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Concerto
No.3 mov
(BGM- 불꽃심장-가만히 끌어안고)
W. 두번째손가락
21.
까만 밤이 내려앉은 밤은 고요했다. 진환은 발소리를 죽이고 방에 들어가 손을 더듬었다. 캄캄한 방 안에서 자꾸 헛손질을 하며 벽을 더듬자 스위치가 잡혔다.
지금은 자겠지. 얼마 안있어 무채색의 시야가 진환의 육안에 잡혔다.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있는 동혁의 마른 등을 보며 진환은 조용히 스위치에서 손을 뗐다.
손을 마사지하다 잠들었는지 침대 한 켠에는 얼음주머니가 놓여있었다. 무리하면 안되는데.. 진환은 얼음주머니를 책상에 올려놓고는 조금 부은 동혁의 손을 잡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괜찮아질까. 해줄 수 있는게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동혁이 반대편, 아니.. 다른 오케스트라에 들어간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그의 길을 찾았다면 오히려 좋을 일 일테니까.. 다만..
"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얘길 들었다는게.. 나는 너무 안타까워, 동혁아.. "
진환이 동혁의 손을 조심조심 주물렀다. 혹시라도 내 얘기를 듣고 있지는 않을까. 잠에서 깨는 건 아닐까..
자는척하는 건지 정말 잠이 든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의 동혁이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에게 그렇게도 가까운 사람이었구나. 그런 내가 네게 신경을 못 쓰고 내 갈 길만 가기에 급급했구나..
" 미안해.. "
" ...... "
" 정말로 미안해.. "
만약 듣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일은 다시 한 번 웃으면서 나를 봐주면 안 될까.
침대 앞에 쭈그려 앉아 손을 주물거리던 진환의 눈이 서서히 감겨왔다. 방금 잠이 든 것 같은데 어느새 햇살이 진환의 얼굴을 덮었다.
그 빛에 다시 눈을 떴을 땐, 진환의 손은 텅 비어있었다. 급하게 나간 듯 이불을 헤집은 흔적만이 그 자리에 동혁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선잠을 잔 머릿속은 개운하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밑에서부터 아리게 퍼지는 느낌에 무게중심을 잃고 동혁의 침대로 쓰러졌다.
밤새 앉아서 잠들었던 다리가 저리다. 분명히 그가 깨워줄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코 끝이 찡했다.
진환은 무심코 제 침대를 쳐다보았다. 그 흔했던 소보루 빵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맛이 없었던 그 빵이 오늘만큼은 사무치게 그리웠다.
" 왜 죽상이지. "
" ... 안녕. "
" 다리는 왜 절어. "
기숙사 로비 앞에서 기다린다는 준회의 연락에 진환은 급히 악보를 챙겨 방을 나섰다. 한 마디 들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인사도 생략하고 한다는 말이 그게 뭐야.
진환이 괜찮다고 말하며 콩콩대다 비틀거리자 준회가 재빨리 그의 등을 받쳤다. 알겠으니까 조심 좀 해.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드는 진환은 준회의 손을 한사코 거절하곤 연습실까지 그의 코트 자락을 잡고 걸었다.
절뚝거리며 천천히 걷는 진환의 속도에 맞추다 보니 준회는 거의 기어가는 수준에 가까웠다.
천천히 걷는 게 지루한지 조금 멍해 보이는 그였지만 진환은 침묵하는 그가 오히려 고마웠다. 준회는 어제 룸메랑은 어떻게 됐냐와 같은 사적인 질문은 일체하지 않았다.
괜찮냐. 안 괜찮다. 조심해라. 그것으로 끝. 고민을 보채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모습은 신기했다. 말하면 또 가만히 들어주니 관심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 나는 가끔 네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 "
" 쓸데없는 생각이네. "
" 그렇지? "
" 응. 앞이나 보고 걸어. "
아아. 그래야지. 진환이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래에서 본 준회는 턱에 군살 하나 없이 잘생겼다. 넌 쓸데없는건 하나도 안 키우는구나.
