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선배를 좋아하고 있다고 인정해 버리니까 오히려 선배를 대하는 게 훨씬 더 편해졌다. 물론 저 선배 좋아해요 하고 말할 패기는 없었지만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 따윈 볼 필요 없단 생각이 들었다. 17살의 나와 비교해 봤을 땐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선배를 만나고 나서 한 달 만에 나에게도 참 많은 변화가 생겼다. 동기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는데 요즘은 먼저 말도 걸어본다 뭐 그래봤자 과제와 수업에 관한 이야기가 다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더 이상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아도 밤에 잠을 잘 잔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예뻐
03
w.갓제로빵민
"경영과는 정말 변함이 없구나 여길 또 오다니"
MT 시즌이었다 당연히 우리 과도 전체 MT를 가게 되었다. 다른 과에 비해서 인원이 많다 보니 항상 장소 섭외가 문제였고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경기도 근교에 있는 청소년수련관을 찾았다. 영민 선배는 3년 전에도 여길 왔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작년에도 여기로 왔었는데 선배 제가 봤을 땐 아마 내년에도 또 여기 올 것 같아요...
대다수가 취업을 나가 소수 정예 인원인 4학년을 제외하고 1학년, 2학년, 3학년 이렇게 모여서 농구 내기를 하기로 했다. 1등 한 학년은 저녁 시간 전까지 자유시간이었고 2등 팀은 저녁 준비 3등 팀은 정리 및 설거지 이런 식으로 나누기로 했다. 수련회장 한편에 마련된 농구장에 경영과 사람들이 모두 빙 둘러서 다들 자기 학년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틈바구니에 서서 농구 코트 안에서 몸을 풀고 있는 영민 선배의 모습을 구경했다.
"파이팅!"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남들처럼 크게 외칠 용기가 없어서 그냥 입모양으로 파이팅 하고서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러자 영민 선배가 살짝 웃으면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뭐야 방금 나한테 윙크한 거야? 어머 어떻게 잘생겼어요 오빠!!! 내 주위에 있던 여자애들이 다 난리가 났다. 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자꾸만 올라가는 광대를 꾹꾹 눌렀다. 분명 나랑 눈이 마주쳤으니까 나한테 한 게 분명했다.
영민 선배는 물 만난 고기처럼 코트 위를 자유자재로 누볐다.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모든 득점은 선배가 가져갔다. 1학년과는 막상 막하의 승부였고 3학년은 큰 점수 차로 가뿐하게 이기자 2학년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영민 선배는 같이 뛴 다른 동기들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사실 TV에서 농구 경기를 볼 때는 룰도 잘 모르고 그냥 아무 생각 없었는데 농구하는 남자가 이렇게 멋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영민 선배가 사람들 사이로 걸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 사이 여자애들 몇몇이 이온음료와 물을 건넸는데 다 마다하고서 굳이 내 손에 쥐고 있던 물병을 가져갔다. 아 그거 내가 마시던 건데... 거리낌 없이 입을 대고 마시는 모습에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저기에 입대고 마셨는데 아... 유치하지만 선배랑 간접키스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에? 아니에요"
"얼굴이 불타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닌 거 맞아? 너 방금 좀 이상한 상상했지?"
"추.. 추워서 그런 거거든요!"
그냥 좀 넘어가 주지 이럴 때 보면 선배도 은근 짓궂은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내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고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사실 아직 4월이라 좀 춥긴 추웠다. 차가운 손등이 뜨거운 볼과 맞닿으니 적당히 시원해졌다. 선배는 내가 춥다는 말이 신경 쓰였는지 자신의 외투에서 핫팩을 꺼내 그런 내 양손을 끌어다 핫팩과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 큰 손이 내 손을 완전히 다 덮는다.
"따뜻하지"
"네"
"손이 왜 이렇게 차 "
"원래 손발이 차요 "
근데 선배 덕분에 이젠 따뜻해졌어요. 뒷말은 삼키고 그런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신기했다 예전엔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선배의 따뜻한 눈빛은 내 마음에 안정감을 찾아주는 기분이었다.
작년처럼 부어라 마셔라 할 줄 알았는데 올해는 레크레이션 강사까지 초빙해서 나름 재미있는 MT 구성이었다. 1학년 2학년 3,4학년 이렇게 팀을 나눠 게임을 했다. 스피드 퀴즈, 코끼리 코 10바퀴 돌고 립스틱 칠하기, 단체줄넘기 등등... 나도 이렇게 사람들이랑 어울려 웃으며 즐겨보긴 처음이었다. 레크레이션 강사가 마지막 댄스 배틀에서 역전할 수 있는 기회라며 200점을 내걸었다. 2학년은 농구 때와는 다르게 게임에서는 꼴찌를 하고 있었다.
