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모바일 (밤모드 이용시)
댓글
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김남길 몬스타엑스 이준혁 강동원 엑소 성찬
미명 전체글ll조회 1011l 3
 








친한사이
 : 타쿠야 빙의글

 

 

 

 

 

번호를 따였다. 그러니까, 낯선 남자가 내 번호를 가지고 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붙박이별처럼 멍하니 서 있자 옆에서 네가 말을 걸었다. 내가 꽤나 예뻐진 모양이라고, 그렇게. 네가 오랜만에 한 칭찬에도 그저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뻐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 남자의 전화번호는 저장하지 않았다. 태연한 척 교복 치마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고는 먼저 발을 뗐다. 오늘도 나는 거짓말을 한다. 누구에게? 너에게.

내가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오면서 너는 연신 재잘거렸다. 물론 그것의 대부분은 흔한 친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신경이 쓰였다. 조용히 너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분식점으로 들어갔다. 너는 재잘거리던 걸 뚝 끊고는 투정을 부렸다. 신경은 쓰였지만 아쉬웠다. 네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으니까.

 

 

 

 
 

“맛있는 거 사 준다더니. 매일 오고도 그렇게 맛있어서 여기까지 데려왔어?”

 

“난 너네 집만큼 잘 사는 집 딸이 아니라서. 용돈도 쥐꼬리만큼 받는데 뜯어먹을 데가 어딨다고.”

 

“내 눈엔 다 똑같은데. 여기 떡볶이가 너 눈엔 맛있어 보이는 만큼 아까 그 남자한테도 너가 예뻐 보였나 보다? 어디 내가 보는데 전화번호를 줘.”

 

“그 남자 연락 오면 다 씹을 거야. 그 남자 전화번호 저장도 안 해놨으니까 떡볶이나 먹어. 2인분만 시킨다?”

 

“아, 2인분 가지고 뭐 먹으려고. 3인분 시켜, 3인분.”

 

“그럼 1인분 값은 네가 내는 걸로. 아줌마! 여기 떡볶이 3인분이요!”

 

 

 



 

 

심통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네 얼굴을 피해 주문을 넣었다. 물론 너는 늘 사 먹었던 대로 스테이크라던가 파스타 같은 비싼 음식들을 상상하면서 왔을 것이 분명했다. 나 역시 마음 같아선 너를 데리고 유명한 맛집은 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괜히 미안함을 느끼며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어색하다며 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전처럼 네 의미 없는 장난들에 다 반응하고, 시원하게 욕도 할 수 있는 그런 친한 사이였다면 지금의 어색함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 모든 일들은 다 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물 컵 두 잔에 물을 따르며 네가 중얼거렸다.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당장에라도 "응, 너 좋아해."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영영 보지 못할까 봐 말을 아꼈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타쿠야.

떡볶이가 나왔다. 그 특유의 빨간 색깔을 보자마자 네가 입맛을 다시며 떡을 하나 집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나 보다. 3인분 시키라던 이유가 있었네. 연신 맛있다는 감탄사를 붙여가며, 너는 떡볶이 먹는 데에 집중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떡볶이에도 밀려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널 보는 게 행복했다.

 

 

 

 


 

“야, 넌 안 먹어?”

 

“…네가 그렇게 다 먹는데 내가 어떻게 끼어들어. 그냥 너 먹고 남은 것 먹거나, 안 남으면 더 시켜 먹거나 하지 뭐.”

 

“우리 엄마랑 똑같은 말하네. 내가 그렇게 잘 먹나.”

 

“말이라고 하냐? 어쨌든 먹어. 너 다 먹고 남은 걸 처리하는 날 보면서 네 엄마한테나 감사하라고.”

 

 

 


 

 

킥킥 웃으면서 집었던 떡을 나한테 들이미는 걸 거절했다. 눈을 땡그랗게 뜨고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는 널 보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그걸 받아먹고 난 다음에 이렇게나마 행동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빨개져선 널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한눈에 봐도 배고프다는 표정을 한 너는 배를 두드려가며 나에게 떡볶이 접시를 내밀었다. 평소 식사량을 아는 내가 째려볼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는 나에게 떡볶이 접시를 내밀었다.

다 먹지 왜 남겼냐고 묻는 나를 피하는 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떡을 집어먹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를 좋아한 기간만큼 눈물을 흘린다면 그때는 나를 봐줄 수 있을까, 물론 아니겠지. 억지로 떡을 밀어 넣었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고 울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먹먹해지는 가슴만이 나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많은 걸 벌써 다 먹었어? 돼지.”

