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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지훈아 이거 내가 만든...." 

"나 누나 좋아하는데, 누나도 나 좋아하는 거죠?" 

"......아." 

"사귈까 우리?" 


 

 

 

수줍은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 정성스레 만들어간 케이크 상자를 지훈에게 내밀던 나는 그의 말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훈이를 멍하니, 갑작스런 그의 고백에 얼떨떨 넋이 나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았다. 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는지 앞에 앉은 지훈이 그 모양새를 한 번 따라하고 살풋 웃었다. 눈 꼬리를 접으며 사실은 다 안다고, 누나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 벌써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고 그의 눈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떨림 없이 여유로운 그 눈빛에는 네가 말하기 전에 내가 눈치껏 먼저 고백한다는 남자의 자만심도 숨김없이 담겨있어서 나는 오히려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예상치 못했다. 그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이렇게 뜬금없이 고백 받는 상황을 짐작도 못했다. 지금은 단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할 뿐이다. 피해야 해, 울지도 몰라. 


 

 

"아....맞다!" 

"그래. 누나 맘 내가 알... 어?" 

"이 정신머리, 나 오늘 중요한 일 있는데 깜빡했다." 


 

 

과장되게 손뼉까지 치는 나를, 이게 대체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지훈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어 왔다. 지훈아 미안. 나도 지금 내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거든. 


 

 

"미안한데 나중에 다시 보자." 

"아니, 뭐? 여주 누나? 야! 누나 뭐야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입이 마르는지 혀끝으로 입술을 훔치며 지훈이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잡으며  앉아보라는 둥 말을 고르는 게 보였다. 맙소사 갑자기 저 아이가 너무 어려 보였다. 어떻게 이래? 양은냄비도 멍청한 김여주 맘보다 빨리 식지는 않을 거다. 허무해. 삐죽거리는 저 입모양 진짜 좋아하는데, 어리둥절 쳐다보며 떽데굴 굴리는 저 눈동자 정말 좋아하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지훈인데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어서 안달하는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김여주, 정말 정상이 아니구나. 미친 게 아니면 고백하는 녀석을 버려두고 일어나는 짓 따위는 절대 할 수 없는 거야. 

 

대충 어설프게 마주 웃어주고 그대로 일어나 카페를 벗어나는 나를 뒤에서 혀를 차며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놀랐다 저 애. 당연히 놀랐겠지. 나도 이런 내가 기가차고 놀라운데 쟤는 얼마나 어이없겠어. 


 

 

나 자신에게 실망한 발걸음이 못 마땅해 퉁퉁거렸다. 예쁘게 보이려고 신은 하이힐 부츠가 축구화 스파이크마냥 길바닥을 거칠게 헤집고 동동 구르며 욕지기를 했다. 병신, 쪼다, 멍청이, 그냥 그 따위로 혼자 평생 살아 이 정신 빠진 년아!  

사람들이 붐비는 인도 한 복판에 서서 한 참을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예쁘게 서로 맞물린 보도블럭 위에 방금까지 찬란하던 내 설렘이 떨어져 있었다. 뭘 잘했다고 울긴 울어. 여기 서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다시 카페로 들어가서 지훈이한테 고백해야 하는데, 아까 그건 깜짝 개그 드립이었다고 빌어야하는데..... 김여주 이 연애고자가 뭔 깽판을 치고 나온 건지 한심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고백 받는 게 뭐, 그게 뭐가 어때서 시작도 안 해보고 도망나오냐고. 그 기회가 어떤 기회였는데 거길 박차고 뛰쳐나오냔말야 이 멍청아. 


 

 

힘없이 고갤 돌리니까 그제야 오른 손에 꼭 움켜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지훈이에게  주기 위해 밤새 만들었던 생크림 케이크가 주인을 만나지 못해 그런지 더 처량해 보였다. 혹시나 팔이라도 잡힐까봐 어찌나 급하게 뛰쳐나왔던지 케이크가 박스 귀퉁이에 몰려 찌그러져 있었다. 구석에 몰린, 철없고 겁 많은 나의 지겨운 콤플렉스. 구석진 곳에서 '이번에는 진심일지도 모르잖아. 그치만......' 의심하며 떠는 내 모습과 어지간히도 닮았다.  

그대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수군거리는 소리도 내 곁으로 지나갔다. 뭐라 하려면 뭐라 하라지. 내 머리가, 내 심장이 더 시끄럽게 타박 중인데 사람들 따위 뭐 대순가.  


 

고백 전 들떴던 심장이 가라앉고 떨려서 달아올랐던 볼의 붉은 열기가 천천히 식어 갔다. 이번에는 분명한 사랑이라 믿었던 그 믿음이 또 다시 흩어져갔다. 


 


 


 


 

 

 

 

소꿉친구 

 

written by 멀티지코 


 


 


 

 

 

 

 

"히유, 이번 케이크도 겁나 화려하네. 자주 하니까 늘어 그지 어? 너 이 쪽 길은 관심 없냐? 내가 볼 땐 이쪽이 적성이야 너." 


 

 

저 보기 싫은 낯짝. 오늘 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자식. 


 

 

"닥쳐라. 건들지 마. 돈 터치!" 

"이야, 찌그러진 것도 화려한 게 예술이네. 이건 어디부터 먹어 줘야하냐? 음..." 


