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비밀
세훈x준면
w.BM
일이 끝나고 집으로 왔을 땐,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 여겼던 세훈의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고, 시린 새벽의 싸늘함만이 가득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차가운 바닥을 밟으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일단 집안에 가득한 냉기부터 없애야할 것 같아, 보일러를 가동 시켰다. 위잉, 하고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어 걸어둔 뒤에 다시 거실로 나왔다. 잠시 거실 한 가운데에 서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먹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서성거렸다.
문득, 바닥에 어질러진 옷가지 같은 것들이 눈에 보여 한데 모아 세탁기에 집어넣고, 내 방에서도 빨랫감을 가져와 모조리 세탁기에 넣어 세탁기를 돌렸다. 고요한 집안에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와 세탁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래도 뭔가 시원찮아 이참에 장례식 이후로 하지 않았던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텔레비전 주변에 놓인 물건들을 정리하고 물티슈를 뽑아 먼지를 닦아 내었다. 그 위로 다시 얹어지는 하얀 먼지가 보였지만 그것들을 다시 닦아내어봤자 또 다시 얹어질 것이란 걸 알기에 그냥 넘어갔다. 부엌 옆에 있는 다용도실의 문을 열어 청소기를 꺼내왔다. 집안에 청소기 소리가 울리니, 세탁기가 돌아가며 나오던 잡음이 묻혔다. 꽤, 열심히 거실을 쓸고 닦고 하다 보니 땀도 나는 것 같았다. 청소가 끝나고 시계를 보니 동이 터오고 있었다.
퇴근한지 한 시간 가량 지난 것 같은데, 그럼에도 세훈은 집에 오지 않았다. 청소에 집중하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지만, 청소가 끝나고 나니 세훈이 없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고작 이틀 동안 같이 있던 사람인데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다니, 놀랍기도 했지만 무엇인가 불편해 인상을 찌푸리고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문득, 아랫입술을 살살 문지르며 입술 망가지면 보기 흉하다고 말해주던 찬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줄곧 씹고 있던 아랫입술을 혀를 내어 쓸며, 입을 다물었다.
또 다시, 의중을 알 수 없었던 세훈과 찬열의 행동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꾸만 키스해도 되냐며 묻던 세훈과 유난스럽게도 다정했던 찬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허튼 생각을 몰아내었다. 그러다가 청소에 집중하면, 다른 것들은 생각할 틈이 없다는 생각에 방으로 들어와 방청소도 시작했다.
줄곧 써왔던 방임에도 불구하고, 낯 설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것 같은 낯 설음 이었다. 옷걸이엔 옷이 그대로 있었고, 잘 보진 않았지만 꽤 많은 책들이 책꽂이에 있었고, 이부자리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방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가득했다. 청소할 것도 없이 청소가 끝이나 버렸다. 찝찝하긴 했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낯선 찝찝함을 뒤로한 채, 동생 방으로 들어갔다.
동생의 방은, 확실히 내 방과 분위기가 달랐다. 분명히 내 방과 같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정리된 옷들이 있었고, 책꽂이에 일렬로 정리 된 책들이 있었고, 이부자리도 잘 정돈 되어 있었지만 동생의 방이 외려 더, 사람 손을 많이 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동생의 방도 이렇다 할, 청소할 만 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죽은 이의 물건을 손댄다는 것이, 무엇인가 께름칙하기도 했었다. 어쨌건 간에 동생과 나는 완벽한 타인이라는 생각도 한 몫 하긴 했었다.
