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선이와의 재회는 그렇게 어이없고, 별 것 아닌 이유로 이루어졌다. 5년 간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덕선이와 택이의 모습을 지켜 볼 용기가.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자꾸 택이를 원망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덕선이와 만나고 나니 자연스레 쌍문동 5인방과의 재회도 이루어졌다. 그들은 아직도 쌍문동에 살고 있었다. 덕선이네가 옛 우리 집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과, 선우가 보라누나와 함께 봉황당 옆 두번째 집에서 살고 있는 것만이 다른 점이었다.
덕선이의 전화를 받고 달려 온 동룡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계속 바라봤고, 어이없게도 선우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택이는, 말 없이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죄책감 어린 눈빛과 함께. 나는 그것이 너무나 싫어서 또 도망치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그 옛날처럼 택이의 방으로 향했다. 함께 있으니, 그래도 너무나 행복했다. 20년 넘게 한 친구들이다. 이만큼 편한 장소가 있을까.
"정환아. 너에게 우리 존재가 고작 그것 뿐이였던 거니? 아니, 대체 왜...!"
동룡이가 한 시간 째 저 말을 반복 중이었다. 미안하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정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버리고는 다시 우정도 버린 책임감 없는 놈. 그것이 진정 나만이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선우는 자신이 울었다는 것을 창피해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게, 나도 놀랐다. 그리고 택이는 여전히 나를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택이의 방에서 밤새 회포를 풀었다. 덕선이와 택이는 왜인지 서로 끝과 끝에 앉아서 눈길 하나 주고 받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입안이 까끌해졌다. 배려랍시고 하는 행동임이 뻔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착해 빠진 새끼. 나는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야. 이 양주 뭐냐. 죽인다."
괜히 할 말이 없어 술 핑계를 댔다. 택이는 어눌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에, 박카스배 때문에 중국에 갔다가 선물 받았어."
익숙한 대국 이름에 마음이 또 씁쓸해졌다. 너무 행복한데 자꾸 울컥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은건, 내 마음속에 이 아이들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에게 아직 미련이라는게 존재하는 것일까.
"아 맞아. 그러고 보니까 택아."
"응."
"너 몇년 전에, 그때도 박카스배였던 것 같은데. 그때 결승에서 갑자기 기권했었지 않냐?"
동룡이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기억해낸 모양이었다. 선우도 아 맞아. 그때 왜 그랬냐? 하며 동조했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웃고 있었다. 나에게 가장 씁쓸하고 아픈 기억이지만.
내가 덕선에게 직진하려던 최초의 시도. 그것의 실패는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이 새끼 완전 미친 줄 알았잖아 그때. 상금이 얼만데 해보지도 않고 기권을 하냐. 시끄러운 동룡이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리며 나는 그저 덕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마음이 들키든 말든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택이는 그저 웃고 있었다. 덕선이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 어디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래. 내가 장난식으로 고백을 했을 때 딱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그 표정은 내가 덕선이를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을 지금 짓는 것일까. 나는 잠시 머리속이 혼란해졌다.
회포를 다 풀고 헤어질 때 아이들은 이번엔 절대로 연락을 끊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싶어 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약속을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이런 상황을 그리워하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몇년 간 이유없이 연락을 끊은 못된 놈인데 아무 말 없이 나를 다시 받아주는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물론 등짝은 여러 번 맞았다.) 오늘따라 오글거리는 선우는 아무래도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 가야겠다며 나를 가지 못하게 했다. 헤어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나 혼자 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에 고질병처럼 나를 따라오던 외로움과 쓸쓸함이 잠시 치료되는 듯 했다.
다행히 휴가기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선우의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며 아쉽게 헤어졌다. 나는 저 멀리 멀어지는 덕선이와 택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각각의 집으로 들어가는 둘의 모습을 보고 나는 못되게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내 상상 속 저들은 이미 결혼을 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건 아닐까.
"덕선이랑 택이는 언제 결혼한대."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선우에게 물었다. 그러자 선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아-. 쟤네 둘이 좀 알콩하긴 하지."
"뭐?"
"넌 뭔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선우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나는 잠시 벙쪄있었다. 선우의 반응을 보니 아직 둘의 사이를 모르는 듯 했다. 5년이나 흘렀는데, 왜 아직 밝히지 않은 걸까. 나는 내가 섣불리 나섰음을 느꼈다. 재빨리 화제 전환을 해야 했다.
"보라 누나는?"
"지금 보라 난리났어. 니 나쁜 놈이라고. 몇대 맞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아는 보라 누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시 두려워졌다. 차라리 동룡이네 집에서 자고 갈게. 나는 여러 번 물었지만 그러면 나중에 더 많이 맞을 거라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미란 여사와 아빠, 그리고 형은 여러 차례 쌍문동 식구들과 만남을 가졌다. 쌍문동에서 자고 오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 가족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김정환. 이 염치없는 새끼."
선우와 보라누나의 집의 대문을 열자마자 보라 누나가 나를 환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못된 새끼는 한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보라 누나의 분노의 찬 말과 함께 내 귀가 아프게도 들어올려졌다. 아-아! 아파요 누나!! 아파? 아프라고 하는거야. 내 비명소리와 함께 나의 귀는 하늘 높이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