 

 

포크를 들고 이리저리 고르던 우지호가 결정을 내렸다. '지훈아'라는 초콜릿 글자에 날카로운 삼지창을 내려 퍽 소리 나게 찌르는데 마치 심장이 찔린 것처럼 아팠다. 깊게도 떠내네. 잠시간의 짝사랑이 이번에도 우지호의 입속으로 사라져갔다. 분화구처럼 푹 파인 케이크를 보니 이상하게 휑한 것도 같고,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같은 것이 묘했다. 어젯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자 한자 적어내린 이름이었는데 우지호의 입속으로 사라지니까 정말로 모든 게 과거형이 되는 것처럼 아련했다. 단지 이름이 사라진 것뿐인데, 존재의 가치란 저렇게 허무하다. 그동안 내 곁을 지나간 짝사랑의 이름들은 왜 하나같이 나에게 와 꽃이 되지 못했을까.  


 

 

"으음 너ㄹ 므니 저아" 

"씨, 읽지 마, 읽지 말라고. 왜 자꾸 푹푹 찔러?! 깨끗하게 못 먹어!!!!" 


 

 

널 많이 좋아해. 


 

 

이제는 사라진, 주어 없는 문장은 대상이 없어서 그런지 공중에서 겉돌았다. 그리고 우지호의 거친 포크질에 남은 문장들도 크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저러니까 꼭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 같다. 오늘 지훈에게 고백하기 위해 며칠을 준비했는데 늘 듣던 우지호의 구박처럼 나에게 사랑이란 깃털보다 가벼운 게 맞는가 보다.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기운도 없다. 우지호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응하고 별 것도 아니라고 말하니까 진짜 별 거 아닌 것처럼 무덤덤해서 기분도 묘했다. 아까 그 거리에서 그렇게 목놓아 울었으면서 바보같이 뭐야. 이번에는 내 사랑이 분명하다 확신했고 그렇게 고백하기로 결정한 후로는 들떠서 잠 못 이루던 밤들이었는데 지훈이가 갑작스레 해 온 고백에 거짓말처럼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걘 왜 나한테 고백을 한 거야. 그 아이 잘 못이 아닌데도 핑계는 자꾸 밖으로만 향한다. 


 

 

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더 이상 고2의 내가 아닌데 여전히 그날에 묶여있는 것만 같다. 그때 그 빌어먹을 녀석이 낄낄거리며 “내가 여주한테 고백한 진짜 이유?” 하던 게 다시 생각나버렸다. 지금도 봐. 생각만 했는데도 몸이 자연스레 굳는다. 하아, 이게 도대체 몇 번 째냐고. 그 버러지 같은 놈 때문에 벌써 몇 명을 놓치는 거야! 


 

 

언젠가부터 쿠크다스보다 약해진 심장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그렇게 공을 들여 좋아하다가도, 그의 애정을 받으려 갖은 노력을 하다가도 막상 그쪽에서 나 좋다하면 그 순간 모든 애정이 식어버리고 심장이 밑바닥까지 쿵하고 떨어지고 만다. '진짜로 날 좋아하는 걸까?' 하는 의심과 함께 그 순간이 곧이곧대로 보이지 않게 됐다. 미친. 좋아하는 사람이 나 좋다고 하면 얼씨구나 웬 떡이냐 덥석 물지는 못할망정, 주물럭거리다 쉰 떡 마냥 감흥이 없어져서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안달을 했다.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진짜 이러다 연애도 못해보고 대학 졸업하는 거 아닐까? 고2 그 어릴 때 한 달 사귄 연애가 내 인생 유일한 경험이 되는 거야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억울해서 미칠 것만 같다. 

그 와중에 벌써 케이크를 반이나 퍼먹은 우지호를 보니까 더 짜증이 났다. 핑계의 화살이 방향을 틀어 우지호를 겨냥했다. 우지호 때문은 아니지만 언제나 이런 결과를 만나면 우지호 때문인 것 같다. 


 

 

아, 짜증나. 저눔 새끼는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하는 연애, 나는 왜 한 번을 못해 왜! 


 

 

"뭘 그렇게 노려보냐? 이 짝사랑종결자야." 


 

 

듣기 싫어. 치떨리게 싫다. 아줌마 소리를 들어도 저것보단 안 싫을 거 같다. 녀석의 비아냥거림이 짜증나서 먹고 있는 녀석 앞의 케이크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아, 적당히 처먹어!" 

"야, 먹을 땐 개도 안 건들인댔다." 

"너 먹지 마. 너 먹으라고 만든 거 아니라고 이 거지같은 놈아!" 

"뭐래. 어어? 야, 내놔 포크. 빨리 안 내놔?" 

"그 째진 눈, 난 하나도 안 무서워 시키야. 왜 지꺼마냥 퍼먹고 지랄이야 진짜." 

"허, 말본새 봐라. 왠지 화살이 나한테 몰리는 이 기분은 착각이지?" 


 

 

잔소리에도 꾸역꾸역 훔쳐 퍼 먹길래 포크까지 냅다 뺏었더니 입가에 생크림을 가득 묻힌 채 눈을 부라리고 잔소리를 한다. 난도질된 케이크가 형편없어서 눈물이 다 났다. 우지호 새끼가 망쳤어, 이건 진짜 같다. 


 

 

"......아 진짜. 고거 좀 뺏어 먹었다고 극성이네." 

"이게 뭐야. 엉망이 됐잖아. 이게 뭐야 흑..." 

"애초에 엉망였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싫어.....예정대로라면 지훈이 직접 먹여주고 있어야하는데...." 

"......씹...." 