랜덤으로 틀어주는 노래에 맞춰 사람들이 뛰쳐나가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특히 1학년들이 모두 패기롭게 미친 듯이 막춤을 춰서 다들 배를 부여잡고 웃어댔다. 1학년의 승리가 유력한 가운데 강사가 마지막이라며 노래를 틀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전주가 나오고 갑자기 선배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영민 선배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임영민!! 야 뭐 해 보여줘!!"
자꾸만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영민 선배를 다른 선배들이 무대로 떠밀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뒤통수를 끓던 선배가 갑자기 표정이 싹 바뀌더니 그 노래의 안무를 추기 시작했다. 아까 1학년들이 흐느적거리며 추던 막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박자 하나 놓치지 않고 칼같이 안무를 추는데 선배의 또 다른 모습에 난 넋을 잃고 쳐다봤다.
"와.. 대박 전설의 내꺼하자를 실물로 영접하다니..."
여자애들이 다 난리가 났다. 알고 봤더니 선배가 1학년 때 학교 축제에서 인피니트의 내꺼하자라는 춤을 춰서 고화질의 직캠까지 남았단다. 그때 학교 에타에 직캠이 올라와서 한동안 엄청 난리였다고 했다. 그래서 노래가 나오자마자 선배들이 온통 영민 선배의 이름을 불렀던 거다.
잘 춰놓고 막상 무대에서 내려오니 선배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나도 핸드폰으로 찍어둘걸 아쉽다. 결국 선배의 활약으로 200점은 2학년이 가져가고 당연히 우리가 1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상품은 소주 3박스와 맥주 5박스였다. 굉장히 엄청난 걸 준비했다더니 결국엔 또 술이다.
역시나 MT는 밤새 마시는 술 아니겠냐며 초장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사실 나도 술은 좀 하는 편이다 술자리의 킹 재환 선배의 손에 붙들려 여기저기 다니면서 늘어난 거라곤 주량뿐이었다. 처음엔 짜 놓은 조별대로 모여서 술을 마셨다. 교수님들과 과대들이 돌아가면서 건배 제의를 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다들 끼리끼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여주야 너 괜찮아?"
"네- 아직까진 괜찮아요"
"은근 잘 마신다 너?"
의외라는 듯 말하는 선배를 보며 그냥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곧 우리 쪽 무리에서도 미친듯한 술 게임이 시작됐다. 술은 좀 마셔도 술 게임은 잘 모르는 나만 연속으로 계속 걸렸다. 글라스에 가득 담긴 소맥을 연속으로 세잔 들이키니 속도 쓰리고 눈앞이 살짝 핑 도는 느낌이 났다.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특히 난 007 빵이라는 게임을 제일 못한다. 또 걸려서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 글라스 잔을 바라보는데 그때 내 옆에 있던 영민 선배가 그걸 낚아채 단숨에 마셔버린다. 주위에서 오~ 박력 넘쳐 하면서 호응을 했다.
"흑기사 했으니까 소원 들어줘야지"
"아... 영민 선배가 마음대로 가져간 건데..."
흑기사 해줬으면 소원 들어 줘야 한다면서 다들 난리였다. 내가 좀 난감해 하자 영민 선배가 그런 날 보면서 일단 지금 당장 생각 안 나니까 킵 해둘게 하면서 웃었다. 우리 쪽 테이블도 하나둘씩 쓰러져 나가고 분위기가 조금 잔잔해졌다. 그러자 남은 사람들끼리 진실게임을 하자며 제안했다.
"자 굴립니다~"
맥주병을 가운데 두고서 내 앞에 있던 남자 선배가 힘차게 병을 굴렸다. 아 또 나다 첫 타자부터 내가 걸렸다. 진짜 나는 운도 지지리도 없는 애인 가보다.
"여주는 눈도 별로 안 나쁜 거 같던데 왜 맨날 안경 쓰고 다니는 거야?"
뭔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아 그게.. 하면서 대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저 선배는 평소에도 눈썰미가 좋기로 유명한 선배였다. 내가 눈이 안 나쁜데 안경을 쓰고 다니는 건 또 어찌 알았는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야 무슨 질문이 그러냐- 패션도 모르냐 패션?"
"패션? 체크남방 밖에 모르는 패고 주제에 네가 감히 패션을 논하느냐 솔직히 말해봐 너네 집 옷장에 체크남방 깔별로 있지?"
