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누나는 틱틱대면서도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었다. 너무나 오래 봐온 누나가 내 친구의 아내라는 것이 다시금 믿겨지지가 않아서 몇 번을 더 쳐다봤다.
"뭘 봐."
"아닙니다."
나는 금세 눈을 깔았다. 저 누나 너무 무섭다. 아직도 나를 째려본다.
오늘만큼은 선우가 나와 함께 자겠다고 했다. 새끼.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봐? 나는 괜시리 우스갯소리를 했다.
신혼방에 침입하기 싫어서 거실에 이불을 펴고 선우와 한자리에 누웠다. 누우니까 옛날 생각난다. 나는 천장을 보고 옛 추억을 생각했다. 많은 일이 있었던 1988년. 나의 짝사랑의 시작. 그리고 1994년, 첫사랑의 아픔. 아팠지만 그 어느 것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옛 친구와 함께 누우니 더욱 생생하게 생각이 났다.
야. 너 그때 기억나냐? 선우와 한자리에 누워 추억여행을 떠났다. 금세 우리는 18살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우린 이제 30살을 바라보게 되었지만.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들에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정환아.
너 왜 연락 안했냐? 계속 피해왔던 질문이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은 많이 궁금할 것이다. 내가 급하게 인사도 없이 쌍문동을 떠난 이유. 우리 집이 이사한 것도 어느 정도 나의 입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심했다. 이 친구들은 나를 이리도 그리워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내가 이 일로 인해서 깨달은 것은 내가 삭히고 혼자 참는 것이 사랑은 물론 우정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냥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혼자만 알고 싶지 않았다.
"..."
"...덕선이 때문이지."
생각지 못했던 선우의 말에 동공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나는 습관처럼 아니라고 하려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어이없다는 듯이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보는 선우의 눈빛이, 내 솔직한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맞구만?"
"... 어떻게 알았냐?"
허이구. 선우가 맥빠진 소리를 냈다. 넌 진짜 나쁜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나랑 동룡이랑 택이는 뭔 잘못이냐. 나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허용될 수 있는 말을 머리 속에서 골라내고 있었다.
"어느 날 보라가 그러더라. 니가 안 오는 이유가 아무래도 덕선이 때문인 것 같다고."
보라 누나가...?
"아니면 눈치 없는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하여간 진짜였다니."
선우가 이어서 말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어떻게 하든 우리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을꺼야. 우리가 꼭 그렇게 만들거고.
선우는 달라져있었다. 옛날에, 너무 옛날이라 말하기도 이젠 우습지만, 덕선이가 자신을 좋아하던 것을 눈치채지 못하던 선우가 아니었다.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채주고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혼자라고 생각했다.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그리고 없어도 상관없다고 내 자신을 위로했었다. 그저 혼자 견디면 괜찮아질거라고. 다들 겪는 첫사랑이라고. 그런데 나는 너무 힘들었다. 하필 내 첫사랑이 매일 보는 소꿉친구라는 것도. 내 첫사랑의 사랑 또한 내가 너무 잘 알고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라는 것이. 나는 선우를 안고 펑펑 울었다. 선우는 말 없이 내 등을 두드려줄 뿐이었다.
날이 밝았다. 쌍문동 5인방이 다시 뭉치기 위해 하나같이 다들 휴가를 냈다. 나는 어쩐지 머쓱해졌다. 아이고 정환아~ 너무 오랜만이다잉. 나를 반겨주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에 또 괜히 부끄러워졌다.
"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이죠."
"아따~ 그래도 염치는 있구마잉. 나는 정환이가 어디서 콱 죽어버렸는 줄 알았네."
내가 왔다는 이유로 다시 북적거리는 쌍문동의 공기가 너무나도 행복했다. 당연한 일들이었는데. 아파트에서는 다들 옆집에 누가 사는 지 조차 모른다.
"정환아."
택이가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어떤 내용인지 예상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