"야, 너, 너네 집으로 건너가. 짜증나. 빨랑 가라고" 

"한심아. 그 둔해빠진 새끼는 첨부터 별로였어. 몰랐냐? 그리고 걔가 그 얼굴로 왜 널 사귀냐?" 

"씨....안 가 진짜? 꺼져. 너 가라고!" 

"솔직히 너도 그 순간에 아니니까 냅다 뛰쳐나온 거 아냐." 

"웃기네. 아니거든?! 내가 고백 받는 트라우마땜에 잠시 놀라서 그런 거거든?" 

"풉, 잠시 놀랐대. 우아 크크크" 

"웃지 마. 나 아직 정리된 거 아니고 끝난 것도 아니야." 


 

 

끝났다. 애저녁에 끝났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슬픈 걸 나도 알고 있다.  


 

 

"......아 됐어. 근데 그 케이크는 쫑난 거 맞잖아. 내 놔 억지 부리지 말고. 나 저녁 못 먹었어. 미혜가 길에서 울어재끼는 통에 지금까지 암 것도 못 먹었다고." 


 

 

미혜. 우지호를 미친 듯이 쫒아 다니는 과 후배. 뭐 다 받아주는 우지호니까 조만간 받아줘서 커플이 되겠지. 빌어먹을 커플. 짜증나 세상 커플들 다 없어져야해. 


 

 

"씨...ㅂ" 

"어허. 여자는 욕하는 거 아니라고 오빠가 했어 안 했어?" 

"오빠 좋아하시네. 꺼져 코찔찔아!" 

"어릴 때 별명 부르면 내가 열 받을 것 같냐. 어 못난아?" 

"으아악 싫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발길질을 해대는데도 콧방귀를 끼며 우지호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케이크만 사수한다. 문밖 거실에서 고만 싸워라. 너넨 다 컸는데 아직도 허구한 날 쌈질이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넘어왔다.  


 

 

"엄마아, 우지호 좀 가라 그래! 자꾸 괴롭힌다고!" 

"아 동네 시끄러 기집애야. 저거 언제 커." 

"이모, 이모가 이해하세요. 여주 오늘 또 차였대요." 

"차이긴 누가 차여!" 

"우악 씨. 아퍼!" 


 

 

우지호가 걱정하는 척 가벼운 입으로 쪼르르 엄마한테 이르길래 뒤통수를 세게 갈겼다. 미안 엄마. 나 오늘은 엄마 친구 아들 새끼 도저히 못 봐주겠어. 미친 듯이 때리는 나의 주먹질에 녀석이 아프다고 엄살을 떨며 난리다. 첨엔 얄미운 우지호를 때리는 거였는데 어느 순간  나의 고백을 산통깨버린 지훈이에 대한 원망까지 더해졌다. 내 사랑의 속도가 원망스럽다. 좋아한다는 말에 덜컹해서 상황을 의심하는 내가 원망스럽다. 이런 병을 앓는 게 전부 우지호의 친구로 지내온 지난 세월 때문인 것 같아 갈수록 울분이 터졌다. 다른 감정까지 어지러이 섞여 무작위로 녀석에게 쏟아지는데 걷잡을 수도 없다.  

그러게 왜 오늘 같은 날 긁는 거야. 능글거리는 낯짝으로 속을 긁어대는 네가 잘 못한 거니까 넌 맞아도 싼 거야.  


 

 

"그만 때려라. 아프다고." 

"너 싫어. 어쩜 그리 눈치가 없어?" 

"내 탓으로 돌리면 니 화가 좀 풀리냐?" 

"......." 

"그냥 인연이 아닌 거야." 

"씨...... 너 가. 제발 너네 집 좀 가. 우지호 진짜 세상에서 젤 싫어!!" 

"니가 애냐? 아주 짝사랑만 주구장창 하더니 철도 안 드냐? 정신 차려. 차라리 그냥 편하게 블락빈가 뭔가 아이돌이나 계속 좋아해라 인마." 

"어딜 감히 그 입에 블락비를 올려?" 

"헐! 요란하다 진짜. 쯧“ 


 

 

언제 철 드냐며, 녀석이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쪽쪽 빨고 내려놓으며 능글거렸다. 


 

 

“여주야. 그냥 조용히 있다가 오빠한테 시집오라니까?” 


 

 

저 바람둥이 새끼가 미쳤나 한심해서 혀를 차며 바라보았더니, 한 팔을 벌리며 더 가관을 떨었다. 


 

 

“너 나한테는 왜 고백 안 하냐? 난 다 받아줘. 상처 안 받는다니까?”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진짜!” 

“잘 생각해봐. 내가 볼 땐 너 병이야 그거. 그러다 너 평생 짝사랑만 한다." 

"......." 

"아, 실수! 이번 건 진짜 실수다 미안." 

"......" 

"저기 여주야." 

"....... 꺼져. 내 짝사랑이야. 내 맘이야. 다 내가 알아서 할 바야. 니가 뭐라고 나한테 지적질이야!! 시작도 못한 짝사랑이라도 절절한 사랑의 이별만큼 괴롭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너처럼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바람둥이가 뭘 알아? 내 맘이 가벼워? 네 진심 없는 사랑에 비하면 내 짝사랑이 백배는 고귀해 이 새끼야!!" 


