
 
“ 뭐…?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 선웅 선배.”
 
“ 그래, 동우야.”
 
“ 사람 좀… 살려주세요.”
 
“ …뭐? ”
 
 
 
 
 
 

사람을 좀 살려달라는 동우의 뜬금없는 부탁에, 선웅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사람을 살려달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일까. 이곳은 병원이다. 그것도 서울에서 꽤나 잘 날리는 대학병원. 그런 곳에서 자신에게 따로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선웅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해보이며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동우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자 동우는 잠시 동안 망설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 지금 저희 집에 크게 다친 사람이 한 명 있어요. 병명은 외상성 혈흉. 시간이 꽤나 지난 상태라 한시가 급해요. 그런데, 그 수술이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거, 선배도 알잖아요.”
 
“ …그래서? ”
 
“ 선배가 좀 도와주면… ”
 
“ 장동우. 너 미쳤어? 그거 불법이야! ”
 
 
 
 
 
 
동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웅이 그의 말을 막으며 소리쳤다. 불법수술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선웅은 아까와 다르게 표정을 잔뜩 구기고는 더 이상 상종하기도 싫다며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가운을 꽉- 쥐고 놔주지 않는 동우 때문에 차마 휴게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정말 화가 났는지 아까보다 더 살벌하게 표정을 굳히는 선웅에게, 동우가 지금까지는 본 적 없던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해왔다.
 
 
 
 
 
 
“ 불법이기 이전에! 사람 살리는 일이에요.”
 
“ 야 임마, 너…! ”
 
“ 선배 의사잖아요! 사람 살리려고 의사 된 거 아니었어요? 사람 좀 살려보겠다는데, 지금 그게 문제냐고요! 한시가 급하다고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 애가 죽고 만다구요! ”
 
 
 
 
 
 
선웅은 휴게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악에 바친 고함을 지른 동우의 모습에 조금은 놀란 듯 싶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자신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이긴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합법적일 때의 일이다.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아있고 별 사고도 없이 이 대학병원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고작 그 한 사람에게 자신의 미래를 걸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불법수술은 절대로 못… ”
 
“ 하, 그놈의 불법, 불법! 그게 대체 뭔데? 사람 목숨보다 그게 더 중요해? ”
 
 
 
 
 
 
결국엔 참다못한 호원이 동우를 자신의 뒤로 보내놓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불법 운운하며 내빼려고 하는 선웅의 모습이 그저 우스웠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고 심지어는 소름이 끼칠 정도의 위선으로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다른 이의 존재에 꽤나 놀란 듯, 선웅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호원을 응시할 뿐이었다.
 
 
 
 
 
 
“ 법? 그게 뭔데. 아아- 자기들 욕심 채우기 바빠 밥 먹듯이 어기고 그에 대한 벌은 대충 돈으로 메꾸면 용서되는 그 역겨운 거? 그게 법인가? ”
 
“ ……… ”
 
“ 웃기지 말라 그래. 당신네들은 지금까지 법 같은 거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살아왔어? 경쟁이 치열한 이 대학병원에서 단 한 개의 법도 어기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사람인가, 당신은? ”
 
“ …너, 뭐야….”
 
 
 
 
 
 
선웅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며 호원을 노려보았다. 사실 그가 한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맞는 말만 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선웅이 부들부들 떨며 두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도우러 갈 수도 없었다. 선웅은 저 자신의 양심이 콕콕- 쑤셔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한 채 휴게실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군.”
 
 
 
 
 
 
흰 색의 의사가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서늘한 총구 하나. 호원은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는 듯, 철컥- 총을 장전하고는 아무런 표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차갑게 말해왔다. 그에 선웅이 잔뜩 굳은 얼굴로 동우를 노려보았지만 동우도 호원의 행동을 말릴 생각은 없어보였다. 하, 내가 호랑이 같은 후배를 뒀군. 이렇게 뒷통수를 맞을 줄이야…. 이내 선웅은 허탈하다는 듯이 작게 미소를 짓고는 항복 선언을 하듯 두 손을 작게 위로 올리며 말해왔다.
 
 
 
 
 
 
“ 하, 그래요. 내가 졌습니다. 갈게요. 가면 될 거 아닙니까.”
 
“ 선배….”
 
“ 장동우, 너 끝나고 보자? ”
 
 
 
 
 
 
살벌한 선웅의 말에도 동우는 그저 좋다는 듯 그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에 선웅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여전히 자신의 옆구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호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해왔다.
 
 
 
 
 
 
“ 이제 그 총은 좀 치워주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이렇게 병원을 빠져나가는 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거라고 봅니다만.”
 
 
 
 
 
 
그의 말에, 호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총을 재킷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 총을 치우더라도 선웅은 자신이 할 말은 지킬 거라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때문에 별 말 않고 총을 치운 것이었고, 제 예상대로 선웅은 도망을 치지도, 그렇다고 불평을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을 따라 조용히 차에 탑승해주었다.
 
아란은 호원이 운전석에 탑승하려는 걸 막아서고는 그에게서 차키를 빼앗아 들었다. 그에 호원이 뭐하는 짓이냐는 듯 아란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 지금 너한테 운전 맡기면 우리 다 죽을 것 같아서.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한테서 나오는 그 열기가 확- 느껴지거든? ”
 
“ …뭐? ”
 
“ 너 운전하다가 기절할까봐 그런다고! 잔말 말고 빨리 타. 나도 거칠게 운전하는 거엔 꽤나 자신 있으니까.”
 
 
 
 
 
 
아까 다친 상처를 대충 소독만 하고 내버려둔 상태라, 현재 자신의 몸에서는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상태였다. 무작정 우겨대는 아란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긴 호원이 잔뜩 성을 내며 뒷자리에 탑승했다. 아까 그렇게 살벌하게 몰아붙인 선웅의 옆자리에 탄 것이 못마땅한 것인지 그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고, 그에 선웅이 웃기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팔짱을 낀 채 차 시트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대었다.
 
 
 
 
 
 
“ 의료 기구는? 다 있는 거야? ”
 
“ 네. 웬만한 대학병원 못지않게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 다쳤다는 그 사람은. 혈흉이 생긴지 얼마나 된 거지? ”
 
“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폐에 고인 피는 어느 정도 빼놓고 온 상태에요.”
 
“ CT도 안 찍어보고 바로 응급처치를 한 건가? 하, 역시. 네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구나. 그 실력 가지고 어디 가있나 했더니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냐? ”
 
 
 
 
 
 
선웅의 말에, 동우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쓰게 미소 지었다. 사실 동우도 몇 년 전까지는 대학병원에서 굉장히 촉망받는 의사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고는 돌연 그 자취를 감춰버렸고, 그나마 자신을 가장 잘 챙겨주었던 선배인 선웅에게만 간간히 전화로 연락을 해올 뿐이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그의 재능은 이렇게 썩히기 아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병원으로 돌아오라고 말을 한 들, 듣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선웅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차 시트에 더 편하게 몸을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불법수술이라…. 꽤나 피곤해지겠군.
 

새끼 호랑이한테 물려도 단단히 물렸어.
 
 
 
 
 
 


 

하지만 꽤나 재미있겠다는 듯, 작게 미소 짓는 선웅이었다.
 
 
 
 
 
 
 
 
 
 
 
 
 


 
 
 


* * *

 

 


 
 
 
 
 
 
“ 형!! ”
 
“ 명수는? 괜찮아? ”
 
“ 응. 아직 의식 있어…! ”
 
“ 잘했어. 잘했어, 성열아.”
 
 
 
 
 
 
차에서 내리자마자 선웅과 함께 재빨리 집으로 달려 들어온 동우는, 성열에게 잘했다는 말을 하며 그의 머리를 다정스레 쓸어주었다. 그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는 성열을 부축한 성종이었고, 아직 의식이 있는 명수에게 감사해하며 작게 미소 짓는 동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현재 명수는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호흡이 더 거칠어져 있었으니까. 금세 손 소독을 마치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까지 낀 선웅이 누워있는 명수를 흘끗- 보며 작게 웃었다.
 
 
 
 
 
 
“ 정신력이 대단한 친구네. 보통은 아파서 까무러치기 일쑤인데 말이야.”
 
 
 
 
 
 
선웅의 말에 그를 따라 살짝 미소를 머금은 동우가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명수야. 너는 꼭 살 이유가 있어. 아직 죽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치? 성열이를 두고… 네가 어떻게 가겠어. 버텨줘서 고마워. 고마워, 명수야. 동우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명수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고, 명수는 꼭 그것을 알아들은 것 마냥 눈을 접어 작게 웃어보였다. 형 마음 다 안 다는 듯이. 그에 동우는 무언가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며 여적 서있는 다른 이들에게 조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성종이는 나 좀 도와줄래? 그리고 성종이를 제외한 모두는 나가줘. 바로 수술 시작할 거니까.”
 
 
 
 
 
 
동우의 말에, 성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각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채 의료실 밖으로 나갔고, 이내 조용해진 의료실 안에는 동우와 성종, 선웅만이 명수의 곁에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취를 시작해달라고 말을 하려던 동우의 입이 굳게 닫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선웅이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PDA(*휴대용 컴퓨터의 일종)를 꺼내 그것의 전원을 꺼버린 것. 그에 동우가 놀라 선웅을 바라보자, 그는 왜 그리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냐는 듯이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이내 꺼진 PDA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 비록 협박받아 온 거긴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살려야지. 안 그래? ”
 
 
 
 
 
 
선웅의 말에 환하게 웃어보인 동우였지만, 곧 바로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선웅에게 눈짓을 한 번 해보였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선웅이 명수의 마취를 시작했고, 이내 명수는 서서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의료실에선 삑- 삑- 거리는 인위적인 기계음의 소리만 들려왔고, 선웅이 완전히 마취 되었다고 오케이 사인을 해보이자, 동우가 알았다는 듯 굳은 다짐이 어린 표정으로 성종과 선웅에게 눈을 한 번 맞추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수술을, 시작합니다.”
 
 
 
 
 
 
 
 
 
 


 

 

 
 
 
동우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을 냈다.
 
 

 

 

 

 

 

 

 

 

 

 

 

 

 

 

 

 

 

 

- 32 -

 

 

 

 

 

 


넓고도 넓은 집 안은 왁자지껄했던 평소와는 달리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동우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명수의 수술결과만을 초조하게 기다렸고, 명수의 수술이 시작 된지도 어느 덧 세 시간 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터진 상처를 제대로 꿰매지도 못하고 대충 소독만 해두었던 호원은, 병원에 꼭 가라던 성종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홀로 병원으로 향했고, 아란은 힘들어하는 성열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를 위로했다. 결국, 그 넓은 거실에 남은 이는 우현과 성규. 단 두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가 불편했지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대놓고 피하는 것 같아 선뜻 소파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 침묵의 한 가운데에서,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성규였다.

 

 


“ 우현아. ”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 같은 건 없었다. 우현의 고개는 이미 저에게서 반대쪽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그 마음도 쉬이 돌아올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우현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결국엔 입을 꾹 다물어버린 성규였고, 그런 그의 모습에 우현이 자신의 입술을 잘근 씹으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쏠렸다. 저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응, 성규야.’ 하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너에게 미안한 것 투성인데, 그것을 모두 모른 척 하고 그냥 너를 안아줘야 하는 걸까? 성규야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걸까?