영민 선배도 정곡이 찔린 듯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버린다. 다시 그 선배의 눈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냥... 시력보호용이에요... 난시가 좀 있어서"
"그래? 저번에 보니까 안경 벗은 게 더 이쁘던데 걍 벗고 다녀~"
뜻밖의 대답에 나도 놀라고 주위 사람들도 다 놀란 듯 나와 그 남자 선배를 번갈아 본다. 오~ 뭐야 이 갑자기 핑크빛 분위기는~ 다른 선배들이 놀리려는 듯 나와 그 남자 선배를 엮기 시작했다. 갑자기 급 불편해진 마음에 이 상황을 잠시 모면해야겠다 싶어서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일어나 버렸다. 부끄러워서 도망가는 거냐며 어떤 선배가 웃는다. 그런 거 아닌데...
영민 선배의 묘하게 굳은 얼굴이 신경 쓰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아직도 진실게임 중이었다. 맥주병의 주둥이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니라 영민 선배였다. 병을 돌린 여자애가 술을 먹어서 빨개진 건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선배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하고 묻는다.
"음....."
선배가 잠시 망설이는듯해 보였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쑥 둘러보다가 그 여자애를 보고서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오~ 다들 여기저기서 누구냐고 우리 학교 사람이냐며 추궁하기 시작했고 영민 선배는 그냥 웃으면서 자세한 건 묻지 말라고 했다.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누구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선배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부러웠다. 그냥 괜히 그게 나였으면 좋겠고 막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단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예쁘고 잘난 애들이 우리 과에도 널렸으니까
술 좀 깨려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니 사실 좀 울적해져서 걷고 싶었다. 수련회장 근처에 산책로가 있었던 거 같은데...
"어디 가?"
갑자기 내 머리 위로 큰 손 하나가 올려졌다. 언제 따라 나온 건지 영민 선배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라고 말하니 어두워서 위험하다며 같이 가잔다 아 이래서 내가 선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다.
"선배 근데 사랑이는 어쩌고 왔어요?"
"아 형한테 잠시 맡겼어"
"친형?"
"응"
"그렇구나..."
"왜 보고 싶어?"
"에?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보고 싶으면 놀러와 언제든지"
이게 무슨 뜻일까 강아지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는 거겠지? 괜히 별뜻 아닌 거에도 나 혼자서 착각하면서 가슴이 쿵쾅거린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선배가 내 표정을 살핀다.
"산책 시킬 수 있을 만큼 크면 같이 산책도 가자"
"넹!"
"사실 사랑이가 너 엄청 보고 싶어 해"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눈을 보면 다 알 수가 있지"
"치.. 거짓말 "
"어? 진짠데"
시덥잔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산책로를 걸었다. 밤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낮보단 상당히 추웠다. 외투를 너무 얇은 걸 걸치고 나왔나 그때 내 어깨 위로 닿는 손길에 놀라서 쳐다보니 선배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아냐 걸치고 있어-"
"선배도 춥잖아요...."
"나? 에이 난 지금 안에 세 겹이나 껴입어서 안 추워"
거짓말 선배의 귀 끝이 피가 날 것처럼 빨간 게 보였다. 그래도 날 위해서 그런 건데 더 거부하면 선배가 민망해 질까 봐 어깨에 걸쳐진 옷이 떨어지지 않게 잘 여몄다.
"여주야"
"네?"
"나 소원 말하면 진짜 들어줄 거야?"
"으음.. 들어보고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
"너무 곤란한 것만 아니면 돼요"
"그래 그럼 쪼금만 더 킵 해놔도 될까?"
"올해 안에는 쓸 거죠?"
"응.. 꼭 올해 안에는 쓸게"
"알겠어요"
대체 소원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뭐 아무렴 어때 그 소원을 핑계 삼아 선배랑 엮어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선배 제 소원은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어요.
남기는 말 |
냐햐~ 오늘 월급을 받아서 그런지 기부니가 너무 좋아서ㅎㅎ 글이 술술 써졌어용ㅎㅎ 그래서 분량조절 대실패!!! 그리고 짤도 엄청 마니 넣었어용ㅎㅎ 헤헤헤~ 기분좋아라~ 냐햐~ 저 지금 엽떡시켰어요ㅠㅠㅠㅠ 오타는 엽떡다먹고 와서 수정해야징>ㅁ< 아 글고 제가 혹시 암호닉 빼먹으신분 있으면 댓글 남겨주세요ㅠㅠㅠㅠ 할매라소... 눈이 침침해소.... 항상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 독자 여러분~ 제맘 알죵♥ 암호닉도 마구마구~ 신청해 주세용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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