 

 

네가 안 나간다면 내가 나가면 되는 거다. 더 이상 우지호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 가장 안전한 내 방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지호의 세상을 만난다. 우지호 1호팬인 엄마가 지호가 너 걱정돼서 그러는 걸 왜 그러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실연한 딸의 심정 좀 보듬어 주면 안 되는 거야 엄마? 엄마는 적어도 일방적으로 내 편이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야.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 마당 한 켠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이 추운 날, 왜 내가 내 집에서 평온을 못 얻는지 서글펐다.  


 

 

내가 사람의 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은 22년간 녀석이 만든 세상 속에서 늘 조연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땅콩집이란 게 있는지도 모를 때, 우리 부모님들은 마음과 돈을 모아서 넓은 땅 위에 똑같은 집을 지었다. 한동네 옆집에서 마주보며 살아온 세월이 근 20년이었다. 어릴 때는 싸웠다기 보다 오히려 내가 우지호의 보호자였다. 태어날 때 유난히 약했던 지호는 내가 감지덕지 놀아주는 대상이었다. 유치원 때까지는 그럭저럭 내가 골목대장하면서 녀석을 보살폈다고 가족들 모두 인정했다. 배은망덕한 녀석이 전혀 그걸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초등학교에 들어감과 동시에 우리의 지긋지긋한 관계는 역전되더니 재역전될 줄을 몰랐다. 하얀 피부에 예쁘장하고 야무졌던 녀석은 어른들에게 엄청 예쁨을 받는 주제에 둘만 있으면 날 엄청 괴롭혔다. 진짜 초딩이라 툭하면 머리를 잡아당겨 곱게 묶은 머리끈을 풀어 도망치는 게 녀석의 하루 일과였다. 내 머리는 반곱슬이라 조금만 공기가 습해도 머리가 부스스해져서 가지런히 뒤통수에 묶어둬야 안심이 됐다. 엄마가 어찌나 세게 올려 묶어주셨는지 눈이 위로 찢어 올라가 사람들은 내가 우지호랑 이란성 쌍둥인 줄 알거나 누난 줄 알았다.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초딩녀석이 이 못난이랑 자기가 왜 쌍둥이냐고, 절대 누나아니라고 머리끈 훔쳐 달아나버려서 늘 나는 산발로 돌아다녀서 꼬질꼬질했다.  


 

그나마 중학교 때는 각자 여중, 남중으로 학교를 따로 가면서 학교에서 만큼은 살만 했다. 물론 집에 돌아오면 이 병신 저 병신 하면서 싸워댔지만. 그래도 그때가 내 인생 유일한 태평성대였던 것 같다. 


 

 

나랑 키가 고만고만했던 우지호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10센티를 앞질렀다. 갑자기 너무 커버려서 무릎 뼈에 물까지 찼던 녀석이니 뭐. 예상대로 우리는 한 반이 되었다. 엄마와 이모(지호네 엄마. 이모는 우리 엄마랑 고등학교 동창이시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우리를 걱정해서 일을 꾸밀 것만 같았었다. 역시나 그랬고. 지호가 처음엔 낯가리는 성격에다가 워낙 페이스가 가만히 있어도 사나워 보이니까 나라도 옆에 있는 게 낫겠다 싶으셨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이 지호가 일진인 줄 알고 거리를 뒀었으니까 뭐. 그래봤자 그 당시 우지호는 키만 컸지 그냥 애랑 다를 바 없었다.  

입 짧은 녀석이 끼니 거를까봐 이모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점심시간이면 튀려는 녀석을 자리에 앉혀 밥 먹이는 게 하루 일과였으니 다른 말로 여전히 나는 보모였다. 무서워 보이는 녀석을 내가 등 때려가면서 밥 먹이는 걸 애들은 꽤나 신기해했다. 처음 녀석의 입에서 "나 이거 먹기 싫긔." 하는 말이 나왔을 때, 반 전체에 감돌던 어색한 정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때 내 짝이었던 효린이는 밥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려서 한 참을 켁켁 거렸었다. 우지호가 눈치도 없이 계속 이거 싫고 저거 싫다고 찡얼거려서, 조용히 하고 밥이나 처먹으라 했더니, "왜 나 때메 디티고 힘드러?"라고 눈을 똥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 때(아놔!) 반 애들의 경악이란! 구석구석에서 풉, 풉 하는 웃음소리가 군데군데 터지는가 싶더니 반 애들 전체가 숨이 넘어가라 웃어재꼈다. 교실 가득 돌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수그러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우지호는 반의 중심이 되었다. 


 

 

남자애들이랑 유독 사이가 좋았던 우지호는 장난꾸러기 악동 같았다. 악동 녀석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곁을 내주는 성격이라 남녀, 선생님들 할 것 없이 -제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다 제 편으로 만들었다. 1학년 때 우리 반이 정말 특별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단결력이 좋았던 것은 그 중심엔 항상 우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지호가 빙구 짓을 해도 단련되어 익숙했지만, 아이들은 우지호가 생긴 것과 다르게 노는 게 참 신기했는지 꽤나 즐거워했다. 1학년, 그때까진 그래도 참 좋았는데....  


 

 

2학년. 우지호는 갑자기 전교 스타가 되었다. 


 

 

우지호가 밤마다 방에 틀어박혀 랩을 했다. 내 창문 건너가 우지호 방인데 밤이고 낮이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통에 살 수가 없었다. 녀석과 베프 패거리 몇 명은 매일 수군대며 정글이 어쩌고저쩌고 오늘도 올리네 마네 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안 그래도 청산유수 말 잘하는 녀석인데, 거기에 랩 한답시고 주구장창 떠들고, 라임? 펀치라인? 아무튼 그런 연습한답시고 말 같지도 않은 드립 치는 걸 받아주는 게 진심으로 힘들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고, 안 그래도 기고만장한 우지호 앞마당에 유전이 터진 건 2학년 5월 15일이었다.  

