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ush-잠 못 드는 밤
백현맘 씀
원치 않는 영화를 오세훈과 함께 관람했다. 무작정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걔는 우리가 사귀었을 때랑 달라진 기색 하나 보이질 않았다. 내가 왜 이제 와서 이러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봐도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버릇처럼 “네가 이렇게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라 말하면서.
순식간에 주말이 지나갔다. 월요일이나 금요일 중 하루를 공강으로 만들자고 결심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수강 신청에 실패하고 말아 아침부터 강의가 있었다. 선배는 내게 월요일 몇 시에 나갈 거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비밀이라고 일관되게 대답했다. 선배까지 괜히 귀찮게 아침 일찍 일어나도록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럴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어떻게......”
“내가 바보냐? 네가 말을 안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겠지.”
“아......”
“그 이유가 월요일 아침 수업이라면 나도 월요일엔 아침 수업 있어.”
나를 간파하고 있는 선배 덕분에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졌다. 내가 가만히 있자 선배는 “할 말 없지?” 하더니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선배의 뒤를 쫓아갔다. 그냥 처음부터 말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라는 생각하다 손에만 쥐고 있던 핸드폰의 홀드를 풀었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켜지는 핸드폰을 기다리며 선배의 뒤를 쫓아 옆에 섰다. “좀 천천히 걸어요.” 내 말에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속도를 늦췄다. 켜진 핸드폰에는 문자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나 세훈이. 내 번호 저장해. 핸드폰 잃어버려서 바꾸는 김에 번호도 바꿨어.-
아침부터 별 꼴을 다 본다.
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채로 핸드폰을 다시 눌러 닫았다. 정말 괴상하게 변한 오세훈의 태도에 한참을 고민했다. 이게 바로 남 주긴 아깝고 나 가지기엔 별로라는 심보인가? 싶기도 했다. 주위에 그 속사정을 털어 놓을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고, 변백현 선배에게 말하기에는 어쩐지 좀 그랬다.
한 달 전의 선배였다면 어쩜 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묘하게 주위 상황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똑같은데. 아니, 나도 많이 달라졌나? 오세훈에게 미련을 정말 버린 것이 맞냐고 물으면 강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오세훈에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물으면...
“버스 왔다. 타. 김여주.”
아직은 잘 모르겠다.
버스를 타자 먼저 탄 선배가 나를 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이 그 앞에 섰다. “가방 주세요.” 그 말에 매고 있던 큰 크로스백을 내게 건넨다. 그걸 한 품 가득 끌어안고 있자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킥킥 웃는다. 괜히 발끈해서,
“뭐요.”
“아니. 그냥.”
“왜 웃었냐구요.”
“아 진짜 그런 게 있어, 인마.”
“웃긴다. 내 얼굴이 그렇게 웃겨요?”
“그런 거 아니다, 인마.”
그러면서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모른다, 한 손으로는 옆에 있는 주황색 봉을 단단히 잡아채고, 남은 한 손은 내 머리카락에서 내려갈 줄을 모른다. 변백현의 고질적인 취미, 내 머리카락 만지기. 부들부들해서 양털 같단다. 그 말에 초엔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지금은 그냥 포기 수준이다.
“애완 동물로 양 키우는 게 소원인가.”
“애완 아니고 반려.”
“아, 네엥. 반려 동물로 양 키우는 게 소원인가.”
끼익, 버스가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정류장에 정차한다. 노쇠한 할머니 한 분이 짐을 이고 버스 안으로 올라 타셨다. 나는 선배의 크로스백을 들고 일어나 할머니께 말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할머니께서는 연신 고맙다 하시며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버스 문이 닫히고, 움직이는 탓에 양 손으로 가방 두 개를 가지고 있는 내가 휘청거렸다. 변백현이 내 허리에 손을 단단하게 감았다. 덜컹거리는 구간을 지날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바짝 옆에 붙어서. 고개를 돌리면 변백현의 턱선이 위치할 자리에.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 못하다.”
“여주야, 나 진짜 너밖에 없는 거 알지.”
허리를 감았던 손 때문인지 뭔지 나와 선배는 내려서 아무 말 않고 걸었다. 선배는 내게 짧게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고 그 이후에도 나는 붕 뜬 것 같은 기분으로 수업을 들었다. 들어도 들은 것 같지 않고... 교수님은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한건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그랬다.
오랜만에 수업을 마치고 은수 언니와 경수 선배, 그리고 변백현과 나까지 모두 함께 모였다. 박찬열 선배는 과방에서 자고 있었다. 은수 언니는 보자마자 나를 껴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 주말, 내가 오세훈과 영화를 보러 갔던 날의 일을 감사하려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일어나, 새끼야.”