"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
" ... 내가 왜 너와 나의 이야기 외의 것을 궁금해해야 하지. "
" ...... "
" 온전히 네 얘기라면 궁금하지. 미친 듯이 알고 싶어. 하지만 그 외엔 관심 없어. 네가 하고 싶다면 들어는 주겠지만. "
" ...... "
" 얘기하고 싶어? "
도리도리. 힐끗 저를 내려다보는 준회에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무섭다.
별 표정을 담지 않은 그의 눈에서는 '다른 새끼 입에 담지 마'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못하겠다.
진환이 지레 겁먹어 코트 자락을 놓자 준회의 손이 그를 잡았다. 왜 놓냐.
" 잡고 있을 땐 솜방망이 같은 게.. 왜 떨어질 땐 바위가 떨어진 것 같고 난리야. "
" ... 무슨 말이야? "
" 놓지 말라고. "
끄덕끄덕. 이번엔 저를 보지 않는 준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걸 봤을까? 별 말 없는 걸 보니 보지 않았어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교정을 돌아다니는 심심찮은 학생 수에도 준회는 손을 놓거나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원도 지원이지만, 준회도 만만치 않게 뻔뻔하구나.. 첫날 퀵보드를 타고 교정을 누비던 지원이 떠올랐다. 그거랑 이건 경우가 좀 다른가.
민망함에 진환이 손을 꿈질거릴수록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이 다부진 손에 완전히 봉쇄되었다. 손깍지 낀 마디 마디에서 뛰어오는 맥박이 그대로 전해졌다.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이 닿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사랑하는 것과 닿았을때의 느낌이란. 살이 녹아버릴 만큼 황홀하다. 아주 소소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얼레, 둘이 같이 오냐? "
" 기숙사에서부터 만났.. 손은 왜 그 모양이야? "
오케스트라 연습실 앞에 다다르자 지원이 그들을 반겼다. 손을 휘적이는 그의 손에는 새하얀 붕대가 묶여 있었다.
쌈박질이라도 했냐? 악기 한다는 사람이 손 다루는 꼬라지하고는. 준회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그의 손을 살폈다.
묻는 말투는 다정하진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걱정이 베여있었다. 실실 웃는 얼굴이 준회 앞에서 왔다갔다거렸다. 괜찮아.
" 형이 싸움 좀 하잖아. 17대 1? 하, 명승부였지. 가드 올리고! 가운데로! 위아래 위아래! "
" 지ㄹ.. "
" 뭐? 정말?! "
지랄이야. 하고 말하려 했던 준회의 음성이 진환에 의해 박살 났다. 저걸 믿냐. 한심하게 진환을 내려다봤지만, 순진한 어린 양은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뭔가 동심을 파괴하는 것 같아 준회는 입을 다물었다. 진환은 이미 지원의 무용담에 넘어간 뒤였다.
뇌도 안 거치고 혀끝에서 방금 지어낸 허구들이 쉴 새 없이 지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래서 병신한텐 먹이를 주면 안 되는 건데..
김진환이라는 먹이가 이 병신에게 너무도 큰 작용을 했다. 준회가 한숨을 지을 때쯤, 연습실에서 나온 한빈이 빽 소리를 질렀다.
" 형!! 여기서 뭐 하는 거에요!! "
" 어..? 비, 빈아.. "
" 내가! 손 나을 때까지! 연습실 근처엔! 오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
" ... 했.. 했어.. 했습니다.. "
" 근데 뭐 하는 거야. 여기 왜 있어. 진짜 정신 안 차릴래요? "
갑자기 튀어나와 쏘아붙이는 한빈에 지원은 금세 초라해져 고개를 숙였다.
진환은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무용담을 이야기하던 자신의 영웅이 고개를 숙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한빈이가 더 무섭구나..
겁먹은 그는 아무도 모르게 준회의 등 뒤로 몸을 슬슬 숨겼다. 준회는 제 뒤로 스멀스멀 움직이는 진환을 영문도 모른 채 가려주어야 했다. 김한빈이 좀.. 무섭긴하지.
아까까지만 해도 짜증이 났던 병신이 불쌍해지는 순간이다. 지원을 보던 한빈의 눈이 옆에 서있던 두 사람을 향했다.