 

자신들 사이에 이런 트러블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까, 현재 성규와 우현은 어찌해야 될지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는 스타일도 아니었기에, 지금 처한 이 문제는 저 자신들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서로 이렇게나 말 하나와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망설이는 것이겠지.

 

 

 


“ 이거 하나만 알아줘, 우현아. 나는 너를 믿지 않은 게 아니야. 나는 그저… ”

 

 

 


그때 마침 성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그에 우현은 아까처럼 고개를 돌려 회피하지 않고 성규의 두 눈을 마주보았다. 몸이 떨리고,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 너는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명수가 잘못될까봐. 그리고 내가, 너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봐. 그렇지, 김성규.

 

아무 말 없이 멍한 동공을 한 채 그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네가 있는 이 공간에서도 숨이 막혀왔다. 김성규 너 때문이 아닌, 너와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스러움에.

 

 


“ 울지 마. ”

“ …안 울어. ”

“ 약해지지도 마. ”

“ …우현아? ”

“ 강해져야 돼. 강해져야… 살아남아. 나는, 우리는…. ”

 

 


두 주먹을 꽈악 쥔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우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성규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갔다. 방금 우현이 던진 저 말들은 제게 한 말이 아니다. 우현 저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 던진 가시 같은 말들. 울지 말라고, 약해지지 말라고.

 나는,


강해져야 한다고.

 

 


“ 네가 미웠던 게 아니야. 내가, 내가 미웠어. 당장이라도 죽고 싶을 만큼. ”

“ ………. ”

“ 그리고 울고 싶었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너를 보았을 때, 네가 다치고 명수가 납치되던 그 순간. 널 혼자 두었다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죄스러워서. 나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하는 마음에 내 스스로를 원망했어.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너를 몰아붙였어, 성규야. ”

“ ………. ”

“ 욕해도 좋아. 못난 놈이라고, 찌질한 새끼라고…. 틀린 거 하나 없으니까.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은 잘 하면서 네가 다치던 그 순간에 나는 네 옆에 있어주지 못했고, 너는 홀로 명수를 지키려다 다치고 말았지. 그리고 명수는… 저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상태고. ”

 

 


위태롭다. 지금 우현의 상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딱 맞을 것이다. 그는 매우 위태로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우현의 앞으로 걸어가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작은 머리통을 조심스레 제 품에 묻었다. 제 허리를 감싸지도 못할 만큼 우현은 몸과 마음. 두 가지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 울어도 돼. ”

“ 성, 규야…. ”

“ 강해지지 않아도 돼. ”

“ 하으…. ”

“ 꼭, 강해질 필요 없어, 우현아. 왜 너만 참아. 왜 힘들어도 티를 안 내. 리더라서? 남우현이라서? 그딴 게 다 뭔데. 너 지금 많이 외롭잖아. 힘들잖아. 아프잖아! 명수와 내가 다친 걸 왜 다 네 탓으로 돌려. 그런 게 리더야?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울고! 그런 게 리더냐고, 남우현!! ”

 

 


흐느끼지만, 눈물은 흘리지 못하는 가여운 너를 더욱 더 세게 끌어안고 내가 대신 울었다. 너로 인해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 내가,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너를 대신해 울어주었다. 나는 너로 인해 아픔을 표현하고, 기대는 법을 배웠는데. 너는 어째서 그러지를 못할까. 꼭 네가 내 아픔을 모두 흡수해간 것 같아 마음이 몹시도 저려왔다.

 

너와 내가 그 조용한 Bar 안에서 첫 만남을 가지고, 너의 아픈 과거를 듣고, 함께 첫 번째 임무를 수행했다. 그간 내게는 없었던 평범한 휴일을 너와 함께 보내고, 내 직업으로 인해 쏟아져 내리는 그 빗속에서 나는 너를 아프게 했고, 그 날, 날이 새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던 너에게 마음을 열어 내 과거를 들려주고, 너와 입맞춤을 했어. 서로를 격려해 가며 사격훈련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웃음을 나누고, 아픈 몸과 정신을 하고도 꿋꿋이 두 번째 임무를 수행했지. 하지만 무너져가는 건물 안에서 늦도록 나오지 않는 나 때문에 또 한 번 너의 가슴은 무너졌고, 무사히 탈출한 나의 모습에 안도한 너는 그대로 내 품에서 정신을 놓고 말았었다. 그 많은 일이 있었던 동안, 너는 내게 수많은 감정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었지만 내비치지 않은 감정 한 가지가 있었어. 아픈 과거를 말한 나를 대신해 울어주었던 너였지만, 정작 네가 아프고 힘들어서 운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다 참고, 견디고, 홀로 삭혀서 그 가슴은 이미 썩어문드러진 상태겠지.

 

 


“ 네가 나한테… 기대줬으면 좋겠어, 우현아…. ”

“ ………. ”

“ 울고 싶으면 그냥 말없이 다가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어도 돼. 투정 부리고 싶으면 내 다리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아도 돼. 문득 외로워지면 네 옆에 있는 내 손을 꽉, 잡아도 돼.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너도 나를 필요로 하고 기대줬으면 좋겠다. ”

 

 


진심어린 그의 말에, 성규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우현의 입 꼬리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서로의 마음이 어떤지, 얼마나 큰 아픔을 혼자 감당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안다. 눈만 봐도 네가 어떤 기분인지 네가 겪고 있는 그 아픔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다 알아. 너 또한 그렇겠지, 성규야? 네 말대로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네가 없으면 내가 죽고, 내가 없으면 네가 죽고. 이렇게 생각하니 참 신기해. 서로 다르게 살아가던 우리 두 사람이 만나 이제는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말이야. 이것은 인연일까, 악연일까? 내 생각엔 아마도 그 둘 다이지 않을까 싶어. 함께 있으면 약이 될 수 있는 깊은 인연과, 떨어져 있으면 서로에게 독이 되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의 악연.

 

 


“ 고마워, 성규야. ”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상관은 없어. 인연이면 어떻고, 악연이면 어때?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사람이 너고,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너이면 돼. 악연이고 인연이고 그딴 거 다 필요 없이 그냥 김성규면, 그 자체로 나에겐 모두 축복이야.


외롭고 허하던 아까와는 달리, 성규와 대화로 풀고 나니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현이 성규의 품에서 나와 이제 그만 우리도 성열이에게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소파에서 일어난 그 순간,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동우의 방문이 열리고, 이윽고 한껏 지친 모습의 세 사람이 마스크와 장갑을 벗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우현과 성규가 다급한 얼굴로 동우를 쳐다보았고, 문소리를 들은 아란과 성열 또한 방에서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하며 동우의 앞에 섰다.

 

 

 


“ 수술은 잘 끝났어. 하지만 몸 상태도 그렇고, 정신적인 충격도 있었을 거야. 때문에 명수는 현재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니까, 당분간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건 나, 그리고 성열이만 가능해. 너희들 모두 명수가 걱정되고 보고 싶은 건 알겠지만 당분간이니까, 조금만 참아줘. ”

 

 

 


동우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명수의 상태가 궁금하긴 했지만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라고 하니 참을 수밖에. 그때, 동우가 이 중 없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으려 집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동우의 얼굴이 금방 어둡게 변했다.

 

 

 


“ 호원이는? ”

“ 아, 상처 때문에 열이 계속 나서 택시 태워서 병원 보냈어요. 제가 따라가겠다고 하는 걸, 극구 말리 길래 저는 그냥 성열이 옆에 있어줬고요. ”

 

 

 


걱정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해오는 아란을 빤히 바라보던 동우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한 듯 두 손으로 제 눈을 꾸욱 누르다 작게 비볐다. 성종 또한 처음 해보는 어시스트 일이 버거웠던 것인지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걸이로 소파까지 걸어가 이윽고 그곳에 털썩, 몸을 뉘였다. 그 중 가장 멀쩡한 선웅은 처음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싱글싱글 웃으며 피곤해하는 동우의 어깨를 힘 있게 잡아주며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에 동우 또한 고맙다며 웃었고, 이내 그가 시선을 돌린 곳엔, 들어갈 수 있게 허락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명수가 있는 곳으로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성열이 있었다.

 

 


“ 성열아. 들어가 봐. 수술도 되게 잘 끝났고, 명수는 체력이 좋아서 금방 눈 뜰 거야. ”

 

 


성열의 두 눈망울에 투명한 액체가 한 가득 고였다 새하얀 볼을 타고 주욱- 흘러내렸다.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성열은 많이 아파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겠다는 양 한 걸음, 한 걸음 꿋꿋이 걸음을 떼는 성열의 모습에, 그를 부축하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명수에게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험난하고 아팠다. 간신히 동우의 방 앞까지 간 성열이 심호흡을 하며 애써 울음을 참아내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이익- 하는 흔한 문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부드럽게 열린 문 틈 사이로 어두침침한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방 안으로 들어선 성열이 방문을 닫고는 조심스레, 천천히 명수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 으흑…. ”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몸의 상체에 새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머리며 팔이며 다리며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명수의 모습이, 눈물로 인해 뿌연 시야 틈 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수의 모습이 제 눈엔 너무나도 잘 들어와서, 그가 겪었을 고통이 모두 느껴져서, 그래서 참았던 눈물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지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가 깨지 않도록, 명수의 손을 꼬옥 붙잡고 그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흐느끼는 성열의 모습은 그 누가 보아도 아프고 안타까웠다. 최대한 진정해보려 노력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흐느끼는 두 어깨가 부들부들 떨려오고 입술을 악 물어봐도 그 틈 새로 비집고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 고, 마워…. 고마워, 명수, 야…. ”

 

 


몇 시간 전 그 차가운 체온의 네가 아니어서 너무 고마워. 이 따뜻한 손으로 날 반겨줘서, 그래서 고마워, 명수야. 숨을 쉴 때 마다 폐를 찔러오는 그 엄청난 아픔에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었을 텐데, 끝까지 내 손 놓지 않고 잡아줘서… 내 눈 보고 웃어줘서, 그리고… 무섭다고 울어줘서…. 고마워, 김명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 사랑해. ”

 

 


내 마음이 죽지 않게 해줘서,

 

 

     사랑해, 김명수.

