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산소
커텐을 치지않아 고스란히 들어오는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새벽 5시, 예전에는 절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않았던 시간이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번쩍 뜨였다. 학비마련을 위해 잠시 휴학을 하고 알바자리를 알아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가정부일을 시작했기때문이다. 사실 엑소를 볼 생각에 눈이 번쩍 뜨인거겠지만. 눈은 쉽게 떴지만 아직 잠에서 덜 깨어 몽롱한 기분에 이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음… 비밀번호가…"
약 30분 간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아파트. 아침 일찍부터 주위에 보이는 몇몇 팬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파트 건물로 들어섰다. 어제 수호가 알려줬던 비밀번호를 꾹꾹누르며 문을 열었더니 아직 이른시간이라 그런지 집안은 조용했다. 나는 가정부랍시고 집에서 챙겨온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해놓았는지 싱크대는 깨끗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아침으로 김치찌개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꺼냈다. 김치볶음밥에 김치찌개라니, 너무 김치요리만 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맛있으면 장땡아닌가.
"어, ㅇㅇ누나 왔어요?"
"아 백현씨. 일어났어요?"
"네,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오늘 뭐 스케줄 있어요? 없으면 좀 더 들어가서 자요."
"오늘은 스케줄 없어요. 근데 이미 잠이 다 깨버려서."
언제 일어났는지 소리없이 주방으로 다가와 인사를 하는 백현이에게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자꾸만 도와줄게 없냐고 묻는 백현이에게 곤란하다는듯 웃어보이다 아침 준비를 모두 끝냈을때 멤버들을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아 졸려."
"ㅇㅇ씨 안녕하세요."
"경수형 종인이좀 깨워봐. 절대 안일어나."
"와 밥이다 밥!!!"
눈을 뜨자마자 어쩜 그리 입을 재잘거리는지 금새 분위기가 시끄러워졌다. 식탁 한가운데에 방금 끓인 김치찌개를 놓고 간단히 만든 계란후라이와 비엔나소세지,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반찬들을 조금 꺼내 담은 후 차례대로 올려놓았다. 자리에 앉아 맛있게 먹어주는 엑소들을 보고있자니 괜히 나까지 배가 불러왔다. 이런게 엄마의 마음이구나 싶어 기분좋게 쳐다보는데 뒤늦게 카이가 눈을 비비며 어슬렁어슬렁 등장했다.
"나도 밥…"
"헐 김종인 대박."
"쟤 눈 왜저래? 진짜 못생겼어."
"와, 나 체할뻔. 종나니 등장했다, 종나니."
탱탱 부은 카이의 얼굴에 나도 사실 깜짝 놀랐지만 짓궂게 놀려대는 멤버들이 너무 심한거 같아 눈치를 보는데 정작 본인은 별 신경 안쓰는지 조용히 의자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 맞다. ㅇㅇ누나 몇살이에요?"
"박찬열 넌 나이도 모르고 누나누나 거렸냐?"
"변백현 넌 아냐?"
"아니."
"아, 저 23살이에요!"
"나랑 똑같다."
"네. 레이씨랑 수호씨랑 동갑이에요!"
"누나 저희 다 알아여?"
"당연하죠! 엑소 누가 몰라요."
뻘쭘하게 서서 마구마구 던져대는 엑소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줬다. 나이, 혈액형, 사는 곳 등등. 내 신상정보를 캐대는 엑소들에게 진땀을 뺐지만 그만큼 더 친해지는것 같아 기분이 들떴다. 그러던 중 몇몇 멤버들이 낯간지럽게 예명으로 부르지말고 본명으로 부르라는 말에 어색하지만 그게 더 친근한거 같아 흔퀘히 받아들였다.
"ㅇㅇ느나 이뻐요."
"네? 아, 고마워요. 타오씨."
"누나 내 이름도 불러줘요!"
"아 박찬열 밥풀 튀겼잖아."
"미!!안!! 민!!석!!이!!형!!"
"아나… 박찬열 죽을래?"
