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사이사이마다
17
커튼 사이로 어느새 익숙해진 스페인의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아침이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순간,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감히 이렇게 그를 사랑해도 될까. 하는 걱정 어린 마음들이 피어났지만, 잠에서 깬 그가 나를 향해 묻는 물음에 모든 걱정이 달아났다.
"깼어?"
"응"
"잘 잤고?"
"그것도 응"
그는 내 대답에 살풋 웃더니, 내 머리 위로 제 턱을 올리고는 말했다. '그럼 됐어.' 하고. 그의 울림이 내게도 전해졌다.
**
평범한 주말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그와 침대에서 한참을 장난치느라 늦어버린 시간도 좋았다. 거실의 커튼은 창문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연신 일렁였다. 얇고 흰 커튼이 일정하지 않게 흔들리는 모습이 꽤 예뻤다. 나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제 막 씻고 나온 그에게 나 좀 보라고 외치고는 커튼 뒤로 몸을 감췄다. 그러자 흰 커튼 앞으로 불투명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일렁이는 커튼 너머의 나를 바라보다, 힘없이 웃고는 제 핸드폰을 들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커튼 사이로 얼굴을 살짝 내비치며 물었다.
"뭐해?"
"예쁜 짓 해봐."
"갑자기?"
"응. 사진 찍게."
"화장도 안 했는데 무슨 사진이야!"
"괜찮아. 빨리."
"...아. 안 되는데..."
"자. 탄소. 예쁜 짓."
결국 그의 말에 넘어간 나는 커튼 사이로 얼굴만 빼꼼 내민 채로, 검지 손가락으로 내 볼을 푹 찔렀다. 그러자 그는 사진을 찍음과 동시에 크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씨.
"...내가 그래서 안 한다고 했잖아!"
나는 내 투정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 그가 미워, 커튼 밖에 내밀었던 얼굴도 집어넣고는 커튼 뒤로 완벽히 몸을 감췄다. 커튼 뒤에 쪼그려 앉은 나는 커튼 너머의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미워. 진짜!
그는 잠시 뒤에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손으로 툭툭 커튼을 치며, 오지마! 오지말라고 했다. 하면서 그에게 반감을 표했다. 그러자 그는 훌쩍 내게 다가와서는 커튼을 사이에 두고 바로 내 앞에 앉았다. 얇은 천인 탓에 그의 얼굴이 제법 또렷하게 보였다.
"삐졌어?"
"삐진 게 아니고! 너가 나한테 하라고 해서 한 건데... 막 웃으니까..."
"그게 삐진 거 아니야?"
"...맞아."
그는 삐졌다는 말에 수긍하는 나를 보고도 웃음이 나오는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쭈.
"웃어?"
"...안 웃, 큼큼."
"왜 웃었는지 들어나 보자."
"뭘 왜 웃어."
"왜 웃었는데!"
"예쁘니까 웃었지."
그는 제 마지막 말을 끝으로 커튼 가까이로 제 얼굴을 가져댔다. ...예쁘니까 웃었지래.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감추려다, 커튼이 있으니 보이지 않겠지 싶어 그처럼 커튼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댔다. 얇은 커튼만을 사이에 둔 우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서로의 얼굴만 보고도 해사하게 웃기 바빴다. 그리고 그와의 눈맞춤이 꽤 간질거려,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그는 커튼을 사이에 둔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얇은 천이 더욱 야릇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야하다.' 하고는 다시 한 번 내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몇 번의 입맞춤이 오갔을까 나는 손끝이 저릿한 기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커튼을 거두고는 나를 제 쪽으로 데려간다.
"야해서 좋은데."
"..."
"키스를 못해. 쟤가 막아서."
그는 '쟤가 막아서." 라고 말하며, 방금 전 커튼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손 끝을 따라가다, 방금 전의 야릇한 감정이 상기되어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얼굴을 들킬 사이도 없이 깊이 입을 맞춰오는 그에 아득한 정신줄을 붙잡기 바빴다. 어느새 내 허리께를 지분거리는 그의 손길이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받아내며 내 손은 어디에 두어야 하나 허둥거렸는데, 맞닿은 입술에서 그의 미소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제 남은 손으로 내 두 손을 제 목 위로 둘러주었다. 잠시 입술을 떼고는, '여기에.' 하면서.