 

“너 혼자 2.5인분은 처먹고 준 거잖아.”

 

“네가 먹으라며! 그리고, 여자애가 말이 저렇게 험해선 나중에 남자친구나 제대로 사귈 수 있으려나 몰라. 어?”


 

 

 

 

 

네가 날 이해해주면 되잖아. 날 알아주면 되잖아. 너만 날 봐주면 되는데, 왜 그게 안 돼. 왠지 모를 억울함이 솟아올랐다. 단숨에 물 한 컵을 비우고 너에게 염치없는 손을 내밀었다. 한참을 쳐다만 보던 네 눈앞에서 손을 두어 번 흔들자 그제야 작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이천 원을 내 손에 올려주었다. 2인분 가격이었다. 고개를 들어 너를 쳐다보자 턱을 치켜 올리며 계산을 하란다. 천 원을 돌려주려고 하자 에헤, 하고 어른 흉내를 내며 발로 다리를 미는 게 아닌가. 나도 내 나름대로 너를 향해 반항을 시도하다가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의자 앞이 붕 뜨더니 머리로 큰 충격이 전해졌다. 어질어질한 느낌에 눈을 뜨자 네가 급히 이쪽으로 넘어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정말로,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비단 머리의 아픔뿐이 아니었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펑펑 우는 나대신 계산을 하고 급히 짐을 챙긴 너는 그대로 나를 끌고 나왔다. 여전히 울고 있는 내 머리를 문질러주며 너는 중얼거렸다.

 

 

 

 


 

“아 씨, 그러게 왜 밀고 그랬냐고. 많이 아파? 지금 병원 갈까?”

 

 


 

 

 

사실 머리 같은 건 하나도 안 아프다. 병원도 필요 없다. 나는 너 때문에 아픈 거고, 네가 필요할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너를 향한 고백을 목구멍 뒤로 넘기는 일이란 걸 너는 알까? 몰라야만 한다. 나는 너에게 내 감정을 털어놓는 것보다 우리가 멀어지는 게 더 싫으니까, 너는 몰라야 한다.

 


 

웃자고 온 분식집인데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고 말았다. 엉망진창이었다. 괜히 미안해져서 너를 쳐다보았다. 너는 너대로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는지 전화를 끊고는 나에게 말했다. "…미안. 지금 부원 하나가 말썽을 피워서 다시 학교로 가야 할 것 같다. 먼저 가." 나는 그냥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인지 너는 다급한 뒷모습으로 멀어져 갔다. 속상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속상했다. 괜히 그 부원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말썽을 피워, 피우긴.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너 없을 땐 혼자서 잘만 걸어 다니던 길이었는데도 멀기만 멀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쓸쓸한 감정은 나 하나만 느끼는 걸로 족했다. 아무한테도 이 짐을 같이 짊어지자고 할 수 없었다. 이건 내 감정과 어린 날의 실수에서 초래된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너 덕분에 철이 빨리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너 없이 살아가다 뜬금없이 너한테 반해서 고백하고 멀어지게 된다면 그게 더 힘들었을 것이었다. 너를 만난 게,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든 게 너무 다행이었다.

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몇 번 만지작거렸다. 며칠째 대화가 끊겨 있는 너와의 대화 방을 보다가 결국 다시 홀드 키를 눌렀다. 온통 까만 액정을 흘겨보곤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었다. 조금이라도 네 목소리를 더 들어볼 걸, 핀잔주지 말걸. 그렇게 후회해 봤자 너는 지금 곁에 없고, 나는 네가 있는 곳에서 조금씩 멀어져가는 중이니까. 춥다. 후드 집업을 더 세게 여몄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만족할 수 없었다. 너와 하루 종일 붙어있을 수 없으니까.

 

 

 


 

 

“…여보세요.”

 

어, 나. 잘 들어갔냐?

 

“아니, 가는 중. 너는 문제 잘 풀렸어? 단순한 건 아닌 것 같던데.”

 

최악이야, 진짜. 애새낄 하나 패 놔가지고 자칫하면 동아리 폐쇄될 것 같아.

 

“너희 동아리 안 그래도 인식 별로잖아. 어떡해?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너한테까진 손 벌리고 싶지 않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보자.

