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너를 만난다면 01
시작은 과거로.
그때 다녔던 어린이집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5살로. 쭉쭉 거슬러 올라가야 이야기의 시작이 보인다.
솔직히 5살이 맞는지 확실히 기억도 안 난다. 그냥 그쯤이었던 듯.
어린이집 이름을 포함해 그때 내가 좋아했던 반찬, 제일 친했던 친구의 이름, 꼭 챙겨보는 만화의 시작 시간도 기억나지 않지만 딱 한 가지. 깊게 박혀있는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되어 못된 사람들을 혼내주는 꿈도 꿨었고, 친구와 다툰 다음 날에는 울면서 화해하는 꿈도 꿨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도 꿨었다.
꿈을 꾸고 다음날 꿈에서 깨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어렴풋이 기억날뿐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근데 이번 꿈은, 그 남자아이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몇 개의 꽃을 꺾어 화관을 완성했는지까지 생생하게 머릿속에 박혀있었다.
마치 그 긴 밤 동안 다른 세계에 놀러 갔다 온 것처럼. 현실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갑자기 사라진 꽃밭과 남자아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다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문을 열어봤고 보이는 건 자기 전 보았던 우리 집이었다.
다시 꾸려고 침대에 쏙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눈을 꽉 감았다 떠도 보이는 건 그 칙칙한 천장뿐이었다.
다시 간다고 했는데.... 아! 밤이 아니니까 못 가는 거야! 밤이 되면 다시 꿈을 꿀 수 있을 거야!
그날처럼 해가 빨리 지길 기다렸던 적도 그렇게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적도 없었을거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른 채 시계만 쳐다보다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누웠고 다행히 금방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그 꿈을 꾸지 못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다시 그 꽃밭으로 갈 수 없었다.
****
"뭐? 누가?"
"근데 그냥 느낌이... 뭔가 아닌 것 같았어"
"무슨 소리야"
"얼굴은 분명 맞거든? 근데... 뒤가 좀 찝찝한 게..."
"뭐가 찝찝해?"
"그 애는 착했는데, 그 남자는 좀, 뭐랄까"
"뭐랄까?"
수업을 듣기 위해 품에 교재를 안고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걸어가며 아까 있었던 일을 남준이에게 말해주었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중고등학교를 같은 곳으로 다녔지만 말 한번 해본 적 없는 사이였다. 우연찮게 같은 대학까지 붙었고 신기하게 과까지 같았던 남준이는 입학 첫날부터 내 친구가 되었다.
공대라서 시커먼 남자들 틈에 나는 빛나는 홍일점이었는데 모르는 남자들보다 남준이가 훨씬 편했다. 몇 년을 봐왔던 얼굴이라 그동안 말도 터본 적 없었지만 꽤 금방 친해졌다.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현실적인 남준이에겐 있는 말, 없는 말, 속에 있는 고민까지 털어놨다.
하지만 꿈에 대한 얘기는 아끼고 아껴두었다가 이제 그만 놓아야지 하며 얼마 전 남준이에게 옛 추억을 들려주듯 그냥 그랬었다 하며 털어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 똑같이 생긴 남자아이가 나타난 거다.
"안 착해"
뭐야- 하며 남준이가 내 머리에 손을 올려 살짝 누르며 푸슬푸슬 웃었다. 진짜 안 착해... 약간 싸가지도 없는 것 같고... 그랬단 말야..
연락도 안 올 거 같아... 솔직히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긴 하지만.
"연락 오면?"
"연락... 올까?"
"올지도 모르지"
"글쎄..."
"만약 오면 그렇게 말할 거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어렸을 때부터 꾸던 꿈이 있는데 거기 주인공이 너였다고?"
"그렇게 말하면 또 자기 멋대로 생각해서 내가 지를 꼬시려는 줄 알겠지"
내 말에 남준이가 잠시 생각하다가 맞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누가 저걸 수작 부리는데 써먹었는지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 사람은 뭐 사실대로 말도 못하겠네.
잡담을 하며 걸어서 그런지 딱 맞을 줄 알았던 시간이 어느새 강의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고 우리 둘은 입을 닫고 얼른 뛰었다.
**
내내 혹시나 연락이 왔을까 하는 기대를 살짝 품고 하루가 저물어갔다.