그와의 진한 입맞춤을 중단시킨 건, 그와 내가 아닌 내 휴대전화였다. 나는 벨소리에 누군가에게 지금 이 상황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리 미안해. 잠깐 회사로 와줄래?"
"왜? 무슨 일 있어?"
제이슨의 전화였다. 어느새 내 뒤에서 내 허리를 감싸고, 전화를 엿듣던 그가 수화기가 없는 내 반대편 귀에 속삭였다. '난 얘 싫어.' 하고. 나는 그의 투정에 남은 한 손으로 내 허리 위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는 내 어깨에 더욱 제 얼굴을 묻었다. 제이슨은 내 현장에서 구조했던 아이들의 리스트가 사라져 새로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내일이 아이들 입양 및 보호처를 찾아가야 하는 날이었기에 오늘까지 마무리가 되어야 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에 알았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가야 돼?"
대충 전화의 분위기로 상황을 파악한 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면 안돼?"
"같이?"
"응."
"안 될 건 없는ㄷ"
"가자. 그럼."
**
그는 회의 테이블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곁눈질을 하며 그를 몰래 훔쳐보다가, 사방에서 느껴지는 장난스러운 눈빛들에 고개를 돌렸다. 제이슨은 열두 명의 아이들 사진을 투명보드 위에 붙였다. '전부 다 네 담당이었던 아이들 맞지?' 하고. 나는 아이들의 사진을 대충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까지 자리에 앉은 후,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는 미국 본사로 보내져야 하는 자료와 영상이었기에, 영어로 진행됐다. 문득, 그가 영어를 능숙하게 해낸다는 사실이 기억나 괜히 발음이 신경쓰였다.
"저기, 가장 왼 쪽에 있는 애부터 말할게."
"응."
"준비 됐어? 레이첼?"
"물론."
"이름은 사일론. 나이는 여섯 살로 기억해. 작년이었으니까 올해는 일곱이겠지? 부모님은 두 분 다 전쟁 중에 돌아가셨고, 동생은 이송되는 중에 결국 죽었어."
"그리고 다른 특별 사항은 없어?"
"응. 거기까지. 몸은 튼튼해. 그 흔한 폐렴 증상도 없고, 바이러스 흔적도 없었어."
"그래. 그 옆에 이름은 기억나?"
"잠시만."
내가 구했던 아이들의 얼굴과 신상을 기억해내 매치시키는 일이었다. 보통 서류를 준비해 팀원들에게 전달해줄 때도 있지만, 우리 팀은 그래도 자기 담당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고자 가능한 정보들을 외우는 편이었다. 물론, 외우지 못하는 게 나쁜 건 결코 아니다. 그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외우겠는가. 하지만 나는 작년 저 일을 마지막으로 활동이 없었으니까. 기억하기 쉬웠다. 나는 사일론 옆의 아이에 관한 기억을 더듬었다. 쿤이었다. 나는 곧 바로 쿤에 대한 신상을 읊었다.
두 시간쯤 흘렀을까. 마지막 아이였다. 나는 그에게 살짝 눈빛으로 걱정스레 지루하지 않냐 물었다. 그는 내 눈빛에 별 다른 대꾸없이 회의에 집중하라며, 제 아래입술을 깨물어 보였다. 그래. 빨리, 확실하게 끝내고 그와 주변 공원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드디어 마지막. 빨리 끝내자. 러블리."
"제발. 러블리 좀 그만해줘."
"하지만 '허니'는 우리의 애칭이 아닌 걸?"
"...브리핑 시작할게."
초반보다 한껏 유해진 분위기에 팀원들이 장난을 걸어왔다. 러블리라니. 나는 그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제발 그 호칭 좀 어떻게 해달라고 전했다. 그러자 제이슨은 '허니' 가 자신들의 호칭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고 답해온다. 그리고 그들의 답 뒤로 곧 바로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붙어왔다.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 제이슨.' 나는 서둘러 브리핑을 시작했다.
"마지막 사진은 존. 나이는 아홉 살일거야. 자세한 건 서류 한 번 확인해봐. 부모님은 폭력단체에 인질로 잡혀있다가, 살해 당했어. 존한테는 그냥 행방불명이라고 했는데, 아마 눈치챘을 거야. 그때는 글자를 몰라서 기사를 못 읽었는데, 지금은 아니거든. 만약 기사 내용을 봤다면, 그만큼 우리한테 반감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커. 우리가 거짓말 했으니까. 나도 제일 마음 쓰이는 부분이고. 그니까 단체에서 접촉할 때, 주의 좀 부탁해."