 

 

 

 

 

 

 

 

 


* * *

 

 

 

 


어둡고 습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끌려오면서 맞았던 부위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는 구토까지 유발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토기에 헛구역질도 몇 번 해봤지만 그때마다 날아오는 발길질에 나는 또 두 눈을 꾹 감고 아픔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당해보는 ‘납치’였다. 형사로 일을 하면서도 납치를 당한 사람을 구해본 적은 있었지만 내가 그 일을 당한 적은 없었고, 늘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 했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대신해 그들에게 ‘납치’를 당하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도, 자신들을 엿 먹인 원본동영상도 아닌, 나. 김명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 형들, 성열이, 성종이, 아란 누나. 누가 지켜주지, 하는 마음에 두려움이 크게 일었다. 내 대신 그들을 위해 목숨 걸고 법정에서 싸워줄 사람이 있을까.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온전히 ‘그들’을 위해 그 치열한 싸움을 해줄 그런 변호사가 과연 있을까, 하는 그 마음에서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게 쏟아져 내리는 무차별한 발길질에도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독한 놈이라고 욕까지 해가며 힘을 더 세게 가해 폭력을 행사했지만 끝까지 그 흔한 흐느낌조차도 내지 않았다. 아마도 오기였던 것 같다. 여기까지 끌려왔음에도 나는 죽을 수 없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이런 것조차 감내하지 못한다면 정말 이곳에서 차게 식은 시체로 내보내 질 것 같아서. 차게 식은 나의 몸뚱아리를 안고 그 누구보다 아파할, 우리 성열이가 눈에 밟혀서. 그래서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우두머리급으로 보이는, 흰색의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자리 잡은 한 남성이 내게 다가왔다. W그룹의 대표이자 그 그룹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조직의 우두머리. 한 손으로는 내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단도를 빙빙 돌리며 씨익, 웃고 있는 남자의 미소가 역겨워 또 다시 토기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 자, 말해봐. 시티헌터와는 무슨 관계지? ”

“ 크흑…. 너 같은 새끼가, 입에 담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거든…? ”

 

 

 

 


여기저기서 아프다고 아우성을 쳐대는 몸 때문에 뚝뚝 끊기듯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그래도 내 의사는 제대로 전달이 된 것 같았다. 내 앞에 있는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수하들까지 아까보다 표정을 더 무섭게 굳히며 이를 악 물고 나를 노려보았으니까. 아아- 살겠다고 했으면서 더 자극을 해버린 꼴인가…. 그럼 안 되는데.

 

]

 


“ 그럼 질문을 바꾸지. 네 정체는… 으윽! 이 미친 새끼가…! ”

“ 푸흐…. 기분 죽이죠, 아저씨? 내 정체는 알아서 뭐하게? 난 그냥 평범한 민간인일 뿐입니다. 시티헌터? 그게 뭔데? ”

 

 

 


다시 한 번 내게 질문을 하려는 그 면상에 대고 침을 퉤, 내뱉었다. 그에 보기 좋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내게 즐거움을 선사했고,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맞은 배가 아파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내 웃음에 더더욱 기분이 상한 회장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벅벅, 거칠게 얼굴을 문질러 닦은 다음, 그 손수건을 내게 던져버리고 한 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뒤 돌아서 창고를 빠져나갔다.

 

 

 


“ 인신매매를 하던, 저 좋은 머리 어디에 팔아먹던 어떻게 괴롭혀도 좋아. 하지만 절대로 한 번에 죽이지는 마. 적당히 손 좀 봐주다가, 그만 지가 죽고 싶어 할 때, 그때 죽여 버려. ”

“ 예, 회장님. ”

 

 

 


그의 말을 듣자마자 또 다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저 말대로라면 아직 시간이 있다는 뜻인데,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그들은 분명 저를 구하러 올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 그 하나를 끌어안은 채.

 

그들이 내게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목과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걸 보니 또 한 바탕 하실 기세군. 겁 따위 이미 상실한지 오래다. 이 상황에서까지 네가 보고 싶다면, 이성열 너를 내 품에 안고 싶어 한다면. 나 정말,


미친 걸까?

 

 


너는 분명 죄책감에 몸서리치겠지. 내가 명수를 죽였어. 명수를 그곳에 보내지만 않았어도, 자는 애를 깨워 운전 시키지만 않았어도. 라고 하며 네 자신을 마구 괴롭히겠지. 나는 언제나 너보다 한 수 위야, 성열아. 네가 알지 못하는 너 자신의 부분까지도 나는 모두 알고 있어. 네가 우는 그 모습이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 하나하나 그려져서, 그래서 나는 매우 아프다. 내게로 날아오는 발들과 주먹보다도 네 얼굴이 더 아파서, 그래서 운다.

 

네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 성열아.

 

 

 

 

 

 

 

 

 

 

* * *

 

 

 

 

 

 

“ 하윽…. ”

 

 


고통스러웠다. 그 끔찍한 꿈을 꾸며 일어난 이 현실조차 고통 그 자체였다. 갈비뼈 부근을 누군가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와 동시에, 손에 잡히는 누군가의 하얀 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그 손의 주인공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성열이 있었다. 그 잔인한 꿈속에서조차 그렇게도 찾았던 너인데, 눈을 뜨자마자 네가 있어서. 비록 고통스럽게 잔뜩 뭉그러진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너무 예쁘고 소중해서. 내 몸을 압박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웃어보였다.

 

 


“ 명수야…. ”

 

 


말을 하려 입을 벙끗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었다간 정말 죽어버릴 것 같은 고통이 제 몸을 집어 삼킬 것 같았다. 그에 이해한다는 듯, 더 이상 애쓰지 말라는 듯 머리를 다정스레 쓸어 넘겨주며 울어버리고 마는 성열이었다. 네 손길은 그렇게나 다정한데 왜 얼굴은 그렇게나 슬퍼. 너 두고 어디 안 갔어, 성열아. 너 보고 싶어서, 널 위해서 나 버텼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좀 웃어주라.

 

 


“ 잘… 잤어? ”

 

 


나 이성열은 말을 하지 못해도 네 눈빛만 봐도 안다. 네가 뭘 원하는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래서 웃어보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못난 눈물 따위는 거칠게 닦아버리고 부르르 떨려오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너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런 성열의 노력을 알았던 것일까, 명수 또한 올라가지 않는 입 꼬리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 크고 깊은 눈망울에서 투명한 액체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성열도 다시 울음보를 터뜨렸다.

 

 


“ 수고…했어, 명수야…. ”

“ …성, 열…. ”

 

 


많은 대화가 오고 갈 수는 없었다. 명수는 고통에 겨워 말하기조차 힘들었고, 성열 또한 북받치는 감정에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아쉬움 따위는 던져버린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비록 그 얼굴이 눈물범벅이긴 했어도, 서로를 향한 그 미소만은 선명하고도 아름다워서.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음에. 이 손을 다시 잡을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

 

명수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저 자신의 얼굴도 닦아낸 성열이 이내 그의 손에 다시 한 번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는 다정스럽고도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이 느껴져, 또 한 번 눈물이 새어나오려고 했지만 그 눈물을 미소로 바꾸어 씨익, 웃어버렸다. 우리 이제 진짜로 행복하자. 불안에 떨기 싫어. 너 다칠까봐 마음 졸이는 거, 네가 없는 이 집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너 기다리는 거. 이제 더는 하기 싫어. 우현이 형이랑 성규 형의 복수까지만 제대로 하고, 정말 모든 거 털어버리고 행복하게 웃자. 해커라는 직업도 그만두고, 너 변호사라는 직업도 관두고. 우리 그냥 소소하게 카페나 차려서 그렇게 알콩달콩 사랑하자, 명수야. 이제 우리 그만 울자.

 


더 이상… 아프지 말자, 우리.

 

 

 

 

 

 

 

 

 


* * *

 

 

 

 

 

한편, 상처를 꿰매고 이대로는 어지러워 도저히 집까지 갈 수가 없겠다는 생각에 잠시 동안만 링거를 맞으며 누워있는 다는 것이 몇 시간을 자버리고 말아서, 밤이 깊어서야 집에 들어온 호원이었다. 다들 잠이 든 것인지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집안의 분위기에, 종종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던 호원이, 문득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유리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옅은 불빛과 함께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보여,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호원이었다.

 

 


“ 바보 같이. 혼자 왜 그러고 있어요. 술도 잘 못하는 사람이. ”

“ 아, 호원아. 상처는… 잘 꿰매고 왔어? ”

“ 네, 뭐. 그럭저럭. 그런데 역시 나는 동우 형 손맛이 좋더라고요. 마음에 안 들어요, 다른 사람 손맛은. ”

“ 푸흡. 그게 뭐야…. 상처 꿰매는 데도 손맛이 있어? ”

“ 그럼요. 우리 동우 형 거는 하나도 안 아픈데, 거기는 되게 아프더라고요. ”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며 자연스레 동우의 옆자리에 앉는 호원이었다. 그에 동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호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왜, 맞은편에 앉지 않고? 그럼 술 마시기 어렵잖아. ”

“ 맞은편에 앉으면, 형 안아주기 힘들잖아요. ”

“ …어? ”

“ 형은 되게 거짓말 못해. 알아요? 나 되게 눈치 없거든요? 주변 사람들이 나보고 너 되게 눈치 없어. 할 때도 박박 우기면서 아니라고 하긴 했는데 솔직히 나도 내가 눈치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그 눈치 없는 이호원이, 지금 형이 되게 울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눈치 챘어요. ”

“ ………. ”

“ 그러니까 형은, 거짓말… 엄-청 못하는 거예요. ”

 

 


그 말과 함께 잔뜩 굳어있는 동우를 그대로 제 품으로 당겨 안아버리는 호원이었다. 가뜩이나 마른 동우의 몸이 한 품에 들어왔고, 그에 호원이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리 풀죽어있는 동우의 등을 작게 토닥였다. 사실 나는 아까부터 다 알았어요. 형이 되게 무서워하고 있다는 거. 이 팀에서 의사라고는 형 하난데, 그 의사가 자기 팀원 하나 살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형의 불안함 같은 거. 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형 수술 끝났을 때 바로 안아주면서 위로해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 형한테 엄청 미안해, 지금.

 

 


“ 무서웠죠. 힘들었죠. ”

“ ………. ”

“ 미안해요. 끝나자마자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

 

 


동우가 호원의 옷깃을 꼬옥 붙들고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모두가 잠든 시각이라 차마 소리 내어 흐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 곁에 있는 호원에게 의지한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동우였다.

 

무섭고 두려웠다. 수술은 굉장히 오랜만이어서, 그런 제가 한시라도 위급한 명수를 죽일까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모두가 저만 믿고 명수를 데리고 왔을 텐데,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어 일부러 강한 척을 했지만 사실 수술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호원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안겨 한 마디만. 단 한 마디라도 들으면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더 무서웠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어린아이 같이…. 무사히 수술이 끝난 뒤 호원이 제 곁에 없다는 그 사실에 매우 서글펐던 것 같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제 감정을 미리부터 알아채고 있던 호원이라서, 지금 저 자신이 원하는 위로가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아닌, 이호원 품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너라서. 그래서 서운함 따위는 금세 잊어버렸다. 날 품에 끌어안고 아무 말 없이 등을 다독여주는 네가, 정말 딱 이호원 같아서. 내가 사랑하는, 한 눈에 반했던 이호원의 모습 그대로여서, 그래서 나는 너무 좋았다.

 

 


“ 자도 돼요. 그런데 그건 책임 못 져요. 형 자는 사이에 내가 형 침대로 데리고 가서 무슨 짓 할지도 몰라. ”

“ 풉. 뭐어? ”

“ 농담이에요, 농담. 아, 나 그렇게 늑대 아니거든요? 걱정 말고 자요. 내일 아침 눈 뜨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형 옆에 있어줄 테니까. ”

 

 


믿음직스러운 그의 말에, 동우가 샐쭉 웃어 보이며 더더욱 호원의 품으로 파고들어 눈을 내리감았다. 비록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도 아니었고 앉은 상태여서 불편한 게 당연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솔솔 쏟아졌다. 수면제라도 먹은 것 마냥, 그의 품 안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잠이 들고 말았다.

 

 


“ 잘 자요, 동우 형. ”

 

 


그의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 * *

 

 

 

 

 

한껏 가라앉았던 집 안의 공기는 명수의 몸이 점차 회복됨으로써 서서히 밝은 분위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비록 아직 빨리 걷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나름 어느 정도는 혼자서 걸을 수가 있게 된 명수였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변화는, 안 그래도 좋았던 의리가 더욱 더 끈끈해졌다는 것. 그리고 각 커플간의 애정도 또한 높아졌다는 것. 물론, 솔로인 아란과 성종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쓰디 쓴 눈물을 삼키는 날이 많아졌지만 말이다.