 

 


 

 

 

침울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너는, 그리고 감히 네 전부라고 칭하는 동아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손톱을 깨물었다. 내가 도울 방법은 없을까.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가 누웠다. 벗지 않은 교복 천이 맨살에 닿았다. 썩 좋지는 않은 느낌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당장 자라고 하면 잘 수 있을 만큼 피곤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아마 이대로 너의 동아리가 없어진다면, 넌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망가질 것이다. 내가 너한테 하는 것만큼이나 동아리에 다 퍼주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게 너였기에, 꼭 그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 너였기에 나는 그 동아리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어쩌지, 어쩌지 하는 걸로 결론이 날 리가 없었다. 손을 뻗어 책상 서랍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등을 켜고 엎드렸다. 간략한 상황 정리를 하자면 부원 중 하나가 학교 내에서 폭력을 휘둘렀고, 교장과 학생회는 그걸 명분 삼아 평소 눈엣가시였던 동아리를 폐쇄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

이렇게 된 이상 건의사항이라든가 그런 걸로는 막지 못한다. 네가 흘릴 눈물을 막을 수 없다. 내가 짜낼 수 있는 계획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학교에서 영향력 있는 쪽이거나 연줄이 높은 곳에 닿아 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참담한 심정에 관자놀이를 누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일단 내일 너와 너희 동아리 부원들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세를 고쳐 누웠다. 아무 생각 말고 잠이나 자야지 안 되겠다.


 

 

여느 날처럼 일찍이 일어나 가방을 챙기는 중이었다. 난데없이 울리는 핸드폰에 깜짝 놀라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너였다. 웬만하면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이 없던 너였기에 오히려 조금 설레면서도 걱정이 되는 마음이 컸다. 조심스럽게 받아든 전화는 받자마자 툭 끊겼다. 적잖이 실망하며 애꿎은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가방을 메던 와중에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라는 걸 반 확신하며 집어 든 전화기에는 네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였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아, 그 남자구나. 별 감흥 없는 내용에 나중에 답해도 되겠지 싶어서 그냥 핸드폰을 들고 방을 나섰다.

기차게 대문을 열고 아스팔트에 올라섰다. 몸이 축 처졌다. 온통 까맣기만 한 바닥은 내게 있어 '길'의 의미보다는 '절망'의 의미가 더 컸다. 오늘 아침은 네가 마중 나오지 않을 거란 걸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 예민할 줄은 몰랐다. 계속 걸어 학교 정문을 통과하면서도 내 머릿속은 너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모든 게 끝날 텐데, 그전에는 어떻게라도 손을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처져 있어?”

 

“어, 어? 나? 아…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웬일이니, 네가 고민도 다 하고. 무슨 일인데? 설마 또 타쿠야?”

 

“무슨, 아니야. 동아리 때문에 좀 일이 있다니까.”

 

“그 동아리도 타쿠야 때문에 들어갔잖아.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었던 건데, 너희 둘이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뭘 사귀어. 그냥 친한 사이야.”

 

 

 

 


 

그러게, 정말 사귀는 사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름도 뭔지 가물가물한 짝지가 말을 거는 걸 보면 너의 동아리 일이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가방을 의자에 걸고 교과서를 꺼내 올려놓았다. 오늘따라 정말 공부하기 싫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창문 너머에서 나오라는 듯 손짓하는 네가 보였다. 네 표정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의구심을 품을 만큼 가관이었다.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복도를 향했다. 내가 나가자마자 안 그래도 가관이던 표정을 잔뜩 찌푸려 보이며, 너는 내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네 표정을 보고 나니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질 뿐이었다.

네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예상대로 동아리 방이었다. 낡은 문에 어설프게 붙어 있는 종이 위 '댄스부', 그 세 글자가 오늘따라 지저분해 보였다. 다소 거친 동작으로 문을 연 너는 나를 먼저 동방으로 들여보냈다.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있던 부원 여럿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다수는 아무 반응 없었지만 유독 하나가 죄진 표정으로 고개를 더욱 숙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아이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먹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아이가 왜, 어째서 폭력을 휘둘렀는지. 그것이었다.









 

 

 

 

 


“왜, 때린 거야?”




“…알 거 없잖아요. 동아리 부원도 아니면서.”




“이 새끼가, 말 똑바로 안 해?”




“참아, 타쿠야. 그리고 너,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대로 끝이야. 너한테는 이 동아리가 별거 아니겠지만 지금껏 혼자서 여기까지 끌어올린 타쿠야 생각은 안 해?”








 

 


 

 

 


격앙되어가는 감정 속에서 나머지 부원 둘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알고 싶어요?" 계속 묵묵부답이던 그 녀석이 물었다.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이 정적에서 나머지를 구원하려는 듯 희미하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살았다는 듯 환희의 표정을 짓던 나머지는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를 하고는 도망쳐 버렸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 했다. 너 역시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한 것처럼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으며 자리를 떴다. 나도 이만 나가려고 몸을 돌린 그 찰나에, 녀석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점심시간에 여기로 와요.”