우지호는 조회 때 단상에 올라 교장선생님으로 부터 미술 실기대회 대상 수여 메달을 받았다.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우지호가 미술 시작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대회에서 1등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슬슬 시선이 바뀌는가 싶더니 우지호가 바로 결승타를 날렸다. 바로 30분 뒤 스승의 날 행사에서 우지호랑 그 패거리가 체육관 강단 무대에서 빠르고 강한 -솔직히 시끄러운 랩을 뱉어내자 엄청난 환호성이 “우와아” 한꺼번에 터졌다. 그날 전교생이 손을 들고 우지호를 외치며 환호했고, 반 친구들은 우지호 저 새끼 진심 천재 아니냐며 추켜세웠다.  


 

 

"천재는 무슨! 그냥 저건 똘끼 충만이야. 저 또라이 미쳤어."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었다면 옆 반 여자아이들의 시선에서 위험을 감지했어야 했다. 결국 우지호가 변성기를 끝내던 날, 녀석은 나에게 악마의 씨앗이 되었다. 그 무렵 전쟁 같던 하루하루는 중학교 때 분량까지 이자를 곱절로 치고 돌아와 지긋지긋했다. 하필, 녀석은 그렇게 여자들이 좋아하는 목소리를 탑재하게 되었을까. 키는 왜 자꾸 자라서 180을 훌쩍 넘겼을까. 왜 나는 녀석의 옆집에 살고, 유일하게 곁을 내주는 소꿉친구라서 그 많은 시기와 질투가 섞인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었을까.  

집단은 양심이 없고 고딩은 정도가 없으니, 가끔은 범죄에 근접한 행동들까지 아이들은 수위 조절을 몰랐다. 그나마 내 성격도 만만찮고 곁에 효린이랑 리지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나는 그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일만은 못 잊겠다. 얄미운 우지호.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우지호. 내 곁에 다가오던 그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에겐 당연하게 ‘우지호'라는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애 남자애를 가리지 않는, 사람 자체를 경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남친도 피해 가지 않은 아주 강력한....... 


 

 

하품이 나온다. 보기 민망하다.  


 

 

아, 이것은 내 휴대폰 벨소리지 그 일과는 상관이 없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잘됐네. 


 

 

"응. 리지야." 

"모해? 오늘 어땠어 자기야? 고백했어?" 

"어헝-, 리지야. 히잉..." 

"왜? 왜 우는데? 지훈이 그 시끼가 니 싫다드나?"  


 

 

리지는 고1 때 부산에서 전학 왔는데 당황하거나 화가 나면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를 쓰는 아주 의리 돋는 내 친구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걔한테 고백받.....았어......" 

"뭐? 설마 또 빙시같이 도망 나온 거 아니재?" 

"아니." 

"......." 

"....응" 

"하아, 가시나 니 그거 병이다 문디야. 에휴.... 나와. 안 그래도 술 고파서 전화했다. 효린이도 불러야겠네." 


 

 

역시 여자 친구들이 최고! 전화를 끊고 패딩을 챙기러 다시 집으로 들어갔더니 우지호가 아직도 내 방에서 천연덕스레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아주 바닥을 핥아라, 그냥. 그대로 없는 사람 취급하며 옷만 들고 발길을 돌렸다.  


 

 

"야, 어딜 또 나가? 혼자 그러고 있어봐야 좋을 거 없어. 또 니탓이네 내탓이네 하면서 땅 파지 말고 나랑 밤새 게임이나 하면서 잊지 그냥?" 

"됐거든? 관심 좀 제발 넣어둬. 나 지금 나가봐야 하니까 너도 주인 없는 방에서 좀 나가라." 


 

 

팽하니 돌아서는데 뒤에서 손목을 잡아챈다. 아프잖아.  


 

 

"어디 가는데? 뭐야 그 새끼가 다시 보재? 하아 그 새낀 배알도 없나." 

"지훈이가 왜 니 새끼야?!" 

"어쭈. 차고 온 주제에 편드냐?" 

"차긴 누가 차! 아직 안 끝났다고 했지 내가! 이번엔 나도 달라. 절대 안 숨어! 안 도망가!" 

".....달..라? 뭐가?" 


 

 

왜 저렇게 쳐다봐. 양심 찔리게. 물론 아직 달라진 건 없지만 내 편들한테 응원 받고 교정도 좀 받고 하면 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안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이십대 꽃 청춘을 절대 이렇게 보내진 않을 거야 네-버! Never! 


 

 

"이 누나가 반드시 솔로탈출해서 니 앞에서 닭털 제대로 푸덕거려 주마. 난 니 행태에 질려서 만나면 아주 오-래 진지하게 사귈 거야. 암튼 나갈 때 불 끄고 나가주셔 꼭." 

"......김여주." 

"얼렁 이거 놔. 야, 얘가 왜 이래 진짜." 


 

 

우지호가 말없이 노려만 본다. 어쩌자고. 음, 방금 허세 티 났.......니? 하여튼 눈치는. 더 이상 있다간 거짓말 탄로 날 것 같아 손목을 탁 쳐내고 문을 여는데 이번엔 패딩 모자가 붙잡혔다. 컥. 한껏 눈을 부라리며 째려보니 제 마른 입술을 잘근거리고 혀로 훔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쯧 물도 없이 그 달디 단 케이크를 잘도 퍼먹더라니.  