 

 


“ 다들 모여 봐! ”

 

 


갑작스레 모두를 불러 모으는 성규의 목소리에,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거실로 모이는 그들이었다. 성열의 부축에 의해 소파에 앉은 명수와 당연하듯 그 옆에 앉아 명수의 손을 꼭 잡은 성열. 동우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나온 호원과 제 어깨에서 손 좀 떼라는 듯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이는 동우. 그리고 한창 열중하던 게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못마땅한 표정인 아란과 성종. 마지막으로 성규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알고 터줏대감 마냥 소파에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우현까지. 여덟 명 모두가 거실 한 가운데에 모였다. 우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무슨 일로 불렀냐는 표정으로 성규를 올려다보았고, 그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씨익, 지은 성규가 이내 입을 열어 말했다.

 

 


“ 여행가자, 우리. ”

 

 


성규의 말에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환호하며 당장이라도 짐을 챙겨야겠다며 방방 뛰며 기뻐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성규의 입가에서 이내 점차 미소가 사라져갔다. 그들 모두가 겉으로는 기쁜 얼굴을 하며 들뜬 연기를 하고 있지만, 너희들도 알고 있는 거지. 어쩌면 이 여행이, 우리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그런 우울한 말 따위 해서 좋은 건 하나도 없었기에, 애써 그 말을 꾸욱 누른 성규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여전히 함박웃음을 띄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제대로 된 추억 만들고 오자.


나중에,

 


후회하는 일 따위 없도록….

 

 

 

 

 

그렇게, 웃고 오자. 우리.

 

 

 

 

 

 

 

 

 

 

 

 

 

 

 

- 33 -

 

 

 

 

 

 

 바스락바스락. 무언가 뒤척이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맴돈다. 덕분에 잠에서 깬 명수가 두 눈을 비비며 눈을 뜨자, 무얼 그리도 열심히 하고 있는지 아이처럼 귀엽게 바닥에 앉아, 자신의 서랍을 뒤지고 있는 성열의 동그란 뒷통수가 눈에 띈다. 그에 명수는 반쯤 몸을 일으켜 세워 성열이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여기, 이건 또 여기.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제 옷과 속옷을 커다란 캐리어에 열심히 넣고 있는 그가 오늘따라 더 사랑스럽고 예뻐 보였다.

 

 


“ 이쁜아. ”

“ 어? 명수야, 깼어? ”

“ 응. 뭐해? 짐 싸는 거야? 도와줄까? ”

“ 아니야. 거의 다 쌌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미리 싸두라고 성규 형이 그래서. ”

 

 


  귓가에 착착 감기는 성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명수가 싱긋 웃어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좋다고 생각하며 이불에서 나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리는 명수다. 그에 성열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명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 나 계속 다칠까봐. ”

“ 뭐? ”

“ 농담이지, 농담.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나는 그냥… 평소에 떽떽대다가 내가 다치니까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마냥 잘 따르는 네가 너무 예뻐서. ”

“ 강아지라니! 김명수 너 내가 강아지 같아!? ”

“ 응. 멍멍 짖는 하얗고 예쁜 강아지. ”

 

 


  명수의 말에, 성열이 그를 밉지 않게 쏘아보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그대로 그의 가슴께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명수의 팔은 자연스레 올라와 성열의 어깨를 끌어안고, 짧은 숨을 토해내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다쳐오는 저 때문에 성열의 걱정과 한숨이 늘어가고 있다는 건 눈치껏 알아차렸다. 그를 위해 최대한 다치지 않으려 노력은 해보지만 상황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기에 늘 이렇게 그의 속을 썩이고 마는 자신이 매우 한심하고 못나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다치지 말라느니, 죽지 말라느니 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성열도 예전에 비해서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져 내심 뿌듯하기도 하면서 마음이 아렸다.

 

  성열아, 이들의 아픔은 너 대신 내가 다 안고 싶어. 너는 그저, 내 옆에서 건강히, 예쁘게만 웃어주면 돼. 형들과 나의 아픔까지 네가 짊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순전히 이성열이라는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서지, 네가 아픈 걸 보려는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넌 예전의 이성열 그대로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남아줘. 내가 전에 그랬지?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면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될 거고, 너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또한 내게도 해가 되는 사람일 거라고. 이렇듯 내 세상은 언제나 이성열 위주로 돌아가.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이제는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그래서 그게 한편으론 힘들면서도 또 엄청난 행복이 돼. 너는 내게 그래, 성열아.

 

내 세상은, 이성열이 전부야.

 

 

 

 


“ 성열아, 나 그거 다 기억난다? 수술실에서, 힘든 내 손을 꼭 붙들고 울면서 네가 했던 그 말들.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 ”

“ ………. ”

“ 그때 사실 되게 행복했다? 숨은 쉬지 못하겠고, 진짜 금방이라도 눈 감고 자고 싶었는데…. 그만큼 힘들었는데, 네가 날 깨워줬어.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데, 정말 거짓말 같게도 하나도 아프지가 않은 거야.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던 머리에, 고등학생 시절의 김명수와 이성열이 한 가득 들어차버렸어.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

“ ………. ”

“ 그런데 있잖아, 육체적인 고통은 없는데, 네 눈물이 너무 아픈 거야. 마음이 너무 아팠어. 내가 눈을 감으면 우리 형들하고 누나, 성종이, 그리고… 우리 성열이 누가 지켜주나 하는 마음에. 아직 복수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죽으면 우리 팀원들 모두 사기를 잃고 복수고 뭐고 다 때려치울 거 같아서.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그럴까봐 무서웠어. 그래서 이 악물고 견뎠어. 우리 가족… 지키려고. 이젠 내게 무엇보다도 소중해, 그 사람들. ”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성열은, 명수가 좋아하는 그 중저음의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꺼내었다.

 

 


“ 그들에게도 너는 매우 소중한 사람이야, 명수야. 내게는 말 할 것도 없이 소중하고. 사실 나는 평범하고 안정적이게 살던 너를 이곳으로 데려 와버린 나를 죽이고 싶었어. 내가 못된 놈이야. 잘 살고 있는 너를 데리고 와서, 이렇게 말 못할 아픔을 겪게 하고 쫓기게 만들었어. 근데 있잖아. 제일 무서운 건 뭔 줄 알아? 바로, 이만큼 괴롭혔으면서도 널 놓아줄 수 없는 나야. 끝까지 너와 함께하고 싶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이성열. ”

 

 


  그렇지 않아. 너는… 누구보다도 착해. 그 말과 함께 성열의 어깨를 더욱 더 꼬옥 끌어안는 명수였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는 듣지 않아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네 입으로 듣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을 하며 너 스스로를 찌를 이성열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성열이 네가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픔을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어.

 

 


“ 네가 그랬었지. 나를 이 팀에 끌어들인 죄는… 언젠가 네가 달게 받겠다고. 그러니 그 죗값을 나까지 받게 하지는 말라고. 그런데 넌 틀렸어. 그 죗값은, 너 혼자만이 받을 게 아니야. 네가 이 팀에 들어와 달라고 먼저 제안을 한 것은 맞지만, 이 집에 발을 들인 건 바로 내 자신이야. 내가 결정을 내린 거야. 너와 그들을 돕겠다고. 그러니 그 죗값이, 꼭 받아야만 하는 것이라면… 만약 신이 그렇게도 잔인하시다면… 우리 함께 받자. 지금처럼 나는 너를 안고, 너는 내 품에 안긴 채. 그렇게 함께 받자. ”

 

 


  정말 울지 않으려고 했다. 더 이상은 약해지기 싫어서, 그들처럼 강해지고 싶어서 울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꾹 참고 참았는데…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명수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 꼬리를 타고, 새하얀 볼을 타고, 마지막으로 턱을 타고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매로 닦고, 또 닦아보아도 눈물이 그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자극제가 된 것처럼 눈물은 흐르고, 넘쳤다.

 

  성열이 명수의 옷깃을 더욱 더 꽉 붙잡고 어깨를 떨어가며 울기 시작했다. 이내 그 조용한 흐느낌은, 서럽게 터져 명수의 옷을 눈물로 전부 다 적셔버리고 말았지만, 명수는 끝까지 성열을 놓지 않고, 아니, 놓칠 수 없다는 듯 그를 제 품 안에 한 가득 담아내었다.

 


  명수 너의 세상은 내가 차지해버렸고, 내 세상은 네가 차지해버렸다. 지금 와서 후회한 들,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고 사랑 또한 변할 수 없다. 이왕 이렇게 되었고 다른 방도가 없다면,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너를 밀어내며 아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다. 언젠가 죗값을 치르라면 치를 것이고, 그것이 나 혼자든 명수 너와 함께이든 나는 끝까지 너를 놓을 수가 없다. 김명수가 없으면, 이성열은 빈껍데기일 뿐이야.

 

 

 

 


“ 사랑해. 도저히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

 


   내 세상의 주인은,

 

 

 


             바로 너야, 명수야.

 

 

 

 

 

 

 

 

 

 

 

 

* * *

 

 

 

 

 

 

  딸랑. 카페의 문이 경쾌한 방울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카페로 들어선 남자는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고, 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카페 밖을 내다보고 있는 제 일행을 찾았지만 한 동안 그 자리에서 꿈쩍을 않고 옷매무새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그제 서야 그 쪽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 무슨 일이야? 네가 카페에서 다 보자고 하고. 이런 데서는 막, 심각한 대화 하고 그러지 않냐? 드라마에서 보면 그렇던데. 그러다 뜬금없이 물벼락 맞고. ”

“ 왔어? ”

 

 


  이제 막 와서 자리를 잡고 앉은 이는 호원. 그리고 그를 이곳으로 불러낸 사람은 창선이었다. 오늘따라 두 사람의 모습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평소 할 말만 하던 호원은, 만나자마자 수다쟁이라도 된 것 마냥 쓸 데 없는 말까지 덧붙여가며 애써 웃음 지었고, 평소에 호원보다 말이 많던 창선은, 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호원을 바라보며 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내 마주보게 된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만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대화가 없는 두 사람의 사이에선 무언가 알 수 없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 끝에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창선이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

“ 언제는 네가 돌려서 얘기했어? ”

“ 이호원. 나 장난 하는 거 아니야. ”

“ 그럼 나는. 장난으로 보여? ”

“ 이호원. ”

“ 그래. 창선아. ”

 

 


  중점이 무엇인지도 모를 대화가 오고 갔다. 창선은 그 무언가에 분노를 느끼고 또 동시에 매우 슬픈 빛을 띤 눈을 하고 있고, 호원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뉘앙스의 표정을 하고 있다.

 

 


“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호텔인 H호텔이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난 건, 알고 있지. ”

“ 알지. ”

“ 그곳의 담당이 우리 국정원이고, 그 중 너와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

“ 알아. ”

“ 왜 안 나왔어. 이럴 줄 알고… 나오지 않았어? 다 알고? 우리 엿 먹이려고!? ”

“ 목소리 낮춰라. 여기 공공장소거든. ”

“ 시발, 지금 내가 목소리 낮추게 생겼어!? ”

 

 


  웬만해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욕도 하지 않는 창선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호원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몰렸지만, 방금 했던 말과는 달리, 호원은 상관없다는 듯 제 앞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셨다. 흥분한 제 모습에 비해, 호원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안하기 그지없어 열 받은 창선이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호원을 마주보았다.