대강대강 방을 둘러본 뒤에 나가려는 찰나, 세훈이 올려둔 것으로 추정되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세훈과 종인이,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새삼 처음 보는 것 같은 동생의 웃는 모습에, 같이 미소가 지어 지기는커녕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김종인 너는, 뭐가 그렇게도 좋아서 웃고 있는 건지. 분명 세훈이 종인을 쫓아다녔다고 했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모습이, 징그럽게만 보였다. 호스트로 일하는 동생을 뻔히 알면서도 좋다고 쫓아다녔던 오세훈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동성애자였고, 호스트바에서 호스트로 일했던, 나와 어머니가 다른 동생. 나와는 다른, 완벽한 타인.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종인을 향해 웃어 보이는 세훈의 사진 위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키스해도 되냐고 묻던 당돌한 세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생의 애인이었기에, 입은 거부의 말을 내뱉었지만 막상 밀어내지 못했던 그 얼굴. 액자를 집어 들어 차가운 유리 위로 입술을 맞대었다. 그리고 액자를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에 짜증이 일었다. 정확히는 그 옆에 있는 동생의 모습이 싫었다. 손에든 액자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액자 유리가 깨졌다. 그 모습이 마치, 사진에 금이 간 것 같았다. 그것도 동생의 웃는 얼굴위로 무수히 떨어진 유리조각들이 동생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 같아 보여,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더러워, 김종인.
액자의 잔해를 치울 생각은 없이, 방에서 나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세훈은 여전히 집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액자를 깨트림으로서 이유 모를 승리감에 휩싸여 그것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세훈이 얼마 안 있어 집에 올 것이라는 자신감에, 뒤틀렸던 심사가 다시 풀어지며 긴장이 이완되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세훈도 여기 올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자신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땐, 오후 두시 정도 되어있었다. 덮고 있지 않았던 이불을 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훈이 왔었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으나, 덮개로 덮여진 식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건가 싶어 동생의 방으로 가니, 그곳에도 세훈은 없었다. 문득 새벽녘에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가 고의로 깨트렸던 액자가 떠올라 바닥을 보니, 깨진 액자의 잔해는 이미 치워진지 오래였다. 액자가 놓여있던 자리에는 포스트잇 하나가 놓여있었다.
[질투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제 생각이 맞았다면 작전 성공인 듯싶네요. 밥 차려놨으니 먹어요.]
질투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새벽 즈음에 액자를 깨트린 것은 굉장히 충동적이었다. 이렇다 할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고 본다. 다만 동생이 더럽게만 느껴졌고,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싫었을 뿐이었다. 음, 이런 걸 두고 질투라고 하는 것인가. 손에 들고 있던 포스트잇을 입술에 대었다. 아득한 잉크냄새와 종이냄새가 맡아졌다. 액자를 깨트린 그 순간부터, 나와 세훈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동생의 방은 기분이 나빴다.
내 방과는 달리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은 방. 거울 면에 비춰지는 내 얼굴이, 흉물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놀라, 급히 거울에서 시선을 거두고 포스트잇을 원래의 자리에 붙여놓았다.
방에서 나와 식탁 덮개를 들어 올리니, 반찬의 개수가 조금 더 늘어있었고, 늘 내가 만들던 북어 국이 아닌 김치찌개가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숟가락 옆에 또 다른 포스트잇이 있었다.
[매번 같은 것만 먹지 말고 다른 것도 좀 먹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오랜만인 것 같은 제대로 된 식탁 풍경에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저릿했다. 어쩌면 동생이 세훈의 집에서 머물다 온 날에도 이런 밥상을 받았을 것 같았다. 난 동생이 요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동생은 아마 요리를 못하는 줄로 안다. 식어버린 김치찌개였지만 역시 맛은 좋았다. 세훈이, 이렇게 정성들여 상을 차려주는 대상이 동생에서 나로 옮겨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어차피 동생은 죽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생은 이미 죽었고, 그러므로 세훈과 무엇을 하든 미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
이전과는 달리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하니, 어쩐 일인지 찬열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밝게 웃으며 찬열에게 인사를 하니, 찬열 역시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놓고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탈의실로 들어가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장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세훈이 가게로 찾아왔다. 오늘 가게 정리 당번이 나였기에 세훈이 온 것이 매우 반갑기도 했으며,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더욱더 반가웠다. 찬열이 남아서 가게 뒷정리를 도와준다고 했지만, 세훈이 왔으니 되었다고 하며 찬열을 먼저 집으로 보냈다. 찬열은,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으나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가게를 나섰다. 세훈의 시선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찬열의 손에서, 찬열에게로 옮겨가는 동안에 매섭게 변한 것 같았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진도 버렸어요.”
