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외과 VS 소아과 :: 03
By. 아리아
꽤 오랜 시간 제 어깨에 기대어 잠을 청했던 권교수 탓에 새 가운엔 그의 향수 냄새가 옅게 배여버렸다.
입은지 하루 된 가운을 바꿀 수 도 없는데다 피가 묻길 했나 어디가 찢어지길 했나 그저 남자 향수 냄새 하나 배였다는 이유만으로 고작 하루 밖에 입지 않은 가운을 바꾸기 세탁실 직원 분들께도 민폐라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와 그 가운을 계속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입고 벗을 때 마다 풍겨오는 향기는 흐트러진 권교수의 아이같은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제 귀는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띠링-
응급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자 또 다시 떠오르는 그의 잔상을 떨쳐 내게 도와준 메시지 알림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소아과 전임교수 전체 회의 : 오후 2시 소아과 의국 소회의실'
다른 과들은 그렇게 무서워하는 전체 회의라지만 워낙 좋으신 교수님들과 대학 시절부터 예뻐해주셨던 분들이 대부분이라 딱히 동료들의 말에 동의를 하지 못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느낌이 쎄하다. 왜 이러지. 마치 공포영화를 보고 온 후 혼자 집에 있는 느낌이랄까.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괜히 가운을 한번 정리하며 소회의실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자 이미 자리를 꽉 채우고 계신 교수님들께 꾸벅 인사를 하며 제 자리를 찾아 조용히 앉았다.
"그 506호에 희귀병 환자, 신경외과 내에선 완치가 힘들 것 같다고 협진 들어가자는데 맡아주실 선생 있나?"
저들끼리 똘똘 뭉쳐 잘 놀기로 유명한 신경외과와 누가 협진을 하고 싶어 할까. 혹여나 젊다는 이유 만으로 제 이름이 호명 될까 살짝 염려스러운 마음에 회의 안건이 적혀진 종이를 뒤적거렸다.
"권순영 교수 담당환자던데 이왕이면 비슷한 연배가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김교수 생각은 어떤가?"
"ㄴ,네? 저요?"
어디선가 불린 제 이름에 다급히 고개를 들자 하나같이 인자한 미소를 띄우시며 무언의 압박을 주고 계신 교수님들의 얼굴이 보였다. 당황해 어버버 거리고 있자 뭐라 거절할 틈도 없이 협진은 내 몫으로 고스란히 들어와버렸고 정신을 차리니 제 휴대폰엔 11자리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
교수실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며 저장 버튼을 누르니 이름을 쓰라는 안내창이 떠 또 한번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엔 고민없이 이름 세 글자를 써내려간 저인데 권교수의 번호 앞엔 그 세 글자를 쓰기가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고민고민하다 결국 저장한 건 다른 교수님들과 다름 없는 'NS 권순영 교수' 였다.
누가봐도 사무적인 이름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울리는 카톡 소리에 놀라 팝업창을 확인했다.
CS 최승철
'[세븐나이츠]
40레벨 초월-'
"이 새끼는 나이가 몇인데 폰게임이나 하고 자빠ㅈ-."
뜬금없은 게임 초대에 맥이 풀린 제 말을 막은 건 다름아닌 권교수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었다. 번호를 저장하니 자동으로 업로드 되어 친구목록에 생긴 1이라는 숫자가 거슬려 누른게 화근이었다.
저만 보면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지나가는 권교수가 아닌 친구들과 예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제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었던 권교수의 모습이 겹쳐보여 괜시리 홀드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르며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회진도 돌고, 차트 정리도 하고, 이제야 본론 단계로 들어간 논문도 두드려보고 수간호사 선생님께 뭐가 그렇게 바쁘시냐며 천천히 하시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자꾸만 머릿 속을 둥둥 떠다니는 싸가지 제로 권교수의 낯짝에 결국 키보드 위로 머리를 박아버렸다.
아려오는 통증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머리를 쿵쿵 박던 내 행동은 제 이마를 감싸오는 큰 손에 의해 멈추어버렸다.
"뭐합니까."
"..저 지금 권교수 상대할 힘 없으니까 좀 가주세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하루종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 짠 하고 나타났는데 어느 여자가 안 놀라겠는가.
"아, 그럼 상의도 없이 바로 수술 들어갈까요?"
"무슨 수술이ㅇ, 아-"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지 무턱대고 여자 방에 쳐 들어오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름 당황한 걸 티내지 않으려 고개도 빳빳이 들고 얘기했건만 권교수의 입술이 한쪽만 올라가 저를 비웃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연락 계속 했는데 안 받은 건 김교수고"
"이게 여자 방이라고 할 순 있습니까?"
직설적인 그의 말에 급히 고개를 돌려 제 교수실을 한 번 둘러보니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펴져있는 이불과 전공책들, 책상 위엔 논문을 고치고 또 고치느라 구겨지고 찢어지고 볼펜으로 찍찍 그은 더러운 종이들이 한가득.
이건 돼지우리에 가깝지 도저히 사람 방, 그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 혼자 지내는 곳이라곤 볼 수 없었다. 팔짱을 낀 채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 낯짝을 마주하자 잠시나마 그에게 설렜던 마음은 저 구석으로 박혀 들어갔다.
내가 미쳤지. 저런 싸가지한테 설레긴 무슨.
"원래 여자 방 대부분 이런데 여자 못 만나 보신거 티 그만 내시죠."
또 나왔다. 저 똥 씹은 표정. 왠지 모를 통쾌함에 부시시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테이블로 가 앉으려는 순간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느낌에 온몸이 경직되어버렸다. 분명 여기엔 나, 권교수 둘 뿐인데 귀신이 아니라면 이 손길은 권교수란 뜻이란 말이다.