 

 


“ 그 호텔은 모두 처참히 붕괴 되었지만, 단 하나의 증거가 남았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어떤 누군가의 진술보다도 정확한, 가장 믿음직한 증거. CCTV. ”

“ ………. ”

“ 하, 그런데 그게 정말 뭐 같게도 모두 타버리고 딱 하나 남아있더라고? 그리고 난 거기서 익숙한 얼굴을 둘 봤어. 이호원. 그리고, ”

“ …남우현. ”

 

 


  창선이 하려던 말을 뒤 이은 호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더 열이 받았다. 어떻게 저런 표정일 수가 있는지, 창선으로써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엔 폭발한 창선이, 카페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 야 이 개새끼야! 알고도 남우현을 숨겼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

“ 걔가 어떤 사람인데. 남우현이 어떤 사람인데? ”

“ 이호원!! ”

“ 걔가 뭘 잘못했어. 시발, 그깟 임무 실패한 거? 그게 한 순간에 사람을 병신 만들 만큼, 대단한 일이었어? 그게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야!? ”

“ 야!! ”

“ 아하- 그 잘난 국정원? 내가 거길 왜 들어갔는데. 정의실현? 그딴 거 개나 주라고 해. 난 거기 남우현 따라간 거였거든. 부모님 잃고 방황하던 내게 제일 큰 힘이 되어준 게 남우현이고! 내 가족 되어준 게…! ”

“ ………. ”

“ 그 사람들…이었거든…? ”

 

 


  처음이었다. 호원이 흘리는 눈물은 우현의 장례식 때 이후론, 정말 처음이었다. 그래서 할 말을 잃은 창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흐느끼는 호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흐른다. 피가 나다 못해 이미 곪아 터져버린 남우현의 상처마냥, 그칠 생각도, 나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 그 사람들이 내 가족이자, 은인이야. 그래서 남우현 따라서 존나게 공부해서 국정원 입사했고! 일도 열심히 했어. 그런데, 국가를 그리도 사랑했던 남우현을 한 순간에 병신새끼로 만든 게 누군데. 국가밖에 몰랐던 그 새끼! 죽인 게 누군데!! 이 나라… 대한민국이야. 틀려? ”

“ 그래서. 복수라도 하겠다, 이 말이냐, 너 지금? ”

“ 하, 복수? 복수 좋지. 그런데 우린 나라에 대한 복수보다도, 일단 그 사람들이 누군지 부터 알아야겠거든? 남우현 차랑 부모님 차에 폭탄 설치한 놈이랑, 우리 후배들… 아직 새파랗게 어리던, 우리 후배들 죽인 놈이랑! 병헌이… 내 또 다른 동생 죽인 그 놈들, 내가 면상은 보고 죽어야겠거든? ”

 

 


  호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창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껏 제가 알던 호원과는 너무 달라 덜컥 겁이 났다. 지금까지 알던 제 친구 이호원이 아닌 것만 같았고, 이유 모를 서러움이 함께 제 몸을 덮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내보는 창선이었다.

 

 


“ 그만… 둬라. 아직 CCTV는 나밖에 못 봤어. 이대로 멈추면, 나도 모른 척 하고 넘어갈게. 그러니까, 더 이상 진실을 알려고 하지 마. 여기서 멈춰, 이호원. ”

“ 싫어. ”

“ 너 진짜! ”

“ 그렇게는 못해. 국정원에 알리려면 알려. 우리 생각은 변함없으니까. ”

“ 그냥 다치는 걸로 끝나지 않아! 죽는다고, 모두!! ”

“ 상관없어. 우리가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

 

 


  생각보다 너무도 단호한 호원의 태도에 할 말을 잃은 창선이, 카페 밖으로 시선을 돌려 허탈한 웃음만을 연이어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드르륵 소리와 함께 호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선의 시선도 자동으로 호원에게로 향했다.

 

 


“ 아무런 정도 없이 들어온 국정원이지만, 그래도 꽤나 좋았었어, 내 직업. 나라를 지키는 게, 우리 가족도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지키는 그 나라가, 내 가족을 죽이던 그 날 이후부터, 나한테 나라는 없어. 대한민국은, 그저 내가 살고 있는 썩어빠진 세상. 그게 다야. ”

“ 이호원. 너… 정말 후회 안 해? 그럴 수 있어!? ”

“ 창선아, 이게 우리의 우정의… 마지막일 거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고 갈게. ”

“ ………. ”

<b>“ 잡을 테면 잡아봐. 나는 우리가 가는 길이 남들과 다르다고 할지언정, 틀리다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으니까. ”</b>

 

 


  그 말을 끝으로 호원은 창선의 목소리에도 답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제 서야 뒤를 돌아 카페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니,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창선이 보였다. 결국엔… 이렇게 되어버렸다. 결국 너와 나는, 이렇게 끝이 나고야 만다.


  처음부터 눈치 채고 나온 자리였다. 전화 통화를 할 때부터 창선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얼마 전 H호텔 테러사건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 하나의 CCTV가 발견되었다는 소리 또한 제 동료에게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창선이 저를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대충 짐작을 하고 나간 자리였다. 예상도 했고, 각오도 충분히 하고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팠다. 마음이.

 

 

 

  몇 걸음 걷다 결국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호원이, 주먹으로 땅을 짚은 채 눈물과 함께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현실이, 너무도 가혹하고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당사자가 아닌 자신도 이렇게 아픈데, 남우현은 얼마나 아팠을까. 또, 김성규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너희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 끔찍한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무슨 죄로 그런 너희를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저의 잘못도 아닌데 괜스레 미안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가든 말든,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미안해. 미안해…. ”

 

 


  그 말과 함께 떨어지는 눈물이, 차갑고 메마른 시멘트 바닥을 촉촉히 적셔갔다.

 

 

 

 


바닥은 미치도록 시리고,


눈물은 죽을 만큼 뜨겁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나 아프다.

 

 

 

 

 

 

 

 

 

 

 

 

* * *

 

 

 

 


  아침 일찍부터 집 안이 소란스럽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바쁘다. 그 전 날 미리 싸두었던 짐들을 한 데 모아놓고, 차례로 하나씩 하나씩 나르는 모습에 왠지 모를 웃음기가 서려있다. 여덟 명이서 처음으로 가는 여행이어서 그런지 모두가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우현과 성규, 성종, 아란이 먼저 짐들을 들고 나갔고, 그들을 뒤따라 동우도 제 짐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호원이, 이내 제 짐을 들려고 하는 성열을 제지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 너는 명수 부축이나 좀 해줘. 전보단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혼자 계단 같은 거 내려오기엔 위험하니까. ”

“ 형 혼자 들기엔 무리인데…. ”

“ 야, 너 나 우습게보냐? 이 정도는 껌이거든? ”

 

 


  제 앞에 놓인 짐을 하나 팔에 끼우고, 커다한 캐리어를 두 개 나 끄는 호원의 모습에서는 정말 힘든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성열이 명수를 부축해 조심조심 밖으로 걸어 나왔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성규와 우현이 서로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 자, 그럼 출발해볼까? ”

 

 


  우현의 목소리에 모두가 약속한 것 마냥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부디 이 여행에서만은 이처럼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길. 모두가, 눈물과 아픔 따위는 잊을 수 있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래본다.

 

 

우리, 행복할 수 있겠지?

 

 


그렇지, 얘들아? 


 

 

 

 

 

 

 

 

 

 

 

 

 

 

 

 


- 34 -

 

 

 

 

 

 

꼬박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충남 서산에 위치한 한적한 바닷가였다. 아란은 이런 추운 날씨에 웬 바다냐며 따졌지만,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에 내심 싫지는 않은 듯,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차에서 내려 각자 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대략 5분 정도를 힘겹게 걷자, 거짓말 같게도 드라마에서만 봐왔던 눈부신 별장이 떡하니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아란과 동우, 성열은 이미 알고 있던 장소라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었지만 몰랐던 이들은 모두 몸을 돌려 놀랍다는 얼굴로 성규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 혹시 이것도, 네 거냐? ”

 

 

 

호원의 설마 하는 식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성규였고, 못 말린다는 듯 작게 미소 지은 우현과, 성규를 괴물 보듯 보는 호원과 성종 형제. 그리고 그저 부럽다는 눈으로 별장을 훑으며 혀를 내두르는 명수까지. 각기 다른 네 사람의 반응에, 성규가 샐쭉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 놀라는 건 그만들 하고,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서 짐부터 풀자. ”

 

 

 

성규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곤 두 손 한 가득 짐을 들고 낑낑대며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별장 안은, 겉에서 봤을 때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 내부는 화려하진 않아도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겨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곳을 둥글게 훑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호원은, 그 위엄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별장에 괜한 질투심을 느껴, 저 녀석 땅을 어디에 사재기 해뒀다거나, 쥐고 있는 주식만 몇 백 개는 되는 거 아니냐며 혼자서 꿍얼꿍얼 거리기 바빴다. 그에 성종이 못 말린다는 듯 제 형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끔 세게 내려치며 조용히 하라 잔소리를 해댔다.

 

 

 

“ 야! 아프잖아!! ”

“ 조용히 좀 해. 창피해서 진짜. ”

“ 와, 이성종. 넌 내가 창피해? 어? ”

“ 그래! 창피해 죽겠다. 됐냐?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피하다 말을 해오는 성종의 대답에 상처를 받은 듯, 금방 풀이 죽어 동우의 옆으로 쪼르르 붙어 선 호원이었다. 동우도 이곳에는 오랜만에 온 지라 반가운 마음에 사로잡혀 한 동안을 구경만 하다가, 제 옆에 다가온 호원의 기척을 느끼고는 생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 여기 되게 좋지? 나도 성규 덕에 이렇게 좋은 곳에 와보지, 성규 아니면 이런 델 언제 와보겠어. ”

 

 

 

별장의 아름다움에 취해 아무런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에 양심이 찔린 호원은 괜스레 헛기침을 해대며 동우의 어깨를 다정스레 감싸 안고,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 형, 걱정 말아요.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여기보다 더 좋은 데 사줄 테니까! ”

 

 

 

엉뚱하고도 귀여운 호원의 발언에 모두들 웃음이 터져버렸고, 심지어 아란은 제 짐까지 툭툭 쳐대며 호원을 비웃기 바빴다. 혼자서만 영문을 모르는 호원은 괜스레 창피해져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더 구경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짐을 들고 2층으로 쿵쿵대며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뒤 이어 이 별장은 2층이 최고라는 성열과 아란의 말에, 신이 난 성종과 명수가 그들과 함께 2층으로 향했고, 동우 또한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의 모습에 못 말린다는 듯 작게 미소 지으며 따라 올라갔다.

 

덕분에 순식간에 둘만 남겨진 우현과 성규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간의 일들은 잊고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에, 자신들이 꼭 그들의 부모라도 된 것 마냥 기쁘고 행복했다.

 

 

 

“ 진작 이렇게 놀러올 걸. 그치? ”

“ 그러게. ”

 

 

 

짧은 대화 사이로 수많은 감정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다정한 눈빛만 주고받을 뿐, 두 사람 모두 별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이것이 저들만의 대화법이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아니까. 그렇기에 불필요한 말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다.