 

 

 

 


 

이 상황에서 저 말에 해당되는 사람은 나와 녀석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방 문을 닫았다. 녀석이야 알아서 가겠지.



텅텅 빈 공책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종일 너에 관한 생각만 하다가 결국 시험을 앞두고 수업을 네 시간이나 날리고 말았다. 밥맛도 별로 없어서 받은 급식을 거의 다 버리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지하에 있는 급식 실에서 한 층을 올라가자마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새의 너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눈치도 못 채는 걸 보니 아주 애타는 모양이었다. 결국 팔로 툭 건드리자 그제야 화닥닥 놀라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괜히 킥킥거리며 웃어 보이곤 누굴 기다리느냐고 물었다.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나 보다. 순식간에 씁쓸해지는 마음에 돌아서려고 하자 내 팔을 붙잡았다. 조금 짜증이 나려는 걸 뒤로하고 네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는 쑥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애 기다리는데… 혼자 있기 부끄러워서…" 아직 누군지도 모를 그 아이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창피하고, 비참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네 옆에 서 있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왜 너는 먼 곳을 보니. 그냥 돌아서란 말이야. 그러면 내가 거기 있는데. 왜 그걸 못해. 속상하고 억울했다. 내가 그 아이보다 뭐가 안 좋은 걸까. 오도 가도 못하고 그렇게 붙들려 서 있는데 네가 갑자기 손을 쳐들고 흔들었다. 눈치껏 붙들려 있던 팔을 빼고 그쪽을 쳐다보자 그쪽에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아이는 예의 내 짝지였다. 내 옆에 앉아 같이 수업을 듣는 아이를, 너는 네 마음 다해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입 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아침에 사귀지 않느냐고 물어보던 그 의중을 이제야 파악했다. 네가 고백할 것도 알고, 네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에 미연의 방지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참 지독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 아이는 생각 외로 참 지독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이용할 줄 아는 아이였구나.








 

 

 

 

 



“타쿠야, 여기서 뭐 해?”




“나? 그냥,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아, 그럼 난 이만 갈게. 타쿠야 너 이 새끼, 이러려고 나한테 부끄럽다고 했냐?”




“뭐야, 타쿠야 너 부끄러웠어? 어쨌든 우리가 가자. 기다리는 사람 있어 보이던데. 그나저나 할 말이 뭐야?”








 

 

 

 


 


교묘하게, 나한테서 너까지 앗아가는구나. 고개를 푹 숙였다. 스쳐가는 수많은 학생 사이에서 움직임도 없이 서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야 있다. 나는 언제가 되더라도,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너라는 걸, 내 용기가 너무 부족해서 말하지 못했나 보다. 결국 또 네 원망은 못하고 나만 탓하는 나 자신에게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계속 흐르는 눈물을 주체도 못 하고 서서만 있는데 어깨를 감싸 쥐는 손이 느껴졌다. 누구지 하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아침의 그 녀석이었다.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동방을 향하는 녀석은 누구보다도 든든했다. 누구이든지 간에, 어쩌면 나는 내 속상함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으리라.

동방 소파에 나를 앉히고 차가운 음료수 캔까지 들려준 녀석은 또 다른 누군가를 데리고 나타났다. 쾌활한 표정의 아이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잠시, 의자에 거꾸로 앉아 팔을 등받이에 두른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부장, 좋아하죠?”




“어, 어?”




“맞네. 좋아하네. 그런데 왜 말을 못하고 거기 서서만 있어요. 불쌍해서 혼났다니까.”




“야, 근데 이 선… 아니, 누나는 부장 형 취향이 아닌데?”




“넌 불난 집에 기름 뿌리냐, 새끼야?”




“아, 아니야. 맞는 얘기지. 내가 걔를 10년을 넘게 봐 왔는데 이상형을 모르겠어? 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녀석은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내 얘기 들을 준비해요. 듣자 하니 누나가 부장 형 문제 전문이라던데.”

 

 

 

 


 

“아니, 별 거 없어요. 사실 이게… 저도 제가 잘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 나한테 맞은 여자 선배가 우리 형이 찼던 사람이거든요. 그 이후로 자꾸 형을 왕따 시키길래 제가 몇 군데 좀 손봐준 것뿐인데. 이거 위원회 열리면 말해야겠죠?”