밥을 한숟갈 크게 떠서 먹다가 자기의 이름을 불러달라며 큰소리로 외치던 찬열이의 밥풀 하나가 민석이의 볼에 붙었다. 순간적으로 민석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고 찬열이는 그게 재밌는지 일부러 밥풀을 튀겼다. 저게 더럽게 뭐하는 짓이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주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나왔다. 아침부터 청소를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빨래? 드라마를 보면 가정부 아줌마들은 항상 바쁘게 무언가 하던데 난 도대체 뭘 해야할지 몰라서 멀뚱멀뚱 서있기만 했다.
"ㅇㅇ씨."
"네? 아, 경수씨. 밥 다 먹었어요?"
"네. 요리 잘하시네요."
"아니 별로… 만든게 없어서…"
"앞치마 이쁘네요.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하나 둘 밥을 다 먹고 거실과 각자 방으로 돌아가는 엑소들을 보고 나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비운 밥그릇을 싱크대에 옮겨 담고 식탁을 치운 뒤 행주로 쓱싹쓱싹 닦았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밥 한번 먹고나면 설거지할 그릇이 산더미 처럼 쌓이는구나. 신기하면서도 할일이 생겨 기분이 좋아졌다.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우고 수세미에 주방세재를 묻혀 그릇 하나하나를 닦기 시작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열심히 닦고있는데 경수가 옆으로 다가와 도와주겠다며 똑같이 고무장갑을 끼고 거품투성이인 그릇을 물로 헹구기 시작했다.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제가 하고싶어서 하는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얼마전까지만해도 집에서 뒹굴거리며 음악프로그램에 나오던 엑소를 보고 꺅꺅거리던 내가 엑소와 함께 설거지를 하고있다는 사실이 안믿겨져 뻣뻣하게 설거지에 집중하는 나를 보고 경수가 특유의 하트입술을 만들어 보이며 나한테 웃어줬다. 내가 뭐라고… 이런 하찮은 나한테 웃어주다니… 설렘과 감동이 한꺼번에 몰려와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어찌저찌해서 설거지를 마친 후 경수와 함께 거실로 나가니 아까까지만해도 시끄럽던 찬열이와 백현이를 비롯해 몇몇 멤버들이 안보였다.
"다들 어디 갔어요?"
"아, 찬열이형이랑 레이형은 작사작곡하러 갔구 백현이형이랑 준면이형은 보컬연습하러 갔어여."
"종인, 종대, 타오는 춤연습하러."
"아 연습하느라 바쁘구나. 근데 나머지는 안가요?"
"저는 오후에 가려구여."
"난 루한이랑 잠시 외출 좀."
"크리스형 어디가는데여? 오는길에 저 버블티 한 잔만 사다주세여."
"알았어."
아직 10시 정도 밖에 안됐는데 어딜 가려는건지 크리스는 모자를 눌러쓰고 루한을 불러냈다. 아침 산책이라도 하려는걸까 싶어 다녀오세요. 라며 배웅해줬지만 모자라도 눌러 쓴 크리스에 비해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나가는 루한에게 조금 당황했다. 연예인이 저렇게 다녀도 되는건가? 인스티즈에서 압구정에 루한이 떴다는 글을 종종 보긴했었는데, 정말로 자주 놀러다니는구나. 이제 숙소에 남은건 경수, 민석, 세훈 3명 뿐. 방에 있던 민석이 거실로 나옴으로써 현재 집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거실에 모였다. 세명은 꽤 심심했는지 방안에 가득 채워진 만화책 몇 권을 들고나와 각자 편안한 자세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에 방청소를 하기위해 청소기를 꺼내왔다. 그러자 세훈이가 나를 불렀다.
"누나 청소 이따하고 저희랑 만화책 봐여."
"네, 네?"
"빨리와여. 뭐 읽을래여? 원피스?"
"아니, 저…"
얼떨결에 세훈이 옆에 앉아 원피스 한권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재밌긴 한데, 그럼 나 일은 언제 시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