“……그래?”
“액자를 깨트려버릴 정도로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
세훈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세훈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음성에 어린 웃음기에 분명히 세훈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도 버렸다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져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찾아와준 세훈에게 줄 요량으로 칵테일 컵을 돌리면서도 자꾸 생각이나 비싯비싯 웃음이 나왔다. 완성이 된 칵테일을 컵에 담고 입 꼬리를 씰룩이며 겨우 표정관리를 한 뒤에, 뒤를 돌아봐 세훈에게 칵테일 잔을 건넸다.
크림과 달콤한 리큐르들이 어우러져 옅은 핑크색의 부드러운 음료 위에 뿌려놓은 가니쉬가 제법 괜찮게 나온 것 같았다. 잔을 집어 드는 세훈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달콤한 향내에 의외라는 듯 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보고는, 한 모금 마셨다. 음료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일렁이는 세훈의 목울대를 보니 아랫배 쪽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묘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어때?”
“음… 굉장히 달콤하네요. 저번에 주었던 것과는 달리. 그건 약간 오렌지주스 먹는 기분이었는데.”
“아, 데킬라 선라이즈 라고 오렌지 음료와 데킬라가 섞인 거야. 널 보면 그 음료가 생각나서.”
“왜요?”
“데킬라 선라이즈가 멕시코의 일출을 형상화한 것이거든, 넌 마치 타오르는 태양빛 같아.”
“타오르는 태양,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게요. 그럼 이건 뭐예요?”
“…비밀. 일단 마셔, 다 마시면 가게 정리하게.”
설거지를 핑계로 세훈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금 느끼는 것들이 확실해지면 그때 오늘 세훈에게 준 칵테일의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물론, 세훈이 마음먹고 이름을 찾으려고 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는 꽤 유명한 칵테일이긴 했었다. 하지만 어쩐지 세훈이라면 굳이 알아볼 것 같진 않았다.
세훈이 마신 칵테일은 ‘ P.S. I LOVE YOU ’ 였다.
BGM. 쇼팽 - 즉흥환상곡(Remix ver.)
참고용 이미지입니다. 데킬라 선라이즈 P.S. I LOVE YOU 이번편은 왠지 보시는 분들 전부 눈이 엄청 아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수정하고 그러면서도 눈이 아팠거든요, 매우(...) 음, 어쩌면 너무 급전개가 아닌가 싶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글의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이전 편부터 준면의 감정선을 위주로 다루면서 많이 드러내었다고 봅니다(물론 제 필력의 한계로 인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넘긴 부분이 많을 겁니다...) 뜬금없이 왜? 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일종의 변명이랄까요... 흡. 이번 글을 쓰면서 세주너가 늘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팬픽이란 것을 쓴지 대략 4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 기간동안 받았던 관심중 제일 큰 관심이었어요. 그래서 많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 배경에는 세준의 멋쁨을 알아차린 분들이 많다는 것이 있겠지요. 더 많은 분들이 세준을 좋아해주고, 세준 글을 많이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봐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또한 세준에게도 감사할 따름이구요. 물론 지구상에 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겠지만...^_T +가족의 비밀 암호닉 해주셨던 분들입니다. 해커스님, 새우튀김님, 빡구님, 뿌잉뿌잉님, 매미님, 필통님, 새싹님, 닌니님, 은하수님, 엠비님, 지우개님, 네디님, W님, 긍긍님, 샤워기님, 하트님 부족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댓글에, 암호닉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사실 암호닉 하지 않으셔도 텍파를 다 드리는데도 참...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따로 헌정 글이라도 써드려야 할까요...흡. 아, 빠지신 분들 있으면 꼭! 말씀해주세요. 늘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랄게요, 항상 봐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