 

 

"너...그....여자애가 지금 몇 신데 나간다는 거야! 10시야 미쳤어? 하 씨발 그 새낀 자존심도 없어. 병신 새끼. 그거 수상한 새끼네 아주. 안 되겠다 나도 가." 

"어? 아니....야, 거기가 어디라고 가 니가!" 

"왜? 왜 안 되는데?" 

"그야 할 말도..에, 또..그니까 둘이" 

"둘이?“  

“어.......” 

“......뭘 할려고 씨발!" 


 

 

헉. 놀래라. 아니 이게 어따 대고 욕이야! 둘러댈 말이 없어 조용히 문고리를 돌리는데 우지호가 거칠게 다시 닫았다.  


 

 

"아 우죠. 뭔 상관이야!" 

"너 진짜!" 


 

 

우지호는 이 말을 싫어한다. 남매처럼 자라서 그런지 저 말에 상처를 받아 했다. 녀석의 속을 긁을 요량으로 일부러 쓸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상처받는 얼굴이라 미안해서 나도 가급적 피하는 말이다. 가끔은 저 상처받은 얼굴에 내가 약하니까 일부러 연기할 때도 있어서, 혹시나 싶어 살폈더니 지금은 진짜 같았다. 

하아, 또 지고 만다. 그냥 안 넘어가는 집요한 녀석은 지훈이의 자존심은 걱정해도 내 자존심을 존중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만나러 가." 

"뭐? 만나서 뭐?!" 

"아니! 리....만난다고." 

"똑바로 말 안 해?!" 

"아, 리지 만나러 간다고오!!" 

".....리지?" 


 

 

 

우지호가 의심스런 표정을 짓다 거짓말하다 벌게진 내 얼굴을 보고는 어이없어 했다. 잠시 양 허리를 짚고 고개 숙여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리고는 배를 잡고 웃어대는데, 쯧 아주 숨넘어가겠네, 나쁜 새끼. 22살이 되도록 클 줄 모르는 자식. 열 받아서 그대로 정강이를 차주고 돌아섰다.  


 

 

"야, 진짜야? 엉? 그럼 리지 만나서 술 마시게? 같이 가. 기분도 좀 갠춘하고 홍대 공연비 들어온 거 있는데 오빠가 쏠까?" 


 

 

낄 데 안 낄 데 분간도 못하는 자식이다. 내가 왜 가는 줄 진짜 몰라 저러는 거겠지.  


 

 

"안 가는 게 좋을 걸?" 

"뭐? 왜? 설마 실연이라고 통곡하게? 에이 그깟 게 무슨 실연이야. 그런 축에도 못 껴 네 풋사랑 놀음은." 


 

 

이런 개새. 내가 하는 건 다 아니라지. 늘 내가 하는 사랑을 하찮다, 그건 사랑도 아니라 말하고 바닥까지 낮춰서 폄하한다.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아니, 효린이 온 댔거든." 

"........" 

"왜? 니 첫사랑 얼굴 간만에 볼람 가시고." 


 

 

우지호는 효린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다. 고 2때 우지호는 나와 효린이를 늘 비교하면서 효린이는 스스로를 참 잘 가꾸는 게 네가 봐도 예쁘지 않냐, 넌 쟤처럼 가꾸고 싶은 욕구가 안 드냐, 성숙한 애 옆에 있으니 더 미성숙해 보이니까 못난아 빨리 좀 커라 등등, 온갖 효린이 칭찬을 가장한 나를 향한 디스를 날렸다. 나날이 그게 심해지는 게 힘들어서 아하 그렇군, 다리를 놔줬다.  

효린이가 우지호 타입임을 지극히 잘 아는 나는 몰래 카페 스벅으로 녀석을 불렀다. 뭔 카페냐? 무슨 안 하던 짓이냐 하면서도 뭘 아는지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며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녀석이었다. 빨리 말해보라며 발을 떠는 게 보기싫어 두 말 않고 효린이를 불러 이제 둘이 알아서 좀 잘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자리 만들어주고 뒤로 내빼는 걸 멍하니, 아니다 내가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뒤통수가 뚫어져라 노려보던 녀석을 지금도 기억한다. 좋아하는 걸 다 아는데 웃겼다. 꼴에 로맨티스트라고 뭐 따로 고백이라도 준비하고 있었나보지? 그 후 어찌나 코앞에서 닭살을 떠는지 아주 눈 꼴 시어서 죽는 줄 알았다. 둘이서 주춤거리다가도 나만 보면 일부러 더 그러는 거 같아서 솔직히 보기도 싫었다. 솔로 염장을 그렇게 지르나. 


 

 

그래 놓곤 주제도 모르고 내 친구를 울고불고 하게 해? 내가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둘을 도와 사귀게 해줬으면 행복하게 잘 살았어야지 바람을 펴? 효린이 달래고 우지호 신나게 두들겨 팼던 게 벌써 5년 전 일이었다. 하필 내 인생 유일한 남친이었던 녀석-그 X새끼- 사귄지 겨우 2일 째, 지금이야 생각도 싫지만 아무튼 당시로서는 정말 행복하던 시기에 들은 말이라서 더 화가 나 분을 터트렸다. X가 지호랑 같은 힙합동아리 선배고 서로 얼굴도 다 아니까 언제 한 번 더블데이트 하면서 같이 놀고 싶다고 해서, 듣고보니 재밌을 거 같아서 나도 아닌 척 기대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우지호 녀석의 가벼운 변심에 너무 화가 나서, 우죠 너 대체 왜 그러냐고, 꽁냥질하며 잘 사귀더니만 갑자기 왜 그러냐고 미친듯이 쏘아붙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는 효린이를 좋아할 수도 사귈 수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너무 한다는 듯 늘상 짓는 상처받은 눈으로, 다른 사람 상처만 보이고 자기 힘든 건 안 보이냐고, 이제 너 그러는 거 지겹고 지치니까 그만하라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 지는 늘 하는 잔소리 난 겨우 한마디 했는데 지겹다니 세상에!  