도경수 선배가 소파에 늘어진 박찬열 선배의 등을 소리나게 때렸다. 박찬열 선배가 벌떡 일어나 성질을 냈다. “아 나 어제 잠 제대로 못 잤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새끼...” 게슴츠레 눈을 뜨고 도경수 선배와 싸우는 박찬열 선배 덕분에 와하하 웃었다.
과방 문이 열리더니 엄나은이 얼굴을 비췄다. 은수 언니는 이유를 막론하고 나은을 싫어했다. 과의 모든 사람들은 백현과 나은을 이어주지 못해 아주 안달을 했지만 은수 언니는 좋아하지도 않는 변백현에게 그건 실례라고 그랬다. 도경수 선배와 박찬열 선배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오빠...”
나은이 선배의 앞으로 다가와 책에 고개를 박고 있는 백현을 불렀다. 선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한 선배에 나은이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토요일에 정말 고마웠어요. 나와주실 줄 몰랐는데, 오빠 아니면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갔을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앞뒤 정황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선배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선배가 한 말의 끝이었다. 그럼에도 나은은 선배의 앞에서 생글생글 웃음 지었다.
“그땐 그렇게 다정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까칠해요 오빠.”
그렇게 선배에게 칭얼대며 나를 올곧게 보는 눈빛은 누가 봐도 확연한 ‘경계’였다. 이주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바뀐 성난 눈빛이 매서웠다. 본인과 선배 사이의 마치 큰 비밀이라도 둔 것 마냥 어린 아이 티를 내는 나은의 모습에 그저 눈을 내리까는 것 말고는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분하지 않았다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줏대 없는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내가 까칠하고 말고를 네가 신경 써?”
“...... .”
“네가 그때 취한 척을 했거나, 어쨌거나 내가 한 말을 또 까먹은 것 같은데ㅡ”
“오빠, 그냥 나는ㅡ”
“그런 일로 다시는 나 부르지 마라, 인마.”
나은은 얼굴이 벌개져서 쾅쾅 소리를 내며 과방 바닥을 밟아 나갔다. 은수 언니가 옆에서 키득거렸다. “나대다가 제대로 까인 거지, 모두 보는 눈 앞에서.”
심지어 박찬열 선배는 그 쾅쾅대는 소리에 자다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지진 났어?!” 하는 꼴이 볼만 했다. 과방을 나서며 그렁그렁 두 눈에 맺혔을 눈물, 부들부들 떨렸을 다리. 잔뜩 성난 기분을 겪었겠지.
“밥 먹으러 가자.”
스윽 몸을 일으키는 선배를 따라 일어나며 손끝까지 저릿한 느낌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하, 실없이 웃자 은수 언니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봤다. 나 진짜 나쁜 년 된 것 같다.
“만족했어?”
“에?”
“내 대답에 만족했냐고.”
“아니 무슨,”
“질투했잖아.”
어느새 내 옆으로 와 짓궂은 물음을 하며 장난치는 선배 때문에 아까의 나은과는 다른 이유로 홧홧해진 얼굴을 바람에 식혔다. “아님 말고, 인마.” 치고 빠지는 변백현 때문에 괜한 생각마저 든다. 어슬렁대며 뒤를 따라 걸어오던 박찬열 선배가 나와 선배 사이로 무작정 끼어들었다.
“그림 좋다아?”
“악!”
“좋으면 구경만 하고 꺼져, 새끼야.”
은수 언니는 저만치 떨어져 남자친구와 전화 중이다. 도경수 선배는 뒤를 돌아 누구보다 기쁘게 웃었다. “오늘 정은수가 사는 밥이니까 존나게 비싼 걸로 먹자.” 그 말에 선배가 환호했다.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미친거지, 정말.
“너희 때문에 돈 다 털렸어. 나 이번 달에 뭐 먹고 살아?”
“알아서 잘 사세요.”
“내가 도경수 너한테 기필코 뜯어 먹는다.”
“능력껏 잘.”
개와 고양이도 아니고 왁왁대며 씨름하는 은수 언니와 도경수 선배를 앞에 두고 부른 배를 식혔다. 찔끔 눈물을 흘리며 카드를 내미는 은수 언니는 나를 보고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돌변했다.
“그래도 우리 여주 맥이는 맛에 내가 살지.”
“하하......”
“착한 척 쩐다, 김여주.”
“아니......”
“아이스크림은 변백현이 사라.”
“인간적으로 사라.”
“옳소! 변백현이 사라!”