실은 그 남자도 날 아는데 모르는 척할 수도 있잖아? 정말 날 보러 여기에 온 건지 어떻게 알아?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강의가 모두 끝나고 오랜만에 술 약속이 없어서 남준이와 헤어져 곧장 집으로 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이 왔나 폰을 들여다보고, 말끔하게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와 그 사이에 전화나 문자가 왔나 폰을 들여다봐도 내 폰은 여전히 텅텅 비어있었다.
뭐야 까인 건가. 아니!! 잘 좀 생각하라고! 넌 진짜 걔가 맘에 들어서 번호를 딴 게 아니라니까?
왜 자꾸 망각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연락을 기다리는 건 그래서가 아니라는걸.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두고 촉촉- 얼굴에 로션을 발랐다. 그러고 보니 더 이상 그 꿈을 못 꾼지도 4년이 흘렀다. 텀이 가장 길었던 게 3년이었으니까 4년이면 이제 끝인 게 분명했다. 다신 널 볼 수 없는 게 맞았다.
거울을 쳐다보며 예전에 꾸었던 꿈을 하나하나 떠올리는데
지잉-
침대 위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길래 히익!! 하고 엄청 놀라는 바람에 거울을 통해 또라이라며 나를 한심한 듯 쳐다봐 주고 침대로 얼른 뛰어들었다.
[이겼네]
뭐래. 모르는 번호로 이.겼.네 딱 세 글자가 문자로 날라왔다. 설마 그 남자일까 생각해도 뭐가 이겼다인지 통 감이 안 왔다.
그냥 씹을까 하다가 정말 혹시나, 진짜 그 남자면 어떡해.
[ㄴㄱ?]
기다린 티 안 나고 쿨해 보이니 딱 좋네! 문자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다시 지잉 진동이 울렸다.
[문자 말투 원래 그래요? 바꿔요 마음에 안 들어]
누구냐고 물었잖아. 꽤 만족스러웠는데 맘에 안 든다니 입이 삐쭉 나왔다. 니가 뭔데 내 문자 스타일을 바꾸라 마라야
다시 온 문자에 기대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누구냐니까 왜 대답은 안 해요 카페에서, 맞죠?]
정말 너랑 잘해보려고 그런 것도 아닌데 ㅎㅎ 붙이며 친절하고 예쁘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왜!?
[네]
*
*
*
*
"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실망하기를 몇 번. 점점 실망이 무뎌져 더 이상 일찍 잠에 들지도 기대를 하지도 않게 될 무렵, 다시 눈앞에 꽃밭이 보였다.
한 손에 모아 잡을 수는 꽃의 수가 5송이에서 13송이로 늘 정도로 남자아이는 커져있었다.
여자아이 역시 그림 대신 글자를 더 많이 알려주는 백합반으로 올라가 7살이 되었다.
시간이, 2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러버린 후였다.
기다리겠단 약속을 잊지 않았는지 그곳 그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하고 2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 그의 옆에 앉았다.
잊지 않았다. 2년이 흘렀지만, 더 이상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았지만, 오늘 꿈엔 나올까 기대를 하지 않은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때 그 꿈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 계속 여기서 기다렸어. 계속, 계속 기다려도 너는 안 와서 이젠 못 본다고 알았는데.... 나랑 약속한 거 꿀꺽하고 까먹은 줄 알았는데"
잔뜩 들뜬 목소리로 여자아이를 보며 말을 늘어놓다가 멈춘 남자아이가 빨간색으로 예쁘게 물든 꽃을 꺾어 여자아이의 귀에 꽂아주며 뒤에 이어붙였다.
"니가 왔어!"
환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꺄르르 둘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반가운 만큼 시간은 더 빠르게 흘렀다.
나란히 귀에 꽃을 꽂고 마주 보고 누워 꽃받침을 하고 실실거리며 웃고 있노라면 다시 헤어질 때를 감지한 남자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또 올 꺼지...?"
처음, 확신에 차서 물었을 때보다 힘이 빠진 말투로 남자아이가 물었다.
여자아이 또한 궁금증 가득한 표정보다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고 싶다고 언제든 올수 있는 곳이 아니란걸, 알았다.
"꼭 다시 올께! 맨날 맨날 힘내서, 여기 올라구 힘내서 꼭 올께!"
"내가 여기서 매일 기다리고 있을게!"
눈에 힘을 주고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뱉은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 다가가더니 작은 입술에 쪽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깜짝 놀란 여자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꽉 감았다 뜨면.
다시 눈앞은 잠이 들기 전 보았던 풍경이 그려졌다.