 

 

 

 


긴장이 탁 풀렸다. 어이가 없을 만큼 황당무계한 말이었다. 그 사람이 왕따를 시켰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묻자, 녀석은 형의 몸 사진을 찍어놨다고 대답했다. 이건 학교를 기만한 일이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녀석은 그녀를 '몇 군데 손봐줬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특별한 의미는 없겠지만 조금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내가 한숨을 쉬자 녀석은 예의 그 장난스러워 보이는 자신의 친구에게 맞느냐고 물었고, 그는 녀석에게 맞다 대답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곧 종이 칠 시간이었다. 황급히 자리를 뜨려다가 벗어 놓았던 카디건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내가 주우려고 했는데도 녀석은 굳이 카디건을 주워 주고는 나에게 말했다. "내 이름, 줄리안이거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예비 종이 치는 바람에 우리 셋, 아니, 나와 녀석 무리는 한꺼번에 동방에서 빠져나왔다. 녀석은 손을 흔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줄리안, 기억해요! 나는 일부러 반응하지 않고 뛰어올라갔다. 아직 나는 네 생각만으로도 벅차다. 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구태여 저 녀석 이름까지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본 종이 치기 전 교실로 들어온 나는 너를 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김정연과 함께 웃고 있는 너. 애써 태연한 척 자리로 가서 앉았다. 바로 옆에 앉은 나로 인해 둘의 대화가 멈췄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너보다도 환하게 웃는 김정연이 거슬렸다. 하지만 너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설령 내가 끝까지 친구로 남더라도, 끝까지 너 때문에 속앓이를 하더라도 말이다.

 

 

 

 


 

“할 말 있으면 해. 왜 그러고 있어, 동정심 가게.”

 

“어? 아, 별 건 아니야. 나 도와줘서 고맙다고. 나랑 얘랑 사귀어, 네 덕분에.”

 

“…잘 됐네. 곧 본종 칠 건데 가야 하지 않아? 우리 다음 교시 수학이야.”

 

“으, 우리도 수학인데. 공부 열심히 하고, 자기도 공부 열심히!”

 

 

 


 

 

평소와 같은 대화였고, 같은 형식이었지만 내용이 달랐다. 사형선고라도 내려진 듯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수학은 너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과의 대화를 말해주는 걸 잊었다. 다음 교시 쉬는 시간에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를 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며 생각했다. 지금껏 널 좋아해오면서 몇 번이나 봤던 고백이었고 연애였다. 그게 내 짝이 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창피하게도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만 생각을 방해하고 말았다. 급히 팔에 얼굴을 묻자 네 여자 친구가 옆에서 어디 아프냐며 말을 걸어왔다. "머리가 많이 아파서. 선생님께 말씀 좀 드려줘." 내 변명에 그 애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고개를 더 깊이 묻었다. 축축해진 카디건 소매에 짜증이 나서 발을 두어 번 굴렀다. 팔꿈치로 귀를 눌렀다. 윙윙대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아주 배려 없는 손길로 누군가가 나를 툭툭 치더니 양호실에 가라고 말했다. 볼 것도 없이 수학 선생님이었다. 두말하지 않고 일어나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같은 반 아이가 말했다. "어, 쟤 운다." 삽시간에 퍼지는 나에 대한 시선들에 고개를 숙였다. 꼭 이런 적이 있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 그게 재현되는 느낌에 조급한 마음으로 복도로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뒷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힘들다. 힘들어 죽겠다.

 

 

 

 

 


“어, 야! 왜 네가 여기 나와 있어?”

 

“타쿠야….”

 

“어디 아파? 수업 시간인데 왜 나와 있느냐고, 어?”

 

“나, 나 있잖아…”

 

“천천히 말해. 너 왜.”

 

네가 너무 필요해, 타쿠야.

 

“…머리가 너무 아파.”

 

 

 

 


 

너는 겨우 내뱉은 내 말에 안도라도 한 듯 웃어 보이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에도 한번 뒤틀린 심사는 갈 데까지 갈 모양이었다. 물론 네가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아프다는데도 웃는 너에게, 조금 섭섭해지려고 했었다. 만약 내가 그 한 철 감정을 뉘우치지 않았더라면 지금껏 나는 네게 애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주 잡은 두 손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3층 교실에서부터 1층까지, 원래는 설렁설렁 갔었을 그 길은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꿈같은 이 길을, 이 시간을, 그리고 너를. 마법에 빠진 것처럼 정신없이 내려온 양호실 문 앞에서 너는 손을 놓았다. 아무 망설임 없이 놓아버리곤 작별을 고했다. 진정 나를 위한다면 계속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지만 역시 안 될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쉽게 포기해버린 나는 힘없이 양호실로 들어섰다. 양호 선생님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그저 나를 의자에 앉히시곤 말을 이어갔다.

