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었다. 문득 눈을 떠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어야 할 구준회는 보이지 않았다.
이른 저녁, 구준회의 수발을 들어준답시고 물도 따라 주고, 불편한 점은 없냐며 괜히 옆에서 말을 걸었었다. 그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고,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느 순간 그는 입을 다물고, 잠이 들었다. 배에 탄 이래로 처음 침대에서 자는 것이었다. 나는 불을 끄고, 그의 옆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지금 시계는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구준회가 잠든 것이 일곱 시 정도였고, 나도 한 시간 안에 잠들었으니, 최소 다섯 시간을 자는 동안 그가 없어진 것이었다. 또 나 배려해준답시고 거실 소파에 누워서 자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주섬주섬 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 방에도 없고, 거실에도 없고, 혹시나 해서 화장실에도 가 보았으나 불은 꺼져있었다. 어디 갔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한 번 객실 안을 둘러보는데, 식탁 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너 깨기 전에 들어오긴 할 건데, 혹시 깰까 봐. 갑판에 바람 쐬러 나갔다 올게.
정갈한 글씨였다. 뜬금없이 무슨 바람을 쐬러 나간다는 건지. 총 맞더니 돌았나, 싶다가도 괜히 시무룩해졌다. 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다친 몸 이끌고 바람 쐬러 나갔다 온다는 건지, 원.
나는 트렁크에서 니트 가디건을 꺼냈다. 타이타닉호 항해 경로 상 꽤 북상했을 테고, 게다가 새벽이니 밖은 추울 터였다. 가디건을 걸치고, 쪽지를 대충 접어 주머니에 넣고, 구준회를 찾아 갑판을 향했다. 갑판으로 가는 길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에 바다 구경이라니, 참 신기한 경험도 다 해보네.
갑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고, 마지막으로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꼭대기로 까만 하늘이 보였다. 그곳에는 별이 쏟아질 듯 박혀 있었다. 나는 이끌리듯 계단을 올랐다. 저만치, 수평선 앞을 가린 난간에 한 남자가 기대어 서 있었다.
“구준회!”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의 뒤로 검푸른 바다가 무한히 펼쳐졌다. 정신이 아득했다. 어두워서 그런 건지, 새벽이라 감성이 충만한 건지, 괜히 심장이 뛰었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해?”
“이리 와봐.”
내 목소리에 이어, 조용한 밤공기는 그의 목소리로 메워졌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갑판에 나와 혼자 청승 떠는 구준회라니, 웃음이 나올 법도 했지만 나직한 그의 목소리와 가라앉은 분위기에 입을 다물고 그의 옆에 섰다.
상처까지 입어가며 작전에 몰두한 그였다. 그는 내일도,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작전 수행에 애쓸 터였다. 이 새벽에 굳이 왜 나와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자 두지 않으면 피곤할 텐데. 몸도 다친 애가.
“이 시간에 밖에서 뭐해?”
“너, 호신술 얼마나 배웠냐?”
뜬금없이 묻는 그의 질문에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도를 넘어선 치근덕거림, 귀찮은 접근을 차단하기에 호신술만큼 효과가 좋은 것도 없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것이었고, 내 호신술 실력은 꽤 쓸만하다고, 나는 자부했다.
“내 몸 지킬 수 있는 만큼.”
내가 말하자 구준회는 씩 웃었다.
“진짜?”
그 순간, 그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내 얼굴은 주먹을 피하려 본능적으로 움직였고, 공중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볼 주변을 맴돌았다.
“그럼 한번 덤벼 봐.”
그의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해 보자 이거지.
그의 손목을 잡고 꺾어 뒤로 돌렸다. 상대방의 팔의 움직임을 일정 기간 저지할 수 있는 호신술이었다. 이 자세에서 오래 시간을 끌면 오히려 내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갑자기 움직여서인지 숨이 찼다. 이를 악물고 지금껏 해왔던 대로 내 어깨 위에 어설프게 올라온 그의 팔을 반대편으로 꺾고, 그를 팽개치려 자세를 잡던 때였다.
“안 되겠는데.”
내 턱 밑에 차가운 금속이 디밀어졌다.
구준회의 손목은 어느새 내 손에서 벗어나 있었고,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권총을 빼낸 그는 총구를 내 턱 밑에 가져다 댔다. 차디찬 총구가 피부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그는 언제나 총을 장전해두고 다녔다. 예상치 못한 시간에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 그의 권총에는 탄알이 장전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면, 허공을 찢는 굉음과 함께 탄알이 발사되고, 내 뒤통수를 뚫고 나갈 것이었다. 피가 터지겠지.