갑작스런 다정함에 굳어있자 마저 쓰다듬곤 앞질러 가 자리에 앉아버리는 권교수였다.
"머리 엉켰길래."
"......"
"뭘 봅니까. 안 앉아요?"
"..아, 네. 앉아야죠."
혼이 나간 듯 자리에 풀석 앉았다. 또 말렸다 또.
***
테이블 위론 정말 공적인 이야기만 오갔다. 뭐가 부족하다느니, 뭐 때문에 안된다느니 워낙 희귀병을 지닌 환자인 탓에 각자의 소견을 모아봐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에 머리는 더욱 복잡해져갔다. 한 5시간 쯤 지났나 어느새 창 밖은 어둠이 서려져있었고 병원의 불도 하나 둘 씩 소등되어갔다.
"김교수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네네. 듣고 계십니다."
"내가 방금 무슨 말 했는데요."
"아, 그 제가 말한 수술방법은 출혈이 클 것으로 예상 돼 불가능하다고. 아니에요?"
그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하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였다. 이어 뾰루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제 말투를 따라하는 그였다.
"네, 아닌데요."
"배 안 고프냐고 물어봤습니다."
"안 고픈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 쪽에서 울리는 꼬르륵 소리가 오늘따라 참 원망스러웠다.
"김교수는 배가 안 고파도 그런 소리가 나나봅니다. 신기하네."
"아, 고파요. 고프다고요!"
거센 파도처럼 확 밀려오는 쪽팔림에 고개를 끄덕이며 짜증을 내자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는, 저게 비웃음인지 그냥 진짜 웃음인지 추리를 하게 만들곤 자리에서 일어나 '초밥 괜찮죠?'하며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싸, 초밥. 내사랑.
그가 없는 틈을 타 어지러진 교수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석민이나 지훈이 치우라고 치우라고 노래를 할 땐 먼지 하나 건들지 않던 방인데 왜 그의 비웃음 하나 때문에 이 지랄을 하고 있는건진 저도 잘 모르겠다. 나 왜 이러지.
대충 치우고 보니 나름 깨끗해진 교수실에 마무리로 손을 탁탁 털며 컴퓨터 앞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권교수 오기 전까지 대충 논문의 틀은 잡아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슬슬 밀려오는 잠을 애써 떨쳐내곤 써내려갔다.
권교수 시점
작은 손으로 에이포용지를 꽉 채워가며 진지한 모습으로 일을 하는 김교수의 색다른 모습에 흥미롭기도 잠시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도 배가 고프지 않다며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다 결국 인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탓에 고개를 내저으며 겨우 생각을 떨쳐내곤 초밥집으로 향했다.
초밥 하니 일전에 식당에서 동료들과 초밥초밥-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베시시 웃던 김교수의 모습이 또 다시 떠올라 결국 내 양쪽 입꼬리는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떨쳐내면 뭐하겠나. 금방 머릿속을 헤집어 놓아버리는데.
"초밥 12피스 두 박스 포장이요."
"네."
마감 시간이라 이리저리 바쁜 탓에 꽤 오래 걸린 시간에 시계를 보며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혹여나 기다릴까 싶어 빠른 걸음으로 걷다 결국 뛰기 시작해 예상보다 빨리 교수실 앞까지 도착했고 숨을 대충 고르곤 문을 열었다.
"김교수님."
분명 불은 다 켜져있는데 벌레 지나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의아한 느낌에 조심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요?"
"......"
컴퓨터 앞에서 책상에 볼을 대곤 잠들어있는 김교수가 있었다. 대답 대신 들려오는 일정한 숨소리와 더불어 볼이 눌려 붕어처럼 돼버린 입술은 나를 웃게 만들기 충분했다. 잠이 많은건가, 아니면 진짜 잠을 못 자서 피곤한건가.
차가운 책상에 엎드려 자니 불편한지 자꾸만 뒤척이는 그녀가 신경쓰인다는 걸 핑계삼아 안아들어 푹신한 침대 위로 옮겼다. 잠자리를 옮겨도 잠깐 잠투정을 부리다 다시 새근새근 잠들어버리는 그녀에게서 낯선 향이 풍겨왔다.
옅지만 분명 남자 향수 냄새였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향에 내 미간엔 자동적으로 주름이 생겨버렸다.
"김교수님."
"......"
"김ㅇㅇ"
"ㅇㅇ야"
"..으응."
처음 불러보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아직까진 교수라는 호칭이 어색한지 이름을 부르자 실눈을 뜨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에 이상한 용기가 샘솟았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네에-"
"만나는 사람,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내 입꼬리는 주체를 하지 못한 채 위로 향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내젓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는 그녀 덕에.
포장해온 초밥 위에 일어나면 먹으라는 포스트잇을 붙여놓곤 잠에서 깰까 조심히 문을 닿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녀에게서 맡은 향수 냄새가 제 것이라는 확신과 실실 새어 나오는 바보같은 웃음도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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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역대급 망글 Oh 역시 전 똥손이였어요...제가 무슨 글을 싸지른건지 하하하핳 제 손을 탓하세요...진짜 이런 글도 항상 좋아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정말로ㅠㅠㅠ
그리고 저는 그냥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 실제 병원에서 쓰는 단어나 그런 걸 잘 알지 못해요!!의학 부분에서 허접한 면이 보이신다면 그냥 애교로 봐주시고 넘어가주세요:) 저도 최대한 노력중이니까요!!!암호닉은 정리중이긴 한데 넘나 많은 것....정리 끝나는대로 공지로 올리겠습니당 암호닉 신청은 항상 가장 최신화에서 받고 있어요!!
그럼 굿밤!! 가기전에 댓글 하나씩 달아주고 가시면 제가 글 쓸 때 정말 큰 힘을 얻어용!!!! 사랑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