여론 몰이가 이렇게 쉽습니다, 여러분. 환호하는 박찬열 선배와 은수 언니, 도경수 선배를 뒤로 하고 선배가 썩은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 웃겨 하하하, 웃으니 변백현이 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왜... 왜요.”
“웃으니까 좋네.”
그러더니 군말 않고 대학로 인근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로 걸음을 옮긴다. “변백현 조온나 갑부!” 그 낮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박찬열 선배가 뛰어가 변백현의 목에 팔을 건다. 웃으니까 좋네. 이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돈다.
손에 다들 컵이든 콘이든 시원한 아이스크림 한 덩이씩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도경수 선배는 오늘 강의가 이것 밖에 없다며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캠퍼스를 걸었다. 박찬열 선배는 전과 다름없이 농구 코트로 뛰어 들었다. 아이스크림을 다섯 입만에 해치우고. 은수 언니는 조별 과제를 만나서 하기로 했다며 사라졌고. 늘 여전히, 비슷하게 변백현 선배와 나만 둘이 남아 캠퍼스를 걸었다.
두남자
“김여주.”
은근한 기싸움의 원인인 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래, 정확하게도. 오세훈이 나타났다. 다짜고짜 나타나 휴대 전화부터 내밀었다. “뭐야?” 한참을 내 앞에 내밀어진 휴대 전화를 응시하다 묻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번호 줘.”
“...... .”
“휴대폰 고장 났다고 내가 말했잖아.”
“세훈아.”
왈칵, 무언가 아까 전만해도 행복했던 기분에 얼음을 한 바구니 담아 쏟아 붓는 것 같은 기분에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나보다 더 굳은 얼굴을 한 선배가 그 휴대 전화를 제 손으로 잡아 오세훈의 가슴팍에 밀어 붙였다.
“뭐 하는 짓,”
“적어도 전 여자친구 전화번호는 외우고 있어야지.”
“...... .”
“설사 안 외우고 있더라도 전 여자친구에게 대놓고 묻는 건 너무 비매너적인 태도 아닌가.”
낭패스러운 얼굴을 했다, 오세훈이. 뭣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녀석을 내가 도대체 뭣하러 좋아했는가. 도대체 ‘뭐’ 때문에? 허탈한 기분이 꼭 심장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늘 부재중이었던 오세훈. 생각해보면 고백하던 그 날부터, 나는 오세훈이 나를 깊게 사랑한다고 믿어 왔건만.
덕지덕지 테이핑 된 오세훈을 향한 마음이 비로소 금가기 시작했다.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지 오래였지만.
오세훈을 만나오며,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이 오버랩 됐다. “남자 정말 잘 만났다.” “세훈이가 진짜 얼굴은 안 보나봐.” “여주도 예쁜데 나는 세훈이가 솔직히 더 아깝다.” “세훈이한테 넌 평생 감사 해야 해.” “여주는 남자 복도 많지.”
나는 그냥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냥 걸었다. 달랑거리며 내 옆구리를 찔러 오는 가방을 손으로 내리 누르고선.
“어딜 가.”
뒤에서 나를 붙잡아오는 변백현의 말과, 어깨를 잡은 손을 무시하고.
“선배 이 다음 수업 있는 거 알아요. 나는 오늘 자체 휴강 하려고... 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 그냥 오늘은 좀... 아니에요.”
사실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얀 베개에 얼굴이 푹. 처박혀 있었다는 것만 문득 기억이 난다. 찡하게 머리가 아파왔다. 오세훈 때문에, 나는 짧은 기간동안 두 번을 앓아 눕는다.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왜 나에게.
왜 나는 오세훈과 사랑했을까. 아니, 오세훈을 사랑했을까. 지금의 오세훈은 내가 사랑했던 오세훈이 아니다.
♡암호닉♡
[우동동우] [세훈맘] [콩콩] [승승장구] [닥구]
세훈이는 여주가 첫 여자예요. 여주도 세훈이가 첫 남자구요.
세훈이는 뭐든 다 서툴고, 맹목적인 사랑을 많이 받아 왔기 때문에 여주를 사랑하기에 ~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성격입니다.
백현이는 그와 반대로 어떻게 해야 여주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남자구요.
여주는 그냥 여자애에요. 꾸미면 나름 사랑스럽고, 편한 사람에게는 편하게 대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어렵게 대하고.
약간 감정적이고, 약간 이성적입니다. 평범한 여자애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도짜님이랑 비슷할겁니당.
조만간 변백현, 혹은 선배, 그라고 칭해지는 백현이의 호칭이 '오빠'로 바뀌었으면 조케씁니다.
읽어주셔서 넘나 감사합니당... 열 명 남짓한 도짜님들 정말 사랑 마니 바다오...
마니 머거오... 0 칼로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