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필수!
오늘은 오랜만에 태형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처음 만났던 중학교 때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태형이와 나는 지겹도록 붙어다녔다. 남들이 보면 다정한 연인사이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둘이 진짜 비밀연애라도 하는게 아니냐는 주변 사람들의 짓궃은 농담에도 우리는 그때마다 웃음으로 가볍게 넘기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가벼운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그런 농담이 아니게 되었지만. 한가지 다행인 것은, 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지금, 말로만 듣던 썸을 타는 중이었다. 그것도 엄청 간질간질하게. 한창 열심히 그렇게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우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바쁜 나날을 보내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으므로, 최근에는 연락이 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과제다 뭐다 서로 바빠서 연락 한 번 못하고 지내고 있었는데, 어제 갑작스럽게 김태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영화표가 생겼는데 같이 보러가자고. 다소 뜬금없이 온 연락에 황당해 하기도 잠시, 어느새 알겠다고 답장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두근두근, 가슴 한 켠이 기분 좋게 떨려왔다. 가만히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옷장에 다가가 옷장 문을 열어보았다. 으음..
'..내일 뭐 입을까..'
태형이를 만나기 1시간 전, 미리 약속 장소에 나와 있던 나는 다가오는 친오빠의 생일을 대비한 선물을 사기 위해 근처에 있던 화장품 가게로 향했다. 오빠 향수가 다 떨어졌다고 그랬던가? 생각보다 많은 향수의 가짓수에, 하나 하나 신중히 내 손에 뿌려보며 고르고 있던 중이었다. 오, 이 향은 김태형한테 잘 어울리겠다. 나중에 하나 사줘야지. 문득 떠오르는 김태형의 얼굴에, 얘가 좋아하는 향기가 뭐였더라?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 핸드폰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발신자는 바로 김태형이었다.
(브금에서 여보세요?가 나올때까지 브금을 들으며.. 기다려 주세요ㅠㅠ 아니면 브금을 1분 55초에 놓아 주세요! 곧 나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어디야?"
"..나 방금 일어났어."
"뭐? 아.. 방금 일어났다고?"
"미안. 깜빡했다 태형아. 어쩌지? 너 어딘데?"
"아이, 괜찮아. 어.. 나-, 다 왔지. 어.."
"진짜? 미안해서 어떡해.."
"괜찮아. 어-"
어디냐고 물어보는 김태형의 물음에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일어났다고 애써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하니, 한껏 당황하는 김태형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넘어 내 귀에 들려왔다. 바보, 가게에서 노래 나오고 있는데 들리지도 않나보네. 애써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김태형의 목소리엔 감출 수 없는 서운함이 느껴졌다. 음.. 이쯤에서 그만해야겠지?
"태형아."
"..응?"
"지금 어디야?"
"나.. 어, 시내 사거리 앞이지. 우리 만나기로 했던 곳."
"아아, 조금만 기다려!"
"어? 너 방금 일어났,"
뚝-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힘들게 고른 향수를 손에 들고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카운터 앞에 길게 늘어져 있는 줄을 보곤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오빠, 미안!
화장품 가게에서 벗어나 사거리 쪽을 향해 걸으니, 신호등 건너편 저 멀리 김태형의 형체가 보였다. 김태형은 제멋대로 끊어진 전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김태형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김태형!"
"..너 뭐야. 전화도 맘대로 끊어버리고, 늦잠 잔거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태형이 보러 가는데 내가 어떻게 늦잠을 자겠어."
장난스러운 내 대답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보인 김태형이 시계를 보았다. 너 진짜 늦잠 잔거였으면, 나 많이 서운할 뻔 했어. 영화 시작하기 30분 전이니까, 지금 가면 딱 맞겠다. 말을 마친 김태형이 익숙하게 내 옆에 서서 나와 발걸음을 맞췄다. 그래, 팝콘은 특별히 내가 쏜다! 오 진짜? 여주가 사주는 팝콘도 다 먹어보고 , 이거 참 영광이네. 이런 실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며 언제나처럼 김태형과 같이 걷고있는데, 갑자기 김태형이 내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평소 나와 김태형이 아무 스스럼 없는 사이였다지만, 워낙 이런 걸 낯간지러워 하는 우리였기에, 김태형과 나 사이에는 스킨쉽 같은 것이 적은 편이었다. 따라서 방금 김태형의 행동은, 나를 충분히 당황시키고도 남을 행동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깨동무를 한 김태형은 몸에 힘을 쭉- 빼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키가 작은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또한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나에게 남자 체중을 견뎌내는 것은 무리였다. 이러다간 곧 길 한복판에서 넘어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곧바로 김태형을 급하게 밀어내려 했다.
"야 김태형. 무겁다?"
"....."
"ㅇ,왜이래 갑자기, 무겁다고!"
잔뜩 빨개진 얼굴로 김태형을 올려다 보며 작게 소리치는 나를, 무언가 불만에 가득찬 얼굴로 내려다 보는 김태형이었다. 눈꼬리가 축 처져있는 것이, 김태형 얼굴에 강아지 귀가 달렸더라면 같이 축 쳐져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곧 김태형이 내 귓가 옆으로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내 몸을 정지시킨건 김태형의 목소리였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야.."
"어? 뭐가?"
"....."
뜬금 없는 김태형의 질문에 돌아오는 나의 대답은 물음표를 잔뜩 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인지 고개를 들어올린 김태형이 내 앞에 섰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춘 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새삼 다시 보는 김태형의 얼굴은 여전히 설렜다. 조금씩 볼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눈을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꼼짝없이 김태형의 눈맞춤을 받아내고 있으니, 그 자세 그 모습 그대로 김태형이 말했다.
"너한테서, 남자냄새 나."
"....."
"..짜증나게."
뭐가 그렇게 불만인 것인지, 김태형의 눈썹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이거, 아까 향수 보러 갔다 와서 그런건데..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김태형의 행동에, 웃음이 나면서도 해명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와락-
김태형이 나를 껴안았다. 심장이 쿵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멍한 느낌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저 안겨있기만 했다. 내 심장소리인지, 김태형의 심장소리인지 모를 고동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렇게 계속 안겨 있으니, 우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우리를 한 번씩 훑고 지나갔다. 뒤늦게 사태파악이 되기 시작한 나와는 다르게, 김태형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나를 안고 있기만 했다.
"ㅇ,야."
"....."
"왜, 그래.."
말을 하는 나의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말에도 꿋꿋하게 그대로 나를 안고 있는 김태형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어깨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올리려는데, 그것을 저지한 김태형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진심을 담은 듯한, 그런 떨림을 가지고 있는 목소리였다.
"..내 냄새가 더 좋아."
"....."
"그러니까 그 남자 말고,"
"....."
"..나랑 사귀자."
곧 뱉어지는 태형이의 고백에, 나는 그저 바보같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귀엽다니까.
. . . . 훗날 내가 그날 다른 남자를 만난 것이 아닌, 단순히 친오빠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남자 향수를 만지작 거렸다는 걸 김태형이 알게 된 것은, 그래서 김태형의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때는, 우리가 사귄지 2년이 넘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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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인포 초록글인데! 제가 거기다가 망상을 더해서 한번 태형이 버전으로 바꾸어 봤어요. 어쩐지 쓰다보니까 계속 태형이를 많이 쓰는데, 태형이만 좋아하고 이런거 절대 아니예요ㅜㅜ 재밌게 읽으셨으면 댓글 하나씩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