 

 

 

“ 이 별장은 언제 지은 거야? ”

“ 음…. 한 4년 됐나? ”

“ 되게 예쁘다. 딱 성규 네 취향인 것 같아. 가구며, 인테리어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

“ 사실 이 별장. 우리 엄마한테 주는 선물로 지은 거야. 내 취향이랑 엄마 취향이랑 되게 비슷했거든. ”

 

 

 

선반 위에 놓인 액자들과 예쁜 식물들이 심어져 있는 화분들을 하나하나 소중하다는 듯 만지던 성규는, 조금씩 그 옛날의 추억에 젖어 들어갔다.

 

생전 제 엄마의 취향대로 인테리어며 가구며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디자인 하고 골랐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 행복하게 살았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들인 저를 놓지 않고 키워준 엄마를 생각하며 최대한 아름답고, 엄마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게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했다. 그곳에서는 울지 말고 행복하라고. 엄마가 소중하게 키운 아들, 비록 이렇게 흉측하고 못나게 자랐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단 한 치의 거짓도 없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 지을 때만 해도 되게 행복했었는데, 막상 다 짓고 나니 오기가 싫더라. ”

“ ………. ”

“ 생전 엄마가 좋아하던 것들로만 꾸미다 보니까, 이곳에 오면 올수록 엄마가 더 생각이 나는 거야. 그래서 가끔씩만 왔어. 아주 가끔씩만. ”

“ 성규야. ”

“ 너무 자주 오면… 약해질 것 같았거든.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게,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아서. ”

 

 

 

눈물을 흘리지도, 그렇다고 어깨를 떨지도 않는 성규였지만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아 우현은 망설임 없이 그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는 다정히 등을 쓸어 내려주며 아이 다루듯 달래었다.

 

 

 

“ 그래도 자주 오지. 어머니는 성규 네가 보고 싶으셨을 거야. 자신을 위해 이렇게 멋진 곳을 지어준 너에게 고맙기도 하셨을 거고. ”

“ ………. ”

“ 성규야, 그거 하나만 알아둬. 남들이 뭐라 할지언정, 어머니 눈엔 여전히 네가 최고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거. ”

“ ………. ”

“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고. ”

“ 우현아. ”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성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심스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희고 매끈한 이마의 감촉이 제 입술을 타고 생생히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쿵쿵- 세차에 뛰어대는 심장고동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 너의 하늘이 되어주지는 못해도, 언제든 네가 밟고 일어설 수 있는 육지가 되어줄게. 네가 바라보는 그 이상을 내가 실현시켜주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게끔 발돋움할 자리는 마련해 줄게. ”

 

 

 

우현의 심장 뛰는 소리를 따라 제 심장도 박자를 맞추어 뛰기 시작했다. 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죄스럽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우현. 그 이름 석 자를 가진 너란 사람 덕분에 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다고.

 

제 등을 살살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체온에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저 또한 팔을 들어 올려 우현의 허리를 감싸 안던 그 순간,

 

 

 

“ 남우현! 김성규!! 너네는 여기 와서까지 그렇게 솔로 마음에 불을 지피고 싶냐? ”

“ 아란아? ”

“ 어허? 그래도 안 떨어지겠다 이거야? 바다에 빠뜨려버리기 전에 얼른 떨어져라? 커플브레이커의 이름으로 명한다! ”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아란의 모습에 성규는 코웃음을, 우현은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어보일 뿐, 서로를 감싸 안고 있는 팔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에 입술을 삐죽 내민 아란이 성큼성큼 다가가 두 사람의 팔을 잡고 떼어놓으려던 그 순간, 미간을 잔뜩 구긴 성규가 우현의 품에서 나와서는, 저보다 키가 작은 아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겨 밀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좋은 말 할 때 그만… 아윽! ”

 

 

 

얼른 사라지라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던 성규와, 그런 그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아란.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퍽, 하는 둔탁한 소리까지. 성규는 제 뒷통수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고통에 인상을 구겼고, 그 앞에 서있는 아란은 통쾌하다는 듯 꺄르르 웃어대며 박수까지 쳐가며 좋아했다. 하지만 아란은 곧 표정을 무섭게 굳히며 몸을 부르르 떠는 성규의 모습에 흠칫해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고, 이내 사건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 정…아란…. ”

“ 김성규! 지, 진정하고! 으으, 아아악!! ”

 

 

 

잡기 위해 뛰는 자와, 살기 위해 뛰는 자. 그리고, 그 가운데서 두 사람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는 자까지.

 

 

 

“ 저기, 성규야…? ”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온 별장 안을 뛰어다니며 아란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성규의 모습에, 멍한 표정을 짓던 우현은 이내 입 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 야, 야. 나도 좀 끼워주라! ”

 

 

 

도착한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별장의 1층은 온 장식품들이 널브러지고 몇 개가 산산조각이 나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세 사람의 얼굴엔 그 어느 때의 모습보다도 밝고, 즐거운 웃음이 가득 베여났다.

 

 


정말로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 * *

 

 

 

 

 


“ 나가자. ”

“ 안 돼. ”

“ 아아, 이성여얼-. 나 바다 엄청 오랜만이란 말야!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도 못 보게 하겠다고? ”
“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 나가자, 명수야. ”

 

 

 


바다에 나가 놀고 싶다는 명수와, 아직 몸이 아프니 절대로 안 된다는 성열. 두 사람은 한 주제를 놓고 몇 시간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처럼 졸라보기도 하고 무섭게 으름장을 놓아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성열을 이길 수는 없는지, 꿈쩍도 않는 그의 태도에 토라진 명수가 입술을 뿌우 내밀고는 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리곤 아까 성열이 꺼내놓은 이불을 얼굴까지 폭 덮어 썼다.

 

 

 

“ 명수야, 왜 그래. 삐졌어? ”

“ 삐진 거 아닌데. ”

“ 그럼. 화났어? ”

“ 몰라. ”

 

 

 

이럴 때면 정말 영락없는 초등학생의 김명수로 돌아가는 것 같다. 물론 명수의 초등학생 시절 모습을 제가 알리는 없지만, 아마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을 한 성열은, 그저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이불을 덮어 쓰고 있는 명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 미안해. 하지만 오랫동안 차타고 오느라 너도 피곤하고, 나도 피곤하잖아. 시간은 많으니까 바다는 내일 봐도 되는 거고. 화 풀고 그냥 내 말 들으면 안 될까, 명수야? ” 

 

 

 

오목조목 따져가며 예쁘게도 말하는 성열에, 덮고 있는 이불 사이로 눈만 빼꼼 내미는 명수였다. 그리고는 성열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느꼈는지, 그제 서야 누그러진 표정으로 제 옆자리를 툭툭, 치며 누우라 재촉했다. 이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는다면 한 동안 토라져있을 그를 알기에, 성열은 생긋 웃으며 명수의 옆에 꼭 붙어 누웠다. 그러자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위로 끌어 올려 성열의 얼굴까지 폭 씌워버리는 명수였다.

 

 

 

“ 성열아. ”

 

 

 

이불을 뒤집어씀으로 인해 어둡고 공기가 더워졌다. 성열은 제 옆에 바로 보이는 명수의 얼굴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불에서 나가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마저도 명수의 손에 잡혀 할 수 없었다. 나가지 못하게 성열의 손을 결박한 명수가, 사람 숨넘어갈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저보다 한층 밝은 색인 성열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넘겨주었다.

 

 

 

“ 키스하고 싶다. ”

“ …뭐어? ”

“ 할까? 확- 해버려? ”

 

 

 

너무나도 직설적인 명수의 말에, 안 그래도 더운 공간에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버린 성열이 두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명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하는 그의 표정에, 체념한 듯 푸스스 바람 빠진 소리와 함께, 허탈한 웃음을 뱉어버리는 성열이었다. 그와 동시에, 제 이마에 느껴지는 말캉한 입술의 감촉.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코에도 한 번, 입술에도 한 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성열이 명수를 바라보자,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만 쩝쩝 다시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아쉽지만 오늘은 뽀뽀만. 여기서 키스해버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

“ 뭐, 뭐라고? ”

“ 그래도, 한 번만으론 좀 아쉬우니까. ”

“ 김명수, 너 지금 무슨…! ”

 

 

 

그리고 성열의 두 눈이 다시 한 번 커다래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하얗디하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 명수가, 그대로 성열의 올망졸망 귀여운 입술을 집어삼켰다. 겹쳐진 입술을 타고 전해지는 명수의 체온에, 성열이 두 눈을 스르륵 감으며 명수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떨어진 입술. 허공에서 맞닿은 우리의 시선.

 

 

 

“ 성열아. 나 지금 무지무지 행복해. ”

“ …나도. ”

“ 무료했던 내 삶에, 나타나줘서 고마워. 이 말, 꼭 하고 싶었어. ”

 

 

 


사랑해. 명수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그 말 한 마디에, 두 눈에 눈물이 한 가득 고였지만 애써 그 울음을 삼켜낸 성열이 명수의 품에 더욱 더 폭 안긴 채 나지막히 속삭였다.

 

고마워. 그리고, 내가 더 사랑해. 명수야.

 

 

 

 

 

 

 

 

 

 


* * * 
 

 

 

 

 


한 바탕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란을 홀로 내버려둔 채 냉정하게 별장을 나와 두 손을 꼭 마주잡은 채 바닷가를 거니는 우현과 성규였다. 손에 땀이 들어차도록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발을 딛을 때마다 푹푹 꺼지는 모래의 감촉을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보니 슬슬 해가 지려고 하는 것인지,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겹겹이 물들어 가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두 눈을 접으며 싱긋 미소 짓던 두 사람은, 마주친 시선에 자연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 누가 알았겠어.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나고, 팀을 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될 줄. 안 그래? ”

 

 

 

새삼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 마냥 신기하고도 재미있다며 말을 꺼내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너와 내가 지금 이렇게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서로를 보며 행복해하는 이 현실이 꿈만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듯한 설렘을 가진다.

 

너로 인해, 그리고 우리로 인해 이 세상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 나라를 바꾼다. 사실상 이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어. 정말 이 일을 하다 우리 중 소중한 누군가가 크게 다칠 수도, 심지어는 그 사람을 잃게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출 수가 없어. 성규 너도 그렇잖아. ”

“ ………. ”

“ 확실치 않은 미래여도, 일단 걸어왔으니 끝을 봐야한다는 그거 하나 믿고 우리는 여기까지 온 거야. ”

“ …맞아. ”

“ 그러니까 실패해도… ”

 

 

우리, 이 손 절대로 놓지 말자.

 

 

 

맞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실패해도 울지 말자. 웃자. 실패로 인해 좌절하자 말자. 다시 웃는 거야. 우리의 삶은, 아직 많이 남았어.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 얼굴을, 서서히 지는 붉은 해가 밝게 비추었다. 저 바다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우리들의 태양은, 비록 오늘 지지만, 내일 아침이면 다시 이 세상을 밝게 비추러 떠오를 것이다. 우리들이 좌절해도 날은 다시 밝아오고 세상은 똑같이 돌아간다. 그래서 너의 손을 붙잡고, 너의 어깨를 감싸 안고 웃었다. 웃어도 내일이 오고, 울어도 내일이 온다면, 웃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그 편이 훨씬 좋을 테니까.