준회가 움찔하며 그의 눈치를 보다 한 걸음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준회의 몸 뒤로 진환이 완벽하게 가려져 한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연습하러 왔으면 빨리빨리 들어가. 환자랑 노닥 거리지 말고. "
" 가자. "
" 으응.. 미안해, 한빈아. "
" 빨리 와. "
준회가 진환의 팔을 당겨 연습실로 끌었다. 서둘러 사라지는 두 사람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쾅. 하고 문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호통치는 한빈과 닮아 지원이 몸을 떨었다. 힐끔거리고 본 한빈은 여전히 화가 난 표정이다. 한빈이 성큼성큼 다가와 지원의 팔을 살짝 잡았다.
" 빨리 기숙사로 가요. 여긴 왜 온 거야. 연주도 못하면서. "
" 너 보려고 왔지.. "
" ...... "
" 너 보고 싶어서.. "
한빈에게 붙들린 팔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대던 지원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조심조심 제게서 떨어뜨린 한빈의 손이 제 자리를 찾자, 지원은 휴 하고 안도했다. 손이 부서진 건 본인인데 한빈을 환자처럼 대하는 광경이었다.
한빈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완전히 몸을 밀착 시켰다. 코앞으로 다가온 한빈의 얼굴에 숨이 훅 하고 막혀왔다.
지원은 할 말을 잃었다. 비.. 빈아? 한동안 말없이 지원을 노려보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 다 봤어요? "
" 어..? "
" 나 보러 왔다며. "
" ...... "
" 실컷 보여주고 있잖아, 지금. "
눈앞에서 까만 눈동자가 반작였다. 숨이 막혀온다. 지원이 흐려질뻔한 이성을 다 잡고 한 걸음 떨어져서 그를 향해 씩 웃었다.
" 나 심장 떨어져. "
" ... 맨날 내 얼굴 들여다봤으면서 무슨. "
" 오늘 Honey가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오글거린다구요. 툴툴거리던 한빈이 지원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 웅얼거렸다.
그래도.. 미안하니까.. 나 때문에 다친 거고.. 맨날 밀어낸 게 좀 너무했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한빈의 앞머리를 지원이 살살 쓸어내렸다. 행여라도 그의 눈에 찔릴세라 만지는 그 손길은 바보 같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 네가 왜 미안해? "
" 속상해서 그래요, 속상해서.. "
" 네가 뭐가 속상하냐구.. "
" 형은 팀파니가 찢어지면 속상하지 않아요? "
" ... 속상해. "
한빈이 지원의 손을 들어 제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그의 손짓은 지원이 저를 만지던 행위만큼이나 조심스러웠다.
붕대를 보는 그의 눈이 상처보다 더 아프다. 지원은 입이 바싹 말라 왔다.
" 나는 지휘자고, 형은 내 악기에요. "
" ...... "
" 잊지 마요. 다치면 속상해. "
어떻게 말 하나하나에 가슴이 저려 오는지. 지원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한빈의 볼에 닿았다.
고마워 빈아, 네 덕에 나는 또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된다.
오케스트라 연습이 끝나고 진환과 준회는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한 시라도 빨리 한빈의 종례가 끝나길 바랐다. 백조. 백조를 연주해야 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은지, 김지원은 왜 다쳐서 팀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도록 한빈의 말이 길어지게 하는지.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을 기다리는 고딩처럼 진환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실은 그렇게 급한 연주는 아니다.
몇 번 연습해본 결과 신기할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아 맹연습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단둘이 있을 구실을 만들려는것뿐.
한빈은 말을 하다 말고 초조하게 저를 바라보는 두 사람에 괜히 심통이 났다. 왜 지랄들이야. 솔직히 일부러 쓸데없는 말을 첨가하기도 했다.
저 귀엽고, 허연 두 개새끼들이 낑낑대는 게 좀 웃기기도 하고.
"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칠게. 구준회랑 진환이 형은 화장실이 급한가봐? 둘이 손잡고 빨리 가버리지그래? "
한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환이 벌떡 일어나 준회를 찾아 쪼르르 달렸다.
얼씨구. 한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연습실을 나가버렸다. 지원이 형 보러 가야지.