거기까진 괜찮았다. 앞으로 절대 다른 애들 편지 전해주지도 말고 소개도 시키지 말라는 말에 대번에 꼭지가 돌았다. 누군 그런 일이 좋아서 한 줄 아시나! 등교하면 서랍에 쌓인 게 전해달라는 편지랑 선물이었다. 교내 퀸 효린이랑 사귀어서 그런 것도 줄어든 게 사실이라 앞으로  벌어질 일로 눈앞이 솔직히 캄캄했었다. 다행히 그 후 우지호가 여자를 계속 바꾸고 직접 고백하면 다 받아준다는 소문이 돌아서 나한테 부탁하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그땐 왠지 모르게 그게 또 은근 속이 뒤틀리기도 했던 것 같은데..... 


 

 

"효린인 점점 예뻐진다. 니 두 눈은 가죽이 남아 뚫은 장식이니? 나 같으면 아까워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다. 이 멍청아." 

"웃기네. 너처럼 둔녀는 전쟁이 나도 몰라. 그런 건." 

"뭐? 말 다했어 너?" 

"니가 하는 그 소꿉장난을 짝사랑이라 착각하는 것부터가 NG야. 그 감정.....넌 평생 가도 몰라." 


 

 

에이....... 나 갈란다. 술은 적당히 마셔. 너 술 먹고 돌아다니는 거 동네 소문난다. 갑자기 기운 빠진 우지호가 먼저 방문을 나서면서도 끝까지 잔소리를 했다.  


 

 

웃기네. 저는 그 감정 그렇게 잘 알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가 바뀌냐? 녀석이 연애 100일을 채우는 걸 본 적이 없다. 한번은 집에서 로맨틱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기념일 챙기는 장면이 나와서 키득거리며 말했었다. 우죠 너 진득하니 여친 사겨서 100일 맞이하면 이 누나가 그날을 기념해 통 크게 축하해 준다고 했더니, 미쳤냐고 내가 받을 게 없어서 너한테 축하를 받냐며 이죽거렸다. 영화 존나 재미없다고 돌리려는 녀석에게, 뭐 혹시 내 100일 때 내가 덤탱이 씌울까 그러는가 본데 난 큰 거 안 바라고 작은, 아주 작은, 예를 들면 호텔 숙박권 같은 거? 라고 했다가 녀석이 갑자기 리모콘을 바닥에 던져버리는 바람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행여나 그런 생각 하지도 말라고, 그랬다가는 그 새끼 잡아다가 아주 반 죽여 버릴 거라고 어찌나 생난리를 치는지 부서진 리모콘에 대해선 따질 생각도 못했다. 덕분에 엄마한테 나만 엄청 혼났었다. 성격 지랄 맞은 자식. 내가 지 여동생이야 뭐야. 어릴 때는 그나마 귀여웠는데 클수록 삐딱한 것이 진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툴툴거리며 대문을 나서는데 익숙한 등짝이 보여 경계부터 했다. 우지호 녀석이 끝까지 쿠사리 먹일 생각으로 대문밖에 버티고 서있는 거 같았다. 또 무슨 잔소리가 남아서 저러고 있는 거야. 피곤했다. 


 

 

“야, 너 또 뭐?......어?” 


 

 

지호가 노려보고 있는 곳으로 자연스레 눈이 따라갔다. 지호가 째려보던 말 던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지훈이 내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담배를 든 손과 두 볼이 빨갛게 얼어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안 갔던 모양인지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뜯은 흔적도 보였다. 나를 어설프게 반기는 다른 한 손에는 누를까 말까 망설이느라 꺼질 줄 모르는 휴대폰이, 긴장감 때문인지 손 끝이 하얗게 질린 그 손아귀 안에 쥐어져 있었다. 놀란 내 눈이 지호와 지훈, 그리고 그 주변을 정신없이 오가다가 어지러운 바닥에 정착했다. 지훈의 발 아래에 언제부터 피웠는지 헤아릴 수 정도의 담배꽁초가 쌓여있었다. 잘근잘근 씹힌 담배 끝자락에서, 기다렸던 나를 보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달싹 이는 그의 입술에서 온갖 초조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초조한 지훈의 마음이 내게 와 닿자이상하게 내 마음에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그 짓을 하고 뛰쳐나왔는데 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넌 혹시 다른....거니? 가슴이 뭉클해서 나도 모르게 가슴자락을 움켜쥐었다. 뭔가 정말로, 아까 우지호에게 허세로 욱해서 뱉은 말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미칠듯이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혹시 다르려나? 나 드디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건가? 그걸 지훈이 너한테 기대해도 되는 거야?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한 걸음씩 옮길수록 녹는 것 같았다.  


 

 

“안 돼.” 