"그럴게. 마음 쓰지마."
"응. 고마워."
**
"멋있었어."
"응?"
"일하는 거. 멋졌어."
"뭐야."
"그니까. 새삼 반했네."
회의가 끝나고 그와 함께 공원을 걸었다. 마주 잡은 손이 편했다. 그는 내게 일하는 모습이 멋졌다며, 제 다른 손으로 엄지를 치켜 세워 보여준다. 새삼 반했다는 말이 듣기 좋아, 살풋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근데 그렇게 많은 애들 이름을 다 어떻게 기억해?"
"음... 너는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 이름 기억 안 해?"
"기억할 만큼의 사람이 없었어."
"...아."
기억할 만큼의 사람이 없었다는 그의 답변에 순간 멈칫했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잊고 있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총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었지.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왜?"
"...나 싫어진 거... 아니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래도 한 번도. 착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힘 쓴 적 없어."
"..."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그런 인간들이었어. 내가 건들인 사람들은."
"..."
"맹세할 수 있어."
"..."
"...그니까 나한테 실망하지 말아줘."
나의 괜한 질문이 그의 평범한 지금 이 순간을 조각낸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한테. 나는 그와 마주 잡은 손을 아무렇지 않게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호석아."
"...응."
"우리는 그냥, 남자랑 여자야."
"..."
"처음에는 서로 으르렁거리기 바빴지만, 그렇다고 느리게도 아니고 빠르게도 아니고. 서로가 좋아진 사람들이야."
"..."
"내 한 마디가 너한테는 살아갈 힘이었던 때가 있었잖아. 그치?"
"...응."
"나한테는 그 한 마디가 너가 됐어."
"..."
"앞으로 살면서 어떤 힘든 순간을 만나도, 너를 생각하면 그 순간들도 다 괜찮아질 것 같아."
"..."
"나한테는 호석이가 있으니까. 이런 것쯤은 괜찮아. 뭐 이렇게?"
"..."
나는 내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를 올려봤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자 그 역시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좀 해보려고."
"뭐를?"
"이름 같은 거. 기억하기."
"대단한 거 하는데?"
"놀리지는 마. 나한테는 나름 신기한 거야."
"그런가?"
"당연하지."
"그럼 나 일 번 시켜줘!"
"그건 아니지."
"왜! 나 때문에 하는 거잖아!"
"너는 기억하는 게 아니잖아."
"그럼?"
"기억되는 거지."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다들 요즘 많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것 같아요!
수시, 중간고사, 과제, 공부. 뭐 이러한 이유들로?
저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세상 멋진 일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
멋진 일을 멋지게 해내고 있는 여러분이기를! 응원할게요. + 저도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게요...! ㅎㅅㅎ . 지민이는 다음 화나 다다음 화쯤에 등장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여러분에게도 앞으로 그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는 그런 존재 혹은 순간이 있기를.
다정한 사람들
암호닉은 계속 받아요 :)
호비요정 / 윤기윤기 / 혜융 / 쟈가워 / 슙슙 / 간장밥 / 토끼 / 뜌 / 늘봄 / 미자 / 화이트초코 / 쿄이쿄이 / 리자몽 / 태누나 / 방소 / 호비 / 고짐 / 슙기력 / 민윤기 다리털 / 뀨뀨 / 낮누 / 10041230 / 0894 / 자몽자몽 / 정꾸기냥 / 뾰로롱(하트) / 지팔 / 진진(하트) / 꽃소녀 / 무네큥 / 전정국 극성맘 / 미니꾸기 / 쭈꾸미 / 지민이바보 / 맙소사 / 야꾸 / 띠리띠리 / 모닝커피 / 토끼정 / 새벽별 / 정꾸야 / 찜빵 / 호바리 / chouchou / 또또 / 인연 / 뜌 / 쁘요 / 청록 / 고짐 / 쿡 / 달꾸 / 태누나 / 푸른 하늘 / 베네딕션 /정꾹꾹이 / 라일락 / 초딩입맛 / 서룬 / 속텅빈단팥빵 / 골드빈 / 달봉이 / 현 / 숙자 / 호호할아버지 / 새벽별 / 치즈나무 / 윈다 / 또이 / 자몽해 / 이월십일일 / 청보리청 / 0126 / 낭랑 / 둥둥 / 체셔리어 / 콧구멍 / 홍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