" 오- 둘이 많이 친해졌나봐? 이번 월말평가 같이 한다며? "
" 잘해라, 진환아. "
승훈과 태현이 웃으며 진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마스코트마냥 팀에서 한껏 귀여움을 받는 진환은 넘치는 사랑에 헤벌쭉 웃었다.
" 야, 안가? "
" 응? 어어, 가자. 내일 봐, 얘들아! "
" 안녕~ "
진환은 승훈과 태현에게 손을 붕붕 흔들고는 앞서가는 준회에게 뿌다닥 달려갔다.
" 승훈이 형은 변태야. "
" 응? "
" 그 형 로리타야. 어린애만 좋아해. "
로리타가 뭐지. 묻고 싶었지만 일단 으응.. 하고 대답했다. 지난번엔 분명 승훈의 이상형은 연상의 여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진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했다. 아닌가, 연하였나. 그것도 어린애..?
" 태현이 형은 안 씻어. 그 형 일주일에 이를 한 번 닦을까 말까야. "
" 어? 아닌데.. 태현이 지난번에 얘기 할 때 치약 냄ㅅ.. "
" 그거 가글이야. 그 형 칫솔질을 안 해. "
" 아.. "
그렇구나.. 근데 그걸 어쩌라는 거지. 진환이 맹하게 쳐다보자 준회가 같이 다니지 마.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음.. 진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로리타랑 더러운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알았다고 해야 할 의무성을 못 느껴 피아노 건물로 갈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준회도 더 이상 별 말은 없었다. 진환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 놓은 것 빼고는 딱히 요란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원 상태로 정리하는 건 진환의 몫이었다. 오늘따라 머리를 건드리는 사람이 많다.
피아노 연습실8의 문을 열자 이제는 완벽히 사라진 동혁의 흔적에 진환은 다시 마음이 아려왔다.
대신 피아노 옆에 새로 생긴 의자 하나가 두 사람을 반겼다. 준회가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비로소 가슴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 뭐 해? 앉아. "
" 어..? 응.. "
진환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의 앞, 준회의 옆. 허공을 헤매다 제 자리를 찾은 것만 같다.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던 민들레 씨앗이 꽃 필 장소에 앉은 것처럼. 그리고 그곳은 시멘트 바닥이 아닌 따스한 흙 한 줌의 위였다.
진환이 말없이 피아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주. 숨을 쉬지 않는 영혼에게 전하는 그만의 안부였다.
진환이 연주하자 당연한 것처럼 준회가 그를 따랐다. 한 마디 예고 없는 시작이었지만, 비껴가는 음 또한 없었다. 한 마디로 완벽했다.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우아함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연주자들이었다.
몇 번을 연주해도 이 순간은 즐겁다. 함께 한다면 평생 같은 곡을 쳐도 좋을 것 같다. 연주하며 마주치는 시선뿐 아니라 박자가, 음들이 손을 잡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을 잡았던 그 마디마디가 연주에서도 맞잡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러지..? 혼자 연주할 땐 결코 알 수 없었던 감정들.
연주가 끝나고도 남은 긴 여운이 진환의 손끝에 남았다.
" 연습, 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
" 응? "
" 이 정도로 완벽한데 뭘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
" ... 그건 그래. "
본인들이 들어도 재수 없는 대화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하게 터진 웃음은 한끝에 걸려있던 둘 사이의 어색함마저 쫓아냈다.
함께 연주할수록 가까워지고 있다. 진환은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을 준회도 필시 느낄 것이라 장담했다.
" 넌 피아노랑 잘 어울려. "
" ... 너도 첼로랑 잘 어울려. "
" 어쩔 땐 낮았다가, 엄했다가. 의외로 앙칼지고, 눈 깜짝할 새에 당연하듯 높은 곳에 닿아있어. 아무리 봐도 피아노야. 네가 다른 악기를 했으면 웃겼을걸.
피아노 말고 첼로를 했다면.. 첼로가 널 연주하는 꼴이겠네. "
" 뭐...?! 너.. 너도 웃겼을걸? 네가 피아노를 연주했다면...! "
" 뭐. "
" 어.. 네가.. 피아노를 치면.. "
... 멋있겠다.. 너는 왜 그것조차 멋있어. 자존심 때문에 튀어나오지 못하는 말을 꾹 깨물고선 진환은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네가 피아노를 쳤으면 아주아주 이상 할 거야! 완전! 멍게 같아!
