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이야기의 마지막
지금 시작합니다.
[블락비/피코] 인사 08 完 |
서로의 머릿결을 쓸어주며 사랑을 확인하던 까만 밤이 지나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 곁에 우지호는 없었다. '지호야? 우지호?' 몇 번을 불러보아도 작은 방 안에 메아리치는 것은 지훈의 목소리뿐. 불길한 예감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선 지훈은 좁은 집안을 돌아다니며 지호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지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어제의 기억에 지호가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지호의 가방을 눈을 돌려 살피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가방마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놀란 지훈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추리닝 바지와 티셔츠를 대충 주워 입고 현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호야!! 우지호!!!"
한겨울에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친 얇은 차림새로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지훈을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지훈은 그런 시선조차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제 곁에 두고서도 지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달리고 또 달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며 지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지호를 닮은 사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지훈의 눈에선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지훈은 망연자실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호의 번호를 눌렀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자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온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하. 어떻게-. 맥이 풀린 지훈은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허탈한 마음에,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어젯밤, 제 사랑고백에 응답하듯 입을 맞춰오던 지호. 곁에 있어달란 제 말에 눈물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지호였다. 그런 지호를 보며 그의 모든 아픔까지 끌어안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호를 안았다. 오로지 지호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지훈이었는데.....- 지금, 지훈의 곁에 지호는 없었다. 결국은 지훈의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듯 지호는 떠난 것이다. 빛을 잃은 흐릿한 눈으로 지호의 가방이 놓여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지훈은, 가방대신 놓여있는 곱게 접혀진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비틀거리며 다가간 지훈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인 쪽지를 주워들었다. 반듯하게 접으려 애를 쓴 듯 각이 잡힌 쪽지를 보며, 그 순간에도 손재주가 좋았던 지호가 생각이 났다.
-To. 사랑하는..... 표지훈. 지훈이에게- 로 시작하는 편지엔 한눈에 보아도 익숙한 지호의 필체가 가득했다. 먼저 잠이 들어버린 저를 두고서 밤을 새워 편지를 써내려갔을 지호의 모습이 눈에 선해 지훈의 코끝이 찡해졌다.
-우선, 나 많이 미워해도 된다. 많이 미워하고, 참 나쁜 새끼였다고 실컷 욕하고, 그러다가.., 나 같은 건 빨리 잊고 살아…….
네 곁에 있겠다고 했는데, 난 도저히 자신이 없다. 하루하루가 참 힘이 들 거야.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모습 보여주는 것도. 계속 변해가는 내 모습을 지켜볼 너도…….
그래서, 난 떠나려고 해. 병신 같은 우지호, 끝까지 용기가 없어서 마주보고서 말을 못하고 이렇게 편지로 대신해. 나를 붙잡을 너를 알아서, 네 눈물에 약해질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잠이 든 네 얼굴에 몰래 하는 입맞춤으로 대신해.
그래, 우리 지훈이. 잠 든 모습을 이렇게 자세히 뜯어본 게 언제였을까. 아마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아. 고등학교 다닐 때엔 매일 옆에서 잠만 잔다고 구박했었는데……. 지금 보니 잠자는 모습도 잘생겼네!ㅋㅋ (구라 아님) ........................................-
지훈이 너무 마음아파하지 않길 바랐던 지호였을 텐데, 손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쓴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 내려갈 때마다 지훈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ㅋㅋ…….장난스러운 그 말투와는 모순되게도, 지호의 눈물자국에 번져버린 글씨를 보며 지훈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터졌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많아진 눈물자욱에 글씨가 번져 읽기 힘들었다. 밤을 새워 홀로 담담히 이별을 준비했을 지호가 생각이 나 지훈은 목이 메었다.
-............................. 지훈아. 그동안 많이 고마웠어. 널 만날 수 있어서 난 참 행복했다! ........사랑한다.............-
마지막 줄까지 모두 읽었을 때, 지훈은 편지를 품에 안고 울었다. 멈추지 않는 그 울음은, 마치 아이가 우는 것 같기도, 사랑을 잃은 짐승이 제 마음을 말로 할 수 없어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쉬지 않는 눈물은 계속 볼 위로 내려앉고, 눈물로 흐릿해진 눈은 이미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젠 닿지 않을 지호를 향해, 미처 다 하지 못한 사랑에,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에 지훈의 눈물은 멈추지 못했다. 열린 커튼 틈 새로 밝은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
지호가 떠나고, 홀로 잠이 들고 홀로 눈을 뜨는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차라리 몸이라도 아팠으면 좋겠는데, 날마다 마신 술에 속이 쓰린 것을 빼면 아무런 이상조차 없는 제 몸뚱이가 지훈은 원망스러웠다. 제가 아파지면, 똑같은 아픔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 그러면 지호가 다시 저를 받아주지 않을까. 같은 아픔을 서로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일말의 기대였다. 지호를 안았던 그날 밤, 자신은 모든 각오를 하고선 에이즈를 피해 가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나는 멀쩡한 걸까.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수염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깎지 않아 지저분하게 자라있었고, 술을 제외하곤 밥조차 제대로 먹지 않아 움푹 패여 버린 볼과 눈 밑으로 내려온 다크서클……. 꼭 우지호를 닮아있었다. 이젠 더는 볼 수 없는 지호의 흔적을 제 얼굴에서 찾는다. 거울 위로 겹쳐지는 지호의 모습에, 얼굴에 맺힌 물기를 닦지도 못하고 거울을 쓸어내리는 지훈에게서 다시 눈물이 터졌다.