****
꿈에서 깨어나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뜨고 가만히 그렇게 있는데 눈앞에 자꾸 그 꽃밭, 그 남자아이가 그려졌다.
안되는 걸 알지만 다시 자려고 눈을 감고 또 감았다.
지난 2년 동안 그랬다고 말했고 다시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그 꽃밭에서 혼자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시간만 나면 자려고 노력했다. 내가 잠이 들어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그곳으로 갈수 있으니까.
처음 그 아이를 만난 5살 때보다 더, 꿈을 꾸려고 힘을 썼다. 보고 싶었고 그곳에 있으면 별것도 아닌데 참, 행복했으니까.
그렇게 또, 그곳에 가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
아 뭐 어쩌라고. 단답쩐다 너. 아오 뭐라고 이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냥 바로 물어봐야지. 만약 아니라면 더 길게 연락할 필요도 없고 내게 중요한 건 니가 내 꿈속에 그 남자가 맞냐니까.
[알겠구요. 물어볼거]
악!! 하도 카톡을 하다 보니까 말을 다 쓰지도 않았는데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에이씨... 그냥 카톡처럼 여러 개 보내버릴까... 그럼 내가 막 니가 좋아서 안달 났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바보야, 바보...
[물어봐요]
감사하게도 금방 답이 왔다. 이번엔 실수 말고 다 써서 보내자. 날 미친년 취급하던 말던, 원하는 답만 얻으면 다신 안 볼 사람인데 무슨 상관이랴
[저 정신 나간 거 아니란 거 꼭 알아두시고요. 진짜 나 본적 없어요? 나 몰라요? 전에 어렸을 때 꿈에서 라던가... 어디던가... 정말 나 몰라요?]
기대와 걱정과 떨림이 겹쳐서 고작 저걸 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가끔 생각이 나면 그게 뭐였을까 잠시 생각할 뿐 그 꿈을 다시 꾸길, 그 아이를 다시 만나길 바라는 미련을 버린지 오래였다. 이젠 그 아이가 꿈에서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같이 무엇을 했는지도 흐릿흐릿하게 기억이 나고.
그러다 이 남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고, 갑자기 다시 그 꿈이 내 머릿속을 점령해버렸다.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바로 오던 답장이 이번엔 시간이 걸렸다.
오지 않는 답장에 초조하게 이를 딱딱거리고 있는데 지잉- 다시 진동이 울렸다.
[있다고 해주고 싶은데 없어요. 난 오늘 그쪽 처음 봤어]
약간의 기대마저 뚝 떨어져버렸다.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시켜주듯.
하긴.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겠어. 내가 착각했겠지. 4년이나 지나서 비슷한 얼굴을 착각한 거야.
빠져버린 기운에 더 이상 답장할 것도 없이 머리 옆에 핸드폰을 놓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잘 준비를 했다.
그저 닮은 얼굴인데도 흥분하며 달려드는 내 모습을 보니 놓아버렸다면서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나 보다.
너는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는데, 내가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거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젠 진짜, 그만 접어야 해. 너는 단지 꿈일 뿐이었다.
마치 믿고 있던 산타가 아빠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처럼 허무하고 슬픈 기분마저 들었다. 바보
지잉-
[한번 더 보면 기억날꺼 같기도 하고]
늘 그랬듯이 처음은 자주자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리 써둔게 있어서 처음엔 자주자주 올수가 있네요ㅋㅋㅋㅋㅋㅋㅋ
이러다... 또 쓰던걸 다 올리면 늦어지겠지...핫... 꾸준히 써야지....
기다려 주시던 분들이 계셔서ㅠㅠㅠㅠ 정말 감사합니다ㅠㅜㅠㅠㅠ
저는 또 감동을 받고 훌쩍ㅠㅠㅠㅠㅠ
와... 애들은 왜 매력이 다들 철철 넘칠까요? 윤기쓸때도 그랬고 태형이 쓸때도 그랬고 지금 정국이도 그랬고! 글쓰면서 애들이 더 좋아지고 막 그럴까요ㅠㅠㅠㅠㅠ
뭐... 그렇고...ㅎㅎㅎㅎ
전에 쓰시던 암호닉을 들고 오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럼 계속 소통을 할까요 우리?ㅎㅎㅎㅎㅎ
다시 한번 신청해 줄수 있으세요? 제가 다음 편부터 암호닉에 쫙! 올려드리겠습니다!!헤헤
그럼 전 또 가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