 


그러니까 성규야. 우리, 웃자.

평생 동안 우리 둘이 이렇게 손 꼭 붙잡고, 웃자.

 

 

눈물이 나도록 행복하게.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살기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엔 너무 젊다.

- Sid Vicious -

 


살기에는 너무 타락했지만, 죽기에 우린 아직, 너무 젊다.

 

그래서 우린 오늘도 살아간다.

 

 

 

 

 

다시 한 번 찾아올 내일을 기다리며.

 

 

 

 

 

 

 

 

 

 

 

 

 

 

 

 

- 35 -

 

 

 

 

 


모든 게 까맣다. 새파랗던 바다도, 머리 위에서 눈이 부시게 빛을 내던 하늘도, 모든 게 까맣게 변해버린 저녁시간이었다. 그 바닷가 한 가운데에는 추운 듯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동우와, 그런 그의 어깨를 꼬옥 감싸 안고 있는 호원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바닷가라 그런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 많이 추울 텐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 마주잡은 손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붙잡고서.

 

서로를 다정하게 껴안은 채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명수와 성열. 커플지옥 솔로천국이라며 다정하게 마주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던 아란과 성종. 그리고, 잠깐 산책을 다녀온다는 말에 바비큐 파티를 할 것이니 빨리 들어오라며 음식 준비를 하던 우현과 성규까지. 모두가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정말 여행을 온 그 순간만큼, 우리는 너무나도 평범한 가족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은 새까맣게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런 평범한 사람들.

 


그저… 행복 하고 싶은 인간.

 

 

 

 


“ 되게 좋다…. 바다. 그리고 밤. ”

“ 춥지 않아요? ”

“ 추운데,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그냥 여기서 조금만 더… 이 바닷가를 느끼고 싶어.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거니까…. ”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중얼거리는 말을 하는 동우의 모습에, 호원은 그저 쓰디 쓴 미소만 머금을 뿐,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동우 또한 그런 호원을 보채지 않고 새까맣게 일고 있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밝을 때 보는 바다와 이렇게 어두컴컴한 시간 때 보는 바다는 확실히 다른 매력이 있다. 모든 것이 잘 보이는 때의 바다가 아름다움의 절정이라면, 지금 보는 이 어두운 바닷가는, 모든 진심을 토해내고 싶게끔 만든 달까. 꼭 혼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새까매서, 이 바다는 그 어떠한 말을 해도 잠자코 들어줄 것 같았다.

 

 

 


“ 호원아, 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

“ ………. ”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제 아픔을 잘 꺼내지도 않는 호원이, 동우의 물음에 조심스레 말문을 연 것은. 그것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물음이어서였는지, 그저… 제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 제가 기억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은 끔찍 그 자체에요. 아빠는 지독한 술주정뱅이에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그런 아빠 때문에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는, 우울증 환자였죠. ”

 

 

 


호원의 말을 들은 동우는 놀라움으로 인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현이처럼 그저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고, 그런 줄만 알았던 너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정말 밝고 바르게 자란 호원이어서 방금 전해들은 이야기들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 그래서였나. 저도 굉장히 웃긴 아이였어요. 공부에 취미는 그다지 없었는데, 술 취한 아빠와 우는 엄마가 보기 싫어서 교실에 딱 붙어 앉아 늦은 시간까지 야자를 했죠. 성종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저 없이 집에 들어가면 아빠한테 맞을 게 뻔하니까, 제가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나 하라고 떠밀듯 공부를 시켰죠.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건 폭력을 일삼는 아빠와, 우리에겐 전혀 관심도 없는 우는 엄마였으니까. 우리는 저렇게 되지 말자고. 죽어도 저렇게 살지는 말자고. 그렇게 우리 둘이서 서로를 의지한 채 살았어요. ”

“ …호원아. ”

 

 

 


저를 부르는 동우의 목소리에도, 호원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저 정면에만 시선을 둔 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는 울지 않았다. 눈에 눈물도 없었고,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동우는 알았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제 손을 꽈악 잡은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이 손을 놓아버리기라도 한다면, 호원은 바로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이다. 그래서 놓지 않고 더 꽉 잡아주었다. 그 떨림이 멈출 수 있게. 너조차도 네가 운다는 걸 모를 수 있게.

 

 

 


“ 그러던 어느 날, 아마 제가 열일곱 살 때였을 거예요. 그 끔찍한 집에 있기 싫어서, 방학이랍시고 성종이, 우현이와 함께 기차여행을 떠났어요. 엄청 설렜었죠. 그 끔찍한 집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겐 크나 큰 기쁨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신나게 떠들며 가고 있는데, 제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머니는 손목을 긋고 자살을 했고, 아빠는 그 길로 또 술을 진탕 마신 채 차도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으셨다고. ”

“ 그만하자. 응? 호원아, 이제 그만 해도 돼. ”

“ 아직 여행 가지도 않았는데.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그런 전화가, 온 거예요. 정말 타이밍도 거지같았던 거죠. ”

“ 호원아. ”

“ 근데 형. 되게 웃긴 건 뭔 줄 알아요? ”

“ ………. “

“ 엄청 미웠던 사람들인데,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사람들인데. 새하얀 천으로 뒤덮인 그 사람들을 보자마자, 덜컥 겁이 나는 거예요. 아- 이제 나는 정말… 고아…구나, 하고요. ”

 

 

 


정작 아픈 이야기를 하는 쪽은 호원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우 쪽이었다. 동우는 호원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꼬옥 붙잡고는 연신 그만해. 아프잖아. 그만해, 제발. 이라며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하지만 호원은 이야기를 멈추지도, 그렇다고 동우처럼 괴로운 표정으로 울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런 호원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 그때부터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딴 사람들도 부모라고, 제가 의지를 하고 있긴 있었나 봐요. 그렇게 죽어버리니까, 너무 무서운 거 있죠? 아 이젠 내가 가장인가. 이젠 모든 걸 내 스스로 하고 성종이 뒷바라지까지 모두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안 그래도 두려웠던 마음이 더 커졌죠.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우리 성종이는 아직 열다섯의 어린 중학생이었는데, 그 애를 그 끔찍한 집에 홀로 두고 들어가지 않았어요.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애들 돈이나 뺏고, 그 돈으로 담배 사고 술사고. 정말 미친놈처럼 방황했죠. ”

“ ………. ”

“ 그런 절 정신 차리게 해준 게, 그 자식이었어요. 남우현. 그 병신 같은 놈. ”

 

 

 


우현의 이름을 꺼낸 호원은 그 후로 한참 동안이나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하려고는 하는데, 그것이 울음과 뒤섞여 나올까하는 마음에, 차마 함부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파,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속눈썹을 촉촉이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이 너무도 아팠다. 그 눈물이 내고 가는 길마다 한 결 같이 따끔따끔한 아픔이 일었다.

 

 

 


“ 우현이와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어요. 언제나 밝고, 운동이며 공부며 못하는 것이 없었던 남우현 주위에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죠. 생각해보면 그런 애가 저와 친구한 게 참 신기하긴 해요. 그냥 입학식 때 눈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 길로 저한테 친한 척을 해왔어요. 눈도 작은 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늘 헤실헤실 웃었어요. 내 친구 이호원. 하면서요. ”

“ ………. ”

“ 저는 평소에도 남우현을 부러워했어요. 제겐 동경의 대상이라고나 할까요.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성격도 좋았죠. 하지만 가장 부러웠던 건… 역시나 가족이었어요. 저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 할, 그런 따뜻한 가족. 가끔씩 성종이와 제가 가면 정말 아들 대해주시듯 따뜻한 밥을 주셨어요. 우리 엄마한테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런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 담긴 밥이요. 남우현과 그 가족들은 제게 진짜 가족보다도 더한 사랑을 준, 고맙고… 또 고마운 사람들이었어요. ”

“ 호…원아. ”

“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소위 양아치들이라 불리우는 애들과 골목에서 중학생 애들 돈을 뺏고 있는데, 다짜고짜 남우현이 나타나서는 저를 무지막지하게 패더라고요. 정말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제 친구들 두 명이 달려드는데도 꿈쩍도 안 하는 거 있죠? 결국, 돈을 뺏기던 아이들은 그 길로 도망쳐버리고 저와 함께 어울려 다니던 놈들 또한 재수 없다며 바닥에 침을 뱉고는 골목을 빠져나갔죠. 그리고, 그 아이들이 사라지자마자, 남우현이 뭘 했는지 알아요? 제 위에 올라타서 주먹질만 해대던 그 새끼가,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

 

 

 


호원의 물음에 고개만 도리도리. 그에 옅게 미소 지은 호원은, 이내 깊은 한숨을 한 번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 울었어요. 정말 서럽게 울어버렸어요. 어린 아이가 우는 것처럼 서럽게 엉엉. 그리고, 저도 같이 울었어요. 말도 없이 우는 그 새끼를 앞에 두고, 저도 같이 울어버렸어요.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는데 그냥… 속에서부터 뭔가가 울컥울컥 치밀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나 울던 놈이 한 마디 했어요. 성종이가 집에서 나오질 않는다고. 네가 그렇게 집을 나가버린 이후로, 그 어린 애가 그리도 싫어하던 집에서 제 형만 기다린다고. 자기네 집에 가자고 이끌어 봐도 싫다고 고개만 도리도리 젓는다고. 우리 형, 올 거라고. 기다려야 된다고. ”

“ 아흑…. ”

 

 

 


흐느낌을 참지 못한 동우가, 결국엔 서러움 섞인 신음소리와 함께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런 그를 호원이 한 품에 끌어안고 토닥토닥, 아이 달래듯 등을 다독였다. 위로를 받아야할 이는 호원인데, 그는 오히려 저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끔히 나았다는 듯이.

 

 

 


“ 그 때 이후로 정신을 차려서 더 이상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집에 들어가지 않는 짓도 하지 않았어요. 학교를 마치면 바로 집에 와서 성종이와 함께 밥을 먹고, TV를 보며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 별 거 아닌 걸로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지냈죠. 그리고 또 가끔씩은 우현이네 부모님이 저희 집에 와서 음식을 해주신다던 가, 밑반찬이나 김치를 하셔도 꼭 저희 몫까지 두 배로 만들어서 챙겨주셨어요. 그리고 자주 집에 초대해서 진수성찬을 해주시기도 하고. 말 그대로 진짜 가족이었어요. 이런 게 바로 가족이다, 하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가족. ”

“ ………. ”

“ 형. 그래서 저는 그 새끼 절대 놓지 못해요. 내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죽고 남우현 쟤 혼자만 남았잖아요. 그것도 충분히 무섭고 아팠는데, 쟤가 자살시도를 하던 그 날, 저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남우현마저 떠나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았어요. 간신히 이겨내고 있던 이 현실의 무거움이, 다시 나를 짓누를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자살시도를 하고 깨어난 그 녀석을 안고, 엉엉 울어버렸죠. 그 옛날, 열일곱 때의 저를 안고 서럽게 울던 남우현처럼. ”

 

 

 

 

호원의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났지만, 동우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여전히 흘려 내보내며 자신을 안고 있는 호원의 동그란 머리를 다정스레 슥슥, 만져주었다. 아팠지. 힘들었지. 많이… 외로웠지? 괜찮아. 이젠 다 괜찮아.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누군가가 네 곁에서 떠나가는 그런 일, 다시는 없어.