. . .
헬쓱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주위 사람들은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특히 재효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신경써주며 병원 같은 건 가지 않겠다는 지훈을 다그쳤다. 걱정이 돼서 그런다며 직접 병원에 데려다주기까지 하는 재효를, 지훈도 오늘만큼은 거절하기 힘이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 지훈은 문득 생각이 났다. 3개월이나 지났다면 이미 병이 진행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든 지훈은 의사에게 에이즈검사를 요구했고, 특별한 증상이 없다는 지훈을 의사는 탐탁지 않게 바라보면서도 간호사를 불러 검사실로 안내했다.
"표지훈씨?"
"네."
"여기 앞에 놓인 의자에 앉고, 옷소매 좀 걷어주시겠어요?"
묵묵히 제 팔을 걷어 올리는 지훈에게 선한 인상을 한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에이즈 검사를 하시는 거냐고. 혹시 미심쩍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고. 지훈은 그 물음에 고개만 가로저었다. '여기서 이 검사를 하면서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부디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면 좋겠어요.' 말하는 남자에게 지훈은 그저 뜻 모를 미소만 띄울 뿐이었다.
"자, 피 뽑고 이틀정도는 샤워 금지입니다. 문지르지 말고 꾹 눌러주세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귀여운 캐릭터 밴드를 지훈의 팔에 붙여주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런 지훈의 모습에 그는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며,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지훈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결과는 20분 정도 후에 나와요. 앉아계시면 이름 불러 드릴 거예요.' 라고 말하며 그는 뒤돌아갔다. 지훈은 복도 의자에 앉아 피를 뽑은 자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호도 그랬을 테지. 이 길게만 느껴지는 지루한 시간을 홀로 보냈을 테지. 자신과는 다르게, 두려움에 떨면서……. 꿀꺽- 침을 삼키는 지훈의 입이 썼다.
-
"표지훈씨-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 지훈이 간호사로부터 검사결과가 적혀진 종잇장을 받아들었다. 어느새 지훈의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유의사항과 기타 검사에 관한 안내사항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지훈의 눈에 들어온 두 글자.
검사 결과,
'음성'
종이를 쥔 지훈의 손이 떨린 것 같다. 아니, 그건 지훈의 팔이었을까? 다리? 아니면, 지훈의 몸, 그 자체였을까. 침을 삼키는 목울대까지도 부들부들 떨렸다. 제 몸 안의 그 어떤 것도 지호를 괴롭히던 바이러스에 잠식되지 않았다. 그렇게나 우지호를 한계선까지 몰아붙이던 그 저주받은 병은, 제 몸 안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종이엔 그저 '음성'이라는 짤막한 글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지훈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 괜찮으세요? 표지훈씨?' 지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거는 간호사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훈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에이즈래...-' 붉게 젖은 눈으로 말하는 그 날의 목멘 소리만이 아른거렸다. 정말 지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달디 달던 그 향기도, 미소도, 구박하던 목소리, 에이즈라는 병마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지훈을 떠났다. 오로지 지훈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을 남기곤......................
지훈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 . .
-P.S. 말 안 듣는 표지훈. 나중에 꼭 병원 가봐. 돼지 멍청이 바보야.....네가 아프지 않기를, 항상 기도할게......-
<FROM. 표지훈을 많이 많이 사랑하는 우지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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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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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네요! 끝! 드디어 완결이 났네요 정말이지 일주일동안 폭풍과도 같은 연재였습니다 공지에 띄웠던 말을 또 하게 되네요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는 말 밖엔 ㅠㅠㅠㅠㅠㅠㅠㅠ 마지막화까지 함께 달려주신 모든 분들 정말정말 감사드려요 끈기없는 제가 이렇게 완결을 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셨어요
어떠한 부연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그저 글에 나타난 지호와 지훈이의 마음에 공감해주시길 바라는 바이지만 혹시나 제가 곶아손이라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계시다면 짧게 Q&A 타임을 가져볼까요....?ㅋㅋㅋㅋㅋ; 궁금한점은 댓글에 달아주시면 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정말이지 너무 감사드리고, 혹시나 울고계시는 분 있다면 눈물 닦으시고! 코주부는 이만 사라집니다^^ 다음번에 좋은 소재가 생각나면 또 다시 글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에도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S2 스릉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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