 

 

우지호가 아까처럼 또 손을 잡아왔는데 그 아귀 힘이 강해서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놀라 혹시 오해할 지도 모를 지훈을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젓고 있는데 우지호가 그런 나를 다시 한 번 강하게 돌려세워 답답했다. 우지호 너 미쳤어? 제발 상황 분간 좀........!  


 

지호야 너 왜 그래? 이상해. 너 그렇게 보는 거 이상한 거 잖.....아. 


 

우지호가 효린이를 좋아할 수도 사귈 수도 없다고 말하던 그날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만해 여주야. 지겹다는 듯한 어투로 우지호가 말했다. 니 뒤에 서 있는 거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이러는 너 때문에 더 이상 지치는 것도 힘들어 미칠 것만 같다고 내 어깨를 잡고는 앞뒤로 흔들었다. 지훈이 놀라 다가오는 걸 보고는 나를 제 뒤에 숨기고는 이 새끼 너 거기서 한 발짝도 더 다가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거리가 좋은 거니까 유지하라고 갖은 성을 냈다.  


 

 

우지호 너 지금 이상해 제 정신이 아닌 거 같아 너 이럴 권리...... 나는 그 뒷말을 뱉지 못하고 목 너머 꿀꺽 삼켰다. 그래도 알아들은 녀석은 어금니를 악 물며 한 손으로 제 가슴팍을 몇 번이나 쾅쾅 내리쳤다. 아파 보이는데도 내가 하는 말이 더 아프다고 사정없이 앞자락을 쥐어 뜯었다. 우지호의 하얀 눈 아래가 붉게 물드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었을까. 고개를 돌려 한 숨을 쉰 녀석은 그대로 내 손을 꽉 움켜쥐고 대문을 열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지호를 있는 힘껏 떼어냈다. 저러는 녀석이 이상하고 무섭기만 했다.  


 

너 같지 않게 왜 그러는 거야. 이 상황을 나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그러는 건지 무서워 뒷걸음질만 쳤다. 다리 힘이 풀리려는 걸 뒤에서 지훈이 잡아왔다. 어깨에 놓인 손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마지막 구명줄 마냥 그 손을 꼭 움켜쥐었다. 쓰러져서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아. 


 

 

지호가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럽다. 아니다 갑작스럽지 않다. 처음 아는 사실인데 결국 벌어진 일 같아서 나 스스로가 충격을 먹었다. 오늘 나는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일들만 가득 할까, 우지호 내가 그 손을 잡으면? 제일 못 잡을 손이 네 손인데도 미치도록 잡고 싶어 탐이 났다. 무의식 중에 한 손을 뻗던 나는 우지호의 손을 잡지 못하고 제발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저지했다. 손가락을 활짝 펴 너를 부정하는 내 손이 가냘프게 떨리는 게 온 몸으로 느껴져서, 어지럽게 흘러가는 이 모든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어서, 혹시나 나도 모를 말을 뱉어낼까봐 두려워서 다른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나는 고개만 흔들었다.  


 

 

미쳤어 우지호. 너 지금 나한테 뭘 들키려는 거야?! 내 속에서 뭘 끌어내려고 지금 이러는 거야! 


 

 

상황파악이란 것도 어느 정도의 정신과 상식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심신이 지쳤다. 그냥 이대로 누워 자고 싶은데 대문 앞에 버티고 선 지호 때문에 그러질 못하고 다만 이 상황에서 도망가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에 지훈이의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우지호의 외침이 늦은 밤 골목길에 슬프게 울렸다. 몇 번이나 내 이름만 부르는 그 목소리에서 도망가기 위해 미친듯이 달렸다. 뛰고 있는 발걸음이 공중에 붕 뜬 것처럼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이상하기만 하고 심장도 내것이 아닌 것처럼 이상한 박자로 거칠게 뛰었다. 나를 찾아 온 지훈이가 고맙고 드디어 사랑할 것 같은 마음과 지난날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분으로 충만한데,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 얼굴을 덮으며 흐르는 눈물은 지칠 줄 몰랐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찬바람에 닿아 얼어가는 속도를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방금 깨달아버린 내 마음처럼 불안하게 아래로 자꾸만 떨어지다 흩날리고 갈필을 못 잡았다.  


 


 


 


 


 


 


 


 


 


 


 


 

[블락비/빙의글/우지호&표지훈] 소꿉친구 | 인스티즈 

illustrated by 멀티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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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서 드디어 지코님이 멀티해 지시네요. 그래서 여주는 누구랑?? 

뒷편은 쓰고 싶으나 뭐 없어도 될 듯도 하고. 

매일 팬픽만 쓰다보니 여주가 거...거치네요. 언어 순화가 안 돼ㅠㅠ  

아마 소꿉친구라 그런 가 보죠?(모른척) 


 

저 진짜 오랜만에 그림도 봤어요. 지호님은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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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흐헐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뒷편이 궁금하긴 한데 지금도 좋은거 같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
작가님 짱!!

10년 전
멀티지코
으아 덧글이다!!! 감사ㅜㅜ 제가 좀 글을 취향타게 써서 늘 첫 덧글이 제일 궁금해요ㅜㅜ 감사합니다~ 급히 써서 올린 티가 좀 많이 나서 부끄럽네요ㅜㅜ
10년 전
독자2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련하냐 왜케 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지호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지훈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으어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3
아........여ㅕ운남게 그냥 끝나니까 묘한 매력이 있넹ㅅ. 그래도 뒷편은 보고 싶다
10년 전
독자4
진짜 엄청 짱 가벼운 분위기로여..
10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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