 

 

 

 


 

“타쿠야랑 같이 내려왔구나. 얼굴이 새빨개선, 많이 아파?”

 

“네. 아파요. 그것도 많이요.”

 

“머리는 핑계지?”

 

“…네. 다 핑계예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는 놔줘야 하지 않을까? 일단 많이 아프니까 좀 쉬어. 내가 방패 쳐 줄게.”

 

“…감사, 합니다.”

 

 

 

 

 


양호 선생님 말이 옳다. 이제는 너를 놔줄 때가 왔다. 나도 노력할 테니까, 너도 그만 내 심장에서 나가줬으면 한다. 그게 최선이니까.

 

 


결국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하고 종례가 끝났다. 점심시간에 할 일 없이 미적거리다가 널 만나는 일을 방지하려고 스터디그룹에도 들어갔고, 방과 후에는 지금처럼 종례가 끝나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갈 계획이다. 댄스부도 나간 마당에 더 이상 너에게 미련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교문을 벗어나 숨을 몰아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 남자와의 연락은 오늘 아침 이후로 없었지만 내가 다가갈 것이다. 나 좋다는 사람을 만나다 보면 잊히겠지, 너는 잊히겠지. 핸드폰 자판을 두들겼다. 썩 마음에 드는 말이 나오지 않아 끙끙대다가 겨우 정한 말은 [오늘 아침에 확인을 못 했네요ㅠ 지금 시간 되세요?]였다. 시간이 돼야만 한다.

답이 올 거라 확신하고 가까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구석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려는 찰나, 예상대로 문자가 도착했다. 걱정과 떨림이 뒤엉킨 감정으로 확인한 핸드폰에는 그 남자 대신 네가 있었다. 왜 필요할 때는 오지 않고 절실히 피하려 할 때만 오는지, 얄미운 네 행보에 보지도 않은 문자를 지웠다.

 

 

 

 

 


“어, 진짜 여기 계셨네. 안녕하세요!”

 

“문자 안 보냈는데 어떻게 찾은 거예요?”

 

“그냥, 직감이죠. 소개가 많이 늦었네요. 열아홉 살 장위안입니다.”

 

“말 놓으세요! 저 한 살 어려요. 열여덟 살이에요!”

 

“두 살 어린 거 아니었어?”

 

“아, 아니. 어려 보여? 요?”

 

“말 놓으라면서 왜 너는 안 놔? 귀엽네.”

 

 

 

 


 

편하다. 장위안이라는 남자, 아니, 이제는 오빠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편한 사람이었다. 잘만 하면 너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와 내가 지내온 7년을, 너를 좋아해 온 4년을 지운다는 생각에 코끝이 아릿해져왔다. 눈물을 꾹 참으며 중얼거렸다. "오빠… 고마워요." 고마워요. 나한테서 타쿠야를 지울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여 줘서요.

 


 

예전 어느 날, 사촌 언니가 소개팅을 갔다 와서 대뜸 힘들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언니는 내가 있다는 걸 몰랐던 듯 깜짝 놀라더니 말을 얼버무렸다. 그때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은 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언니를 닮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빠와는 진작 헤어지고 버스를 탔다. 너 아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실로 간만의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이 관계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문득 잊고 있던 핸드폰을 켰다. 웬일로 쏟아지는 상단 바 알림에 흠칫하고는 무심히 상단 바를 내렸다. 그리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도착한 위안 오빠의 문자 한 통을 제외하고, 정확히 26통의 전화와 5통의 문자 메시지가 모두 너로부터 발신된 것이었다. 평소 먼저 연락을 취하는 성격이 아닌 너임을 감안하면, 고려해볼 만한 것이었다.

나는 머뭇거렸다.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기로 마음을 먹은 만큼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숨을 푹 쉬고 핸드폰 홀드 버튼을 눌렀다. 누르기가 무섭게 다시 걸려오는 전화에 떨리는 손으로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잘 가던 신호가 갑자기 끊겨서 허탈할, 내 생각뿐이지만 허탈하기를 바라는 네가 선명했다. 내 전화나 연락 하나하나에 격하게 반응하는 너는 내가 4년간 그려오던 너이기도 했다.