 

 

 


“ 미안해요. 나는,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다 할 수 있어요. 그녀석이 한 번 살려준 목숨이니까. 난 그 목숨, 남우현을 위해 쓸 생각이에요. 그래서 형한테… 많이 미안해요. ”

“ 괜찮아. 이해해. ”

“ 그래도 나 알죠? 쉽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애가 아니라는 거. ”

“ 응. 알아. 그래서 걱정 안 해. 나 두고 어디 가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아서, 걱정 안 돼. ”

“ 고마워요. 고마워…. 동우 형. ”

 

 

 


이호원은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사람은 아픔을 겪을수록 성장하고 단단해진다고, 아마도 이 아이 또한 그런 끔찍한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한 편으론 안타까우면서도, 대견했다.

 

나는 여전히 너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으며 그 듬직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들려, 호원아. 네 심장이 뛰고 있는 소리가, 들려. 너는 아직 살아있어. 그리고, 네 곁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곱 명이나 있어. 그 아이들 또한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어. 이 일에 목숨을 건 건 너만이 아니야. 모두가, 서로를 위해, 죽을 각오를 했어. 그러니 너무 혼자 그 짐을 짊어지려고는 하지 마. 그럼 내가 너무 아프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걸 다 안고 가려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없어. 그러니까 함께 나누자. 너의 기쁨과 슬픔. 나에게도 조금은 나눠주라.

 

 

 


“ 이만 들어갈까요? ”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나 추워. 안아줘. ”

“ 오랜만에 우리 둘이라고 우리 형 좋아죽네, 죽어. 좋아요, 그럼. 딱 오 분만 있어요. 더 있다가는 감기 걸려요. ”

 

 

 


다시 평소의 장난기 어린 이호원의 모습으로 돌아온 너의 어깨에 대고 눈물을 흘렸다. 너 또한 축축히 젖어가는 어깨의 감촉을 느꼈겠지만, 너는 끝까지 나의 눈물을 모른 체 했다. 그래서 고마워. 생각 없어 보여도 너는 그 누구보다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이고, 관심 없는 척, 대충 하는 척 해도 너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더 네가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티는 내지 않을 생각이야.

 

 

 


“ 너를, 믿어. ”

“ 고마워요. ”

 


네가 웃어서, 나도 웃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그렇게 웃었다.

 


기다리다 못해 데리러 온 성열이가 올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동안이나.

 

 

 

 

 

 

 

 

 

* * *

 

 

 

 

 

 

 


“ 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

 

 

 


배가 많이 고팠는지 손으로 배를 살살 문지르며 투덜대는 성종의 모습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준비는 다 마쳤고, 고기도 거의 다 구워졌는데 호원과 동우가 오지 않는 바람에 파티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하나 둘 씩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는 느낌이었다. 호원과 동우도 바닷가에서 나누었던 대화는 싹 다 지웠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서로의 입에 사이좋게 고기 한 점씩을 넣어주었다.

 

 

 


“ 아으, 어떡해. 너무 맛있어. ”

 

 

 


몸까지 부르르 떨어가며 고기의 맛에 심취한 아란은, 잔에 한 가득 담겨있는 맥주를 들어 한 모금 들이켰고, 이내 캬하- 하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성규만이 인상을 찡그릴 뿐, 모두가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 하고 소리 없이 묻는 질문에, 모두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즐거워. 행복해, 라고.

 

그런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마음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와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이런 기쁘고 행복한 날 눈물을 보일 수는 없어서 꾹 눌러 참은 우현이, 애써 미소 지은 채 입을 열었다.

 

 

 


“ 앞으로는 더 힘든 일들이 많이 생길 거야. 지금 흘린 눈물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될 수도 있어. 안 무서워?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
“ 후회할 거였음, 시작하지도 않았어. ”

 

 

 


우현의 말에 대답한 이는 호원이었다. 그 또한 우현과 마찬가지로 입가엔 잔잔한 미소를 띤 상태였다. 그 대답에 우현은 한참 동안이나 호원과 눈을 맞추더니, 이내 싱긋 웃어 보이며 모든 이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추었다. 바라본 눈동자에서 두려움이라곤 읽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다시 한 번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많이 아파, 얘들아. 너희들이 상상도 하지 못 할 그럼 아픔들이 기다리고 있어.

 

알아.

 

그래도 우리, 끝까지 가보자.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씩씩하게 해나가자. 그러면 언젠가, 정말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온전한 행복이 비쳐지지 않을까? 신이 정말로 잔인한 이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도 언젠가, 아무런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을 주지 않을까? 나는 믿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련을 잘 극복해내고 웃을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라고.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을 거라고.

 

 

 


“ 자자, 건배하자, 건배! ”

 

 

 


분위기를 띄우려는 아란의 말에, 여덟 명 모두가 잔을 든 채 허공으로 높이 솟아 올렸다. 쭉 뻗어 올려 진 술잔 안에서 액체들이 출렁이며 제각각 춤을 추었다. 달빛에 반사되어 더더욱 반짝이는 노란 빛의 액체가 서서히 잠잠해지고 나서야 스르륵 눈을 감아 보인 우현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어떤 누구도 그런 우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새까맣지만 달과 별로 깊게 수놓아진 빛이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저 웃었다. 흘러내리며 반짝이는, 눈물과 함께.

 

 

 

 

 

 

 

 

 

 

 

 

* * *

 

 

 

 

 

 

자정이 넘은 시각. 어두운 하늘에 떠있는 보름달만으로는 골목길을 환하게 비추기 힘이 들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가로등도 딱 하나밖에 없는 좁고,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웬 남성 한 명이 술에 취한 듯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을 한 채 골목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곧 힘에 부친 듯, 결국 골목길에 세워진 단 하나의 가로등에 스르륵 등을 기대어 주저앉아버린 남성은, 고개를 위로 쳐든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야 이 개새끼야! 알고도 남우현을 숨겼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
  ‘ 걔가 어떤 사람인데. 남우현이 어떤 사람인데? ’

        호원아. 이호원.

 


  ‘ 걔가 뭘 잘못했어. 시발, 그깟 임무 실패한 거? 그게 한 순간에 사람을 병신 만들 만큼, 대단한 일이었어? 그게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야!? ’
  ‘ 야!! ’
  ‘ 아하- 그 잘난 국정원? 내가 거길 왜 들어갔는데. 정의실현? 그딴 거 개나 주라고 해. 난 거기 남우현 따라간 거였거든. 부모님 잃고 방황하던 내게 제일 큰 힘이 되어준 게 남우현이고! 내 가족 되어준 게…! 그 사람들…이었거든…? ’

        야 이 개새끼야. 병신 같은 놈아.

 


  ‘ 그냥 다치는 걸로 끝나지 않아! 죽는다고, 모두!! ’
  ‘ 상관없어. 우리가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

        왜 그랬어. 그러지 말지. 그런 거… 하지 말지.

 


  ‘ 이호원. 너… 정말 후회 안 해? 그럴 수 있어!? ’
  ‘ 창선아, 이게 우리의… 마지막일 거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고 갈게. ’
  ‘ ………. ’
‘   잡을 테면 잡아봐. 나는 우리가 가는 길이 남들과 다르다고 할지언정, 틀리다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으니까. ’

 

 

 


“ 하윽…. 호,원아…. 미안해. 내가, 내가 다 미안해…. ”

 

 

 

눈 안에 한 가득 고여 있던 투명한 눈물이, 눈꺼풀을 내려 감음으로써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 한 줄기는 시작점이 되어 끝도 없이 흘러내렸고, 창선은 제 가슴을 쥐어 잡은 채 발버둥을 쳤다. 아픈 신음까지 흘려가며.

 

 

' 반갑다. 이호원이야. 신입이라 많이 서툴겠지만, 열심히 할 테니 너무 까대지는 말고. ’

 

 

스물다섯의 이호원과 이창선. 그리고 남우현. 행복했던 나날들을 보내던 중, 벌어져야만 했던 1년 전 끔찍한 사건. 그로 인해 남우현은 죽었고, 너는 내 곁에 남았지만 매일 매일을 힘겹게 버텨야만 했다. 그런 너를 보는 것도 참 많이 고통스러웠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건….

 

 

 


“ 개새끼…. ”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를 그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이후로 창선의 입에서는 끝도 없이 욕이 흘러나왔다. 눈물과 함께 베여난 서러움 섞인 목소리가, 좁은 골목길에 웅웅 맴돌았다.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창선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그 가로등 아래에 앉아서, 울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그렇게나 한참을, 울어댔다.

 

 

 

 

 

 

 

 

 

 

 

 

 

 

---

 

 

허허... 진짜 드릴 말씀이 없네...

열심히 연재하겠다고 해놓고 어디로 내뺐을까요 저는 ㅠㅠ

이렇게 또 한꺼번에 슝 ㅋㅋㅋㅋㅋㅋ

36편부터 현재 연재된 45편까지는 내일이나 주말쯤에 올리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계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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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흐어유ㅠㅠㅠㅠㅠ기다린보람이 있네요ㅠㅠㅠㅠㅠㅠ내일이나 주말에 봐여ㅠㅠㅠㅠㅠ
9년 전
Morning
넹넹~ 조만간 다시 뵈요~~
9년 전
독자2
헐 시티헌터지금 나온거 맞아요?!!!!! 헐 ㅠㅠㅠㅠㅠ 잘 보고 가요ㅠㅠㅠㅠㅠ 주말 기다리겠습니다ㅠㅠㅠㅠㅠ
9년 전
Morning
ㅋㅋㅋ 넵.. 제가 너무 늦게 왔죠? 죄송합니다.. 조만간 다시 뵈요~! 아마도.. 내일? ㅎㅎ
9년 전
독자3
세상에ㅜㅠㅠㅜㅜ진짜기다린보람이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구독료보다 훨씬 퀄ㄹ리티도 높고 분량도 짱짱.....와진짜ㅜㅜㅜ사랑합니다ㅜㅜ
9년 전
Morning
우왕 이런 칭찬 사랑합니다♥ 오늘 봐여 우리~~
9년 전
독자4
어..잠시만요 나 너무 좋아서 할 말을 다 까먹었어요ㅋㅋㅋㅋ 개인적으로 분량이 많은 글을 좋아해서ㅠㅠㅠㅠㅠ 늦게라도 계속 와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글도 기다릴게요:)
9년 전
Morning
분량 많은 ㅠㅠ 한꺼번에 올려서 그럴 거에요 ㅎㅎ 분량 적은 날도 있고 많은 날도 있을 거에요~! 크크
9년 전
독자5
와...시티헌터..... 이거 1,2부 어제다읽고 오늘 3부 올리신거다읽고.... 아진짜.... 보고싶엇어여ㅠㅠㅠㅠ 사랑해요 작가님 ㅠㅠㅠㅠ
9년 전
Morning
저도 사랑합니다~!! T^T♥
9년 전
독자6
설화에요!!!!!!어윽 일단 작가님 찬양부터...ㅠㅠㅠ♥♥♥♥ 아침부터 지금까지 봤는데 눙물이.....역시 금손!!!!!이제 다음화가 기대되서 다른일을 못하겠어요ㅠㅠㅠㅠㅠㅠ 작가님은 사랑입니다♥♥♥ 전 이제 또 다음화로...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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