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그 말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난 최대한 녀석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져서, 동선마저 아주 조심스럽게 그렸다.
체육대회를 즐기며 눈에 띄는 단체 티셔츠를 한 군단도 보이고,
만사가 귀찮은 듯, 의욕이 없어 보이는 애들도 있다.
오직 녀석과 나만,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고 있지 않은 척하며 열심히 흘겨본다.
"계주, 빨리!"
"야, 간다간다."
그렇다.
계주는 저 녀석이다.
몸을 풀고 있는 애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비주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남자애들의 굵직한 소리와, 여자애들의 간드러지는 소리가 어우러져,
녀석의 재수없는 얼굴을 한층 더 빤딱거리게 해준다.
어쩐지 걸쭉한 가래침을 뱉고 싶은 느낌이다.
"준비-!"
화약총 소리가 운동장 하늘을 울린다.
남자애들의 질주가 시작되자, 주변 반응의 소음이 커진다.
나와 몇몇 애들은 식어있는 채로 멍하니 소떼들을 방목하는 것처럼 보고 있다.
우다다 땅을 울리던 소리가 멈추자,
녀석이 웃으며 미안하다며 반 아이들 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여자애들은 그저 황홀경을 본 마냥, 기분만 좋아보인다.
남자애들 역시 녀석의 기를 세워준다.
콧방귀가 나올 것 같다.
나의 '쩝' 스러운 표정을 감지한 듯한 녀석의 눈빛이 날아온다.
아차 싶은 나는 고갤 돌려, 시선을 애써 못 본 척 해본다.
의외로 체육대회동안은 별 일이 없었다.
나는 녀석도 사람이니까 체력적으로 한계가 온 것이려니 하며,
기분 좋게 가방을 챙긴다.
"아... 집에 가서 자야지."
"(웃으며) 난 놀건데."
"야, 안 피곤해?"
"그래도 놀아둬야 돼."
"누구랑?........... 얘랑?"
친구가 고갤 까딱거린 방향은 내 뒤였다.
고갤 갸웃거리며 고갤 돌리자 어느 새 녀석이 옆으로 와 있었다.
"아니."
내가 정색했다.
"약속해놓고 나 버리기야?"
"................"
연기력이 대종상 수상감이다.
나는 입이 조금 벌어진 채로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친구가 우리 둘을 힐끗 거리더니,
"눈치껏 빠져야지."
라고 하며 후다닥 자리를 피한다.
내가 '앗' 하며 친구를 향해 손을 뻗으려 팔을 들자, 녀석의 손이 내 팔을 붙잡는다.
뻔뻔한 낯짝에 미소를 띄우며 친구에게 손을 흔든다.
난 인사는 뒷전인 채로, 녀석을 쳐다본다.
녀석이 기분좋게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심심했지?"
"...나 좀 심심하고 싶거든."
내 말은 무시한 채로, 내 어깨에 무거운 팔을 올려 나를 짓누른다.
아니, 짓누르는 것만 같다.
애들의 시선이 아직 녀석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것을 알기에
우왕좌왕하다 팔을 쳐내고 교문 쪽으로 먼저 달려간다.
어떻게 하면 조용히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교문 바로 옆에 기대어 머리를 굴려본다.
또 제를 밀쳐냈다고 갈구진 않을지 걱정하며 있는데
다가온 녀석의 얼굴은 의외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뭐야..."
".....?"
".....풉."
녀석이 웃었다.
나의 아니 꼬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갑자기 지 혼자 뭘 좋아하나 싶었는데,
"안 가고 기다렸네.
....그냥 도망친 줄 알았는데."
"....뭐?"
"...이제 많이 길들여졌구나, 강아지."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왜일까.
어딘가 속이 불편해지며,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어딜 가."
어디를 가냐는 물음에 웃음이 섞여있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애들이 많다는 것을 녀석도 알긴 아는 모양인지,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인다.
"잘 기다렸는데 상을 줘야지."
"....돼, 됐어."
"....미치겠다."
"...?.."
"오늘은 피곤해 할 것 같아서 참으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그대로 내 손목을 붙잡고 교복 인파 사이를 당당히 가로지른다.
서로 다른 이유의 낯 부끄러움이 뒤섞인다.
오늘 녀석의 스킨십은 어쩐지 달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