 

 

 

 


 


[ 다음 정거장은 △△, △△ 정거장입니다. 다음 정거장은… ]




“타쿠야 집 앞이네, …여긴 그냥 대학교 앞 정거장이지.”








 

 

 


 

 


너와 내가 처음 만났고, 마지막에는 결국 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장소. 나는 과감히 그 의미들을 버리기로 했다. 이미 너무 많이 흐른 시간에 너무 많이 스며든 너이지만 나는 그래야 했다. 줄곧 특별한 장소였던 이 정거장마저 빛을 잃은 느낌이었다. 씁쓸했지만 그뿐이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어렸던 너와 나만이 정거장에 서서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자취방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자꾸만 등 뒤에 있을 과거의 우리가 아른거렸지만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후드 집업 속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괜찮을 거고, 괜찮아야 하며, 아마 괜찮을 것이다.

걸음을 조금 빨리해서 막 시내 골목을 벗어난 참이었다. 내가 의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은 너와 내가 어울려 지냈던 기억이 도사리는 곳이었다. 괜히 후드 집업 지퍼를 조금 더 세게 여미려던 찰나 줄곧 거기 서 있었던 듯 몹시 지쳐 보이는, 그리고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어, 야!”




“…타쿠야?”




“왜 전화를 안 받아?”




“…….”




“돌겠네, 진짜. 왜 연락은 다 씹었어?”








 

 

 


 

 


가슴속에 묻어둔 말은 꺼내기가 싫어서 그냥 고개를 두어 번 젓고 가던 길을 갔다. 왜 이 시점 이곳에서 나타난 걸까. 저 아이는 모든 걸 모르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건, 그 사건은 불가항력이었다. 나는 나쁘지 않았다. 티내지도 않은 걸 멋대로 캐고 다닌 그 아이가 나쁜 거였다. 너를 꾀어내 도망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누가 뭐래도 불가항력이었다.

자취방은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너를 좋아할 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먼 이제는 너무 또렷하게 보였다. 실로 사랑이란 건 위대한 것이었다. 어쩐지 오늘은 저걸 치워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시험 전날에나 느끼던 감정을 뜬금없이 느끼면서도 나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 청소가 끝나고 나면 너도 없어질 먼지처럼 깨끗이 날아가겠지. 호기롭게 먼지떨이를 벽에 갖다 댄 순간 나는 그 먼 벽에 낀 곰팡이라는 걸 알았고, 곧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지워지지 않는 곰팡이처럼 너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 안이라도 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끊임없이 방을 배회하면서 손톱을 뜯었다. 턱 끝까지 물이 찬 느낌이었다. 문득 지나치다가 본 거울 속의 나는 생기라곤 한 방울도 없는 퀭한 모습이었다.





결국 그렇게 밤을 꼬박 새고 집을 나섰다. 미처 마르지 않은 교복 마이가 블라우스에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 꽤나 볼만했다. 솔직히 하자면 많이 불쾌했지만 말이다. 제대로 신지 않은 운동화 뒤축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도 모를 네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네게 서려 있는 무언의 압박에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녕." 너는 말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핸드폰에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나도 힘들었지만 잘못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시인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네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연속으로 울린 알람에 네 눈치를 보며 잠금을 풀었다. 네가 타이핑했을 문자는 고스란히 나에게로 도착해 있었다.








 

 

 

 

 



[ 지금은 너한테 화만 낼 듯 ]




[ 어제 뭐한다고 배터리까지 빼냐 내가 그렇게 싫음? ]




“그런 거 아냐. 어제 위안 오빠 만났어.”




[ 위안 오오빠아아아아? ]




“그때 번호남. 만나봤어.”




[ 허락 맡으랬지 ]




“내가 만나는데 왜 네 허락을 맡아. 앞으로는 나 알아서 해.”








 

 

 

 


 


