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귀자." 어김없이 시작되는 저 소리. 녀석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내가 아는 정환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환이는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잘도 말해대는 사랑꾼이었던 것이다. 아침 등굣길에 나오는데 언제나 신발끈을 묶으며 있는 녀석. 나랑 같이 등교해 보겠다고 신발끈을 수십번을 묶었다 풀었을 것이다. 내가 기가차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뭐. 하며 또 툭툭 던지는 그 말. 얼마 못 갈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아서일까, 정환이는 쉽사리 물러가질 않았다. 선을 그어야겠다고 어떻게든 거절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정환이의 얼굴을 마주쳤을 때,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질않았다. 녀석의 고백에 설레서 그런건지 아니면 걱정이 돼서 그런건지 잠 못드는 밤도 여럿 있었다. "미쳤어 진짜? 가족들 들으면 어쩌려고." "싫음 말고. 늦었어, 얼른 가." 하루가 멀다한 정환이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진 정환이의 말을 들은 친구나 가족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날 위로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여자애들이 힐끔힐끔 정환이를 쳐다본다. 저렇게 인기가 많은데 자기 좋아하는 아무 애들 중에 한명 골라서 사귀면 되는 것을. 여자애들의 수근거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환이는 묵묵히 음악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재수없어. 나는 중얼거리며 가방에서 지갑을 뒤졌다. 그리고 순간 성보라가 빌린 돈을 가져가겠다며 가방에서 지갑을 빼낸 기억이 번뜩 들었다. "아저씨 두명이요." 아무렇지않게 내 몫까지 내고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 나는 생각했다. 녀셕의 고백을 받아주는 날은 녀석을 밀어내기 위해 쌓아놨던 공든 탑이 작은 손짓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날 일 것이라고. 서로의 공유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 나는 끝이다. 애들과 함께 가기로 한 이문세 콘서트가 코 앞이었다. 처음 가보는 이문세 콘서트여서 엄청나게 들떠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날 대국이 있다는 택이부터 시작해서 약속이 있다는 선우, 심지어 도롱뇽까지 약속이 있다고 한다. 먹고 있던 라면도 도로 뱉게 만드는 망연자실한 기분이었다. "왜? 정팔이 남았잖아. 정팔이도 이문세 좋아해." "나랑 개정팔이랑 둘이 가라고?" "뭐. 안가려는 이유라도 있냐?" 맞은편에 앉은 정환이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어왔다. 재수없어. 상을 홧김에 발로 밀어버렸다. 애들이 미쳤냐며 미쳐도 라면은 건들이진 말아야지 하며 짜증을 냈다. 심지어 개정팔까지. "아, 됐어. 나도 그 날 만옥이랑 약속있어." 쟤랑 같이 가느니 안가고 말지. 내가 너랑 쉽게 같이 가줄 것 같니. 애꿏은 젓가락만 정환이쪽으로 툭 던졌다. "아줌마, 이거 엄마가 갖다 드리래요." "정환이 왔나. 엄마한테 고맙다 하고 이거 가져다 드려라." "아야, 정환아. 오랜만에 고기반찬인데 한 점 먹고 가라. 느그집 요새 아빠때문에 보양식챙긴다고 되도 않는 굴비만 먹여싼다매. 생선만 계속 먹어봤자 입안에서 짠내만 더 나냐. 안그냐?" 평소같으면 거절하고 금방 집으로 올라갔을 녀석이 오늘은 몇 점만 먹고 가겠다며 자리에 합석한다. 고기를 오물오물 먹어대면서도 엄마아빠가 묻는 말에 대답도 싹싹하게 잘한다. 재수없어. 나 먹을 것도 없는데. 정환이는 계속 있으면 실례라고 이만 가겠다고 하면서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잠깐 나오라고 한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노을이한테 고기 다 먹으면 가만 안둔다고 누누히 말한 뒤 정환이 뒤를 따라나섰다. "뭔데." "사귀자." "이게 진짜!" 홧김에 발로 정환이를 밀었다. 당황스럽게도 정환이는 내 발을 피하지않고 그대로 옆으로 엎어졌다. 야, 개정팔 괜찮아? 하며 급하게 정환이한테 손을 내밀었지만 크게 휘둥그레진 내 눈을 보며 웃고 있는 녀석.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녀석은 혼자서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춥다, 들어가." 밥상에 떠돌던 고기 생각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정환이의 등이 다르게 느껴지는건 오로지 미안함때문일 것이라는 기분 탓인 걸까. 신의 장난일거라고 생각했다. 왜 자꾸 정환이와 엮이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집 바닥이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된 공사로 인해 끝날 때까지 정환이 집에서 머무르기로 한 것이다. 노을이가 저 집 너무 좋다며 방방뛰길래 상황파악좀 하라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모두들 신나보였다. 정환이 부모님과 시작된 고스톱, 노을이와 정봉이의 소설책 얘기, 성보라는 여기서까지 와서 공부를 했다. 나만, 나만 뚱해져있다.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자 탁자 위에서 공부하던 성보라가 물좀 떠오라고 했다. 손이 없어? 라고 인상을 찌푸리자 나는 급히 꼬리를 내리고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서 물병을 꺼내는 순간, "사귀자." 라는 정환이의 말에 놀라 물병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정환이는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던건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고 당황해했다. "뭐 깨트렸니?" "제가 실수로 물병 깨트렸어요, 엄마." 방에서 들려오는 정환이네 엄마의 물음에 정환이는 자연스레 대답을 한 뒤 유리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야...야, 너 진짜...하며 얼버무리자 슬리퍼를 안 신고 있으면 위험하다며 나를 부엌 밖으로 밀어냈다. 그 자리에서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깨진건 물병인지 아니면 녀석의 말에 놀란 내 가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보라와 나에게 주어진 정환이의 방. 새벽까지 미묘하게 남아있는 온기에 쉽사리 잠 못드는 밤에, 어느새 비워진 옆자리를 조용히 채우는 너. 생각보다 빨리 나에게 성큼 다가와 버린 너. 서로를 바라보는 언젠가 또 이런 적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눈빛들. 그때와 상황은 비슷하지만 조용히 내쉬고 있는 숨소리마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 "덕선아." "...응." "콘서트 같이 가자." "..." "이문세 콘서트, 같이 가자." "..." "그리고 사귀자." 도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답은 어차피 하나였으니깐. 처음에는 인정하기가 싫었지만 점점 무뎌져가기 시작했다. 너는 이미 내게 일상화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미 너와 함께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응." 너는 이미 내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