나는 구준회의 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방아쇠에 닿은 그의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다시 드니 그는 이내 잔잔히 웃으며 천천히 권총을 내렸다. 졌다.
“괜찮아?”
그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내 볼을 가볍게 쳤다. 다친 구준회 하나 이기지 못했다, 아직도 훈련이 모자란 것이었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구준회였기에 망정이지, 실제 상황이었다면 나는 바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지금 당장 목에 총구가 겨누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삶이었다. 국가 소속 정보요원의 명성은 화려했지만 그에 걸맞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배에 타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란 멋모르는 아가씨 역할에 과도하게 전념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위험천만한 삶을 살 운명이었다.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는 삶이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
나는 계속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 지랄 같은 인생. 너나, 나나, 국가의 개로 묶여 사는구나. 내 목에 디밀어졌던 총구는 시리도록 차가웠고, 내가 얼마나 좆같이 위험한 삶을 사는지 자각시켜 주었다. 미칠 것 같은 허탈함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눈에 힘을 꾹 주고 구준회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짭짤히 풍겨오는 바다 내음 때문인지, 쏟아질 듯 빛나는 대서양의 밤하늘 때문인지, 아니면 다정스레 내 볼을 어루만지는 구준회 때문인지, 정신이 아득했다. 하늘에는 쏟아질 듯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고, 검은 바닷물에 반사된 별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문득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고, 바벨탑의 설계자고, 정보요원이고, AFT고, 모두 다 잊고 살아간다면.
구준회는 이미 총에 맞아 다쳤고, 나 역시도 내일이면 수장에게 접근해 거짓 웃음을 지으며 문서를 빼네 와야 했다. 아름다운 대서양을 순항하는 초호화 유람선 탑승의 목적은 유흥 따위가 아니었다. 숨이 막혀왔다.
“구준회……”
내 앞을 지키고 선 구준회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 고아원에서 국정원장의 눈에 띄어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만나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나, 이렇게 살기 싫……”
눈물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고, 울컥하며 목소리를 터트리는 순간, 그가 나에게로 한 발짝 다가와 나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귀에 와 닿았다.
“……이번 작전 끝나면,”
작전이라는 단어에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끝끝내 후드득 떨어졌다. 그의 어깨를 적실 것 같아 억지로 고개를 떼었지만, 오 센티미터도 안 될 것 같이 바로 앞에 있는 구준회의 얼굴에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더니, 그의 손이 올라와 눈물에 축축해진 눈가를 쓸었다. 꼼꼼히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손길은 너무 따뜻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랑 도망가자. 멀리.”
도망이라는 말에 눈을 살며시 떴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심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오히려 더 매달리고 싶었다. 그걸 너무나도 빤히 아는 나는,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래, 도망가자.”
도망가자, 목소리를 쥐어짜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그가 씩 웃더니, 천천히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긴장한 것을 그대로 보여주듯, 내 입술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이내 구준회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구준회의 온기였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입술에 눈을 감고 주먹을 꼭 쥐었다. 몸이 굳은 것을 느꼈는지, 내 양 볼을 붙잡은 손을 내려 내 몸을 팔로 감쌌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애타게 내 입술을 혀로 훑고 있었다.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고, 천천히, 긴장이 녹아내렸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고,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내 고개를 다시 돌렸다. 떨려서 눈을 맞추지도 못하겠는데, 낯뜨겁게 자꾸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야, 이것 좀……”
어설프게 그의 손을 쳐내려는데, 구준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숙여 쪽, 쪽, 하고 연달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약속한 거다,”
“뭘?”
“도망가는 거.”
웃음이 나왔다. 도망, 그래, 지금 이렇게 말할 만큼 가벼운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진지하게 도망치려면, 목숨을 다 걸어야만 했다. 다른 멤버들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신경 쓸 일 엄청 많을 텐데. 김한빈도 그렇고, 국정원장이나. 잡히면 그냥 바로 죽어.”
“너만 있으면 된 거지, 뭐.”
그가 뒤돌아 난간을 잡고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출렁이는 바다는 예쁘긴 더럽게 예뻤다. 분위기가 한몫했네, 나는 웃으며 그의 옆에 서서 함께 바닷바람을 맞았다. 갑판에서의 밀회는 소름 돋게 아찔했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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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해요ㅠㅠㅠㅠㅠㅠ 쏟아지는 데뷔 떡밥에 정신 못차린 못난 작가입니다..☆ 오늘은 드디어 독자님들이 기대하시던(?) ♡러브라인♡이 나왔어요 빠밤 오랜만에 찾아와서 너무 죄송하네요ㅜㅜㅜ 다만 절대 포기는 안합니다 완결까지 달려보자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