놀란 표정의 너를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여전히 절망적인 아스팔트를 쳐다보며 후회도 조금 했지만, 알 수 없는 의무감이 그보다 컸다. 너와 싸우고 나면 나는 갈피도 잡지 못한 채 방황하겠지만 어쩔 건가, 응? 네가 뭐라고 하는 게 들렸지만 못 들은 척 계속 걸었다. 봄이다. 목련이 피었다. 너는 목련을 좋아한다. 그런 너를 여전히 못 놓는 나는 바보다. 봄은 나를 바보로 만드는 계절이다.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1
탁구바보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빨리 다음편 가져오세요ㅠㅠㅠ
9년 전
독자2
헐 다음편이 시급함다...
9년 전
독자3
다음편주세요오ㅜㅋㅋㅋ
9년 전
독자4
헐 ㅠㅠㅠㅠㅠ글짱좋아요ㅠㅠㅠㅠ♡♡♡♡
9년 전
독자5
헐다음편시급해정말정말!!!!
9년 전
독자6
헐..글 너무좋아요ㅠㅠㅠ
9년 전
비회원241.197
비회원 눈물 찔끔하고 가요ㅠㅠ정말 너무 좋아해서 모든걸 다 바쳐 배려밖에 못하는 여고생이라니 옛날 내 생각도 나고 다시 교복입고싶다 엉엉 새벽에 감성터지네요 다음편 조심스럽게 기다려요
9년 전
독자7
으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다으뮤ㅕ누ㅠㅜㅠㅠ
9년 전
독자8
헐 이런거를 이제서야 보다니ㅠㅠㅠㅠㅠㅠㅠ다음편이시급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9
신알신합니다..♥ 다음편 풀어주세요ㅜ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10
헐 이게뭐야 이걸 왜 지금 봤죠??????? 아니 무슨 헐 대박 작가님 다음편 써주세요ㅠㅠㅠㅠㅠㅠㅠㅠ 신알신 하고갈게요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11
작가님 다음편 다음퍈ㅜㅜㅠㅠㅠㅠ이렇게 재밌는 글에 다음 내용이 없다니.. 신알신 하고 갑니다ㅠㅠㅠ재밌어요 엄청!!!
9년 전
독자12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자까님 하편 언제와요ㅜㅜㅜ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다리다 말라죽을것가타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독자13
어휴.. 복습하다 울고갑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분류
  1 / 3   키보드
필명날짜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장위안빙의글] 水蓮 - 03 에테르 01.10 09:03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다니엘] 그 누구를 위하지 않는 왈츠 암울해 01.10 01:49
비정상회담 [장위안줄리안] 편의점 그남자4 (늦어서 미안 ;ㅅ;) 10 네시반 01.10 00:57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타쿠야] 백지도 白地圖10 암울해 01.09 21:04
비정상회담 [비담] 가디언즈 워(Guardians War) Ep.3 - 이게 누구야?7 에기벨 01.08 19:48
비정상회담 [줄로줄] 영고줄X토끼로빈 3 24 히즈리 01.06 21:21
비정상회담 [비담] 가디언즈 워(Guardians War) Ep.2 - 염탐하라!14 에기벨 01.06 17:42
비정상회담 [비담] 가디언즈 워(Guardians War) Ep.1 - 인류가 뭐가 나빠?12 에기벨 01.04 18:58
비정상회담 [줄로줄] 영고줄X토끼로빈 2 21 히즈리 01.03 03:06
비정상회담 [비담] 가디언즈 워(Guardians War) 프롤로그12 에기벨 01.02 22:32
비정상회담 [줄로줄] 영고줄X토끼로빈 22 히즈리 01.01 22:13
비정상회담 줄로 단둘이 미국 로드트립 하는 글 上32 lilly 12.30 23:09
비정상회담 타쿠안 썰(고등학교때로 돌아간 타쿠야)95 금잔화 12.31 02:21
비정상회담 타쿠안 썰(고등학교때로 돌아간 타쿠야)85 금잔화 12.29 12:52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타쿠야] 타쿠야 빙의글: 친한사이 上14 미명 12.28 16:31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타쿠안] 독재 01 4 다부 12.27 22:15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독다니엘] 천둥과 번개8 신선한신인 12.27 21:59
비정상회담 집착(with.타쿠야).txt4 주차쟉이 12.26 15:22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G11] 쥘레븐과 카톡을 해보자 13 (부제:크리스마스)38 스키다요 12.25 18:49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G11] 쥘레븐과 카톡을 해보자 1265 스키다요 12.25 10:48
비정상회담 로빈이랑 대학교 CC된 썰3 정다 12.24 02:03
비정상회담 [장위안줄리안] 편의점 그남자3 18 네시반 12.22 22:29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장위안] 띠동갑 장저씨랑 연애하는 썰1517 사랑둥둥's 12.22 12:33
비정상회담 [줄로/투니엘] 아직 작은 소년은 그렇게 총을 들고 4 10 의체썰 12.19 01:15
비정상회담 [대부시리즈/장위안] 내 후견인은 무섭습니다. <1편>25 가락가락 12.18 17:12
비정상회담 [비정상회담] 비정상 하숙집-정전(카톡버전)8 초코팬더 12.18 02:58
비정상회담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6 느드 12.18 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