" ... 피아노 쳐 봐? "
" 칠 줄 알아? "
" 꾸준히 배우긴 했지. 뭐, 너만큼은 못하겠지만. "
" ㅊ.. 쳐 줘! "
" 이상할 것 같다며. 멍게 되기 싫은데. "
" 어..? 취.. 취소할게.. "
쉽게 꼬리를 내리는 진환의 말에 준회가 피식 웃고는 싫어, 하며 단칼에 거절을 놓았다. 진환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보고 싶은데.. 괜히 그렇게 말했다. 멍게라도 말하지 말걸..
" 지금은 말고. 월말 잘하면 그때 쳐줄게. "
" 정말?! "
" 응. "
" 약속해..! "
진환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유치하긴. 턱을 괴고 뚱하니 바라보던 준회가 마지못해 손을 들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어린애에게 맞춰주기란 참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져 준다.' 라는 표정이 팍팍 드러났지만 진환은 그것을 알아챌 재주가 없었다. 하얀 두 손이 약속의 증표로 고리를 걸었다.
도장까지 꾹 찍은 진환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제 손을 쳐다봤다. 준회는 첼로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어차피 월말은 잘 끝낼 거, 피아노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진환은 힐끔 본 그가 핸드폰을 집었다. 1년 전에 연락을 끊었던 피아노 교수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그의 손이 다급했다.
" 네가 그걸 왜 받아줘? "
" 응? "
윤형은 찬우가 물고 있던 샌드위치를 강제로 뺏어들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들인다 했는데, 윤형이 형은 개인가. 가끔 헤헤 웃으면 좀 개 같.. 아니, 강아지 같긴 한데.
찬우는 윤형의 질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입안에 있는 내용물을 우물우물 씹었다. 원래도 큰 그의 눈이 궁금증이 더 해져 조금 더 커졌다. 받아줘? 내가 뭘?
" 김동혁. 네가 끌고 온 거라며? 기숙사 같이 쓴다는 건 무슨 말이야. 연습실은 또 뭐고. "
" 아- 그거? 그냥 좀 도와준 건데요. "
" 그게 '좀' 도와준 거야? "
" 기숙사야 뭐.. 김진환이랑 같이 쓴다니까 불편할 테니 내 방 오라 한 거고. 내 룸메가 좀 방탕하거든. 방에 안 들어와. 암튼 연습실은 내 출입증 줬는데요?
피아노 연습실 쓸 수는 없잖아. 난 어차피 연습 안 하니까. "
찬우의 말에 윤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매일 빈둥거리고 놀면서 어떻게 A 클래스를 유지하는 거지.
나 이제 그거 먹어도 돼요? 하는 찬우에게 힘 없이 샌드위치를 던져 주었다. 찬우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이유 없이 동혁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 왜 그렇게 잘 해줘? "
" 잘해주는 것 같아요? "
" 말 장난하지 마. 너 이러는 이유가 뭐야? "
" 음.. 글쎄.. "
이유라.. 찬우가 윤형을 보고 웃었다.
" 재밌어서? "
" 뭐? "
" 재밌다구요. 내가 이렇게 하면 여기서 쪼르르, 저렇게 하면 저기서 쪼르르. 울그락불그락해서 달려오는 형이 재밌어서. "
" ... 하.. "
" 신경 쓰지 마요. 김동혁 걔는 방해도 안되고, 도움도 안 되니까. "
" 지금 봉사하는 거야? 그딴 마음으로? "
찬우가 다시 한 번 웃었다. 형은 나랑 얼굴만 닮은 줄 알았는데 생각하는 것도 판박이네.
" 형이 지금 내 앞에서 봉사를 운운하는 거예요? "
" ...... "
" 형도 김진환한테 그랬잖아. "
웃는 그의 얼굴에 힘이 탁 풀렸다. 찬우가 말했듯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그 느낌에 윤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두번째손가락/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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