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영은 잘생겼다. 게다가 그 얼굴에 성격도 좋았다. 당연히 여자들이 줄을 섰고, 밥 먹듯 여자를 갈아치웠다. 저번에 만난 여자는 쭉쭉빵빵한 윗 학년 선배에다가, 저저번에 만난 여자는 바로 옆 여고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여신이라고 했다. 또 전전전 여자친구는... 아니, 내가 왜 이딴 걸 아는지 모르겠다. 다 김현지 때문이야. 존나 투 머치 인포메이션. 하여튼 내 주변 사람 아니면 일절 관심 없는 내가 배진영을 알 정도면 그 애는 정말 유명 인사라는 거다. 최근 새 학기가 되고 같은 반으로 배정받긴 했지만 가깝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걔가 날 좋아한다고?”
”아 글쎄, 그렇다니까. 왜 안 믿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번지점프 하면서 들어도 개소리였다. 하교할 때부터 빅뉴스 거리면서 호들갑을 잔뜩 떨더니 결국 하는 소리가 '배진영이 너 좋아한대'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차라리 엮을 거면 박지훈(현재 프로듀스101 시즌 2에 나오는 내 고정픽이다)이랑 엮어주지 그러냐. 걔가 더 내 취향인데. 내 말에 김현지는 안 그래도 큰 제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분노를 표했다. 그 모습이 흡사 고릴라 같았다.
”믿지 마, 믿지 마!!!!”
”.....”
”믿으면 진짜 조져버린다!!!!!!”
”........”
”믿지 말라고 했다!!!!”
으응..... 씨발........... 얼굴에 튄 침을 닦아냈다.
* * * * *
수업이 지루해 턱을 괴고 창가를 바라봤다. 운동장에 있는 나무가 몇 그루인지 세고, 축구를 하는 애들이 몇 명인가 세는 등의 정말 비생산적인 뻘짓을 하며 수업 시간을 완벽하게 낭비했다. 이따금 새어 나오는 졸음에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기도 했다. 아 참, 새로운 짝은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다. 웃을 때마다 눈웃음을 짓는데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진즉 마이쮸를 교환하고 이런저런 어색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자, 동아리를 정할 건데. 다들 아까 칠판 위에 붙여놓은 거 봤지?”
”네에~”
6, 7교시는 동아리 시간이었다. 6교시 때 동아리를 정하고, 7교시 때는 정해진 동아리로 부원이 모여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가지는 것이다. 아까 칠판 위에 부착된 종이에 동아리 목록이 적혀 있었는데, 나는 볼 필요가 없었다. 김현지랑 같이 작년처럼 비누공예부에 함께 들기로 했다. 비누공예부는 다른 동아리에 비해 경쟁률도 적고, 시끄러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다른 동아리도 가보고 싶은데 김현지가 비누 덕후(작년에 비누공예부에 든 이후로 비누 수집가가 되었다)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여주야, 너는 어떤 동아리 들어?”
”나는 비누공예부 가려구.”
”아 진짜? 거기 인원 차면 나랑 영화감상부 들자~”
존나 어색했다. 공기의 흐름마저 어색한 느낌... 짝의 말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쉽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원하는 동아리 다 떨어지고 마지막에 갈 데 없어서 가는 동아리가 바로 비누공예부거든. 실로 작년에는 ’별로 없겠지만 다른 동아리 떨어져서 온 애들 있니?’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자그마치 열 명이 손을 들곤 했다. 남자애들은 보통 마지막에 떨궈지면 독서감상부를 가고, 여자애들은 비누공예부를 가곤 했다. 그래서 딱히 걱정은 안 됐다.
”영화감상부 들고 싶은 사람?”
”저요!”
”그래. 4번, 19번..... 두 명밖에 없지?”
가끔 인원이 많은 동아리는 가위바위보를 통해 결정했다. 분명 어제 잠을 푹 잤는데도 졸음이 쏟아져 눈 아래를 꼬집었다. 새학기라 그런가. 왜 이렇게 모든 게 무료한지. 빨리 선생님 입에서 비누공예부라는 말이 나오길 바라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책상 서랍 속에서 연속으로 진동 울리는 핸드폰을 보니, 김현지는 동아리 들어가는 데에 성공한 것 같았다. 대충 확인을 하곤 답을 했다.
”자 그럼, 이번엔 비누공예부 하고 싶은 사람 손.”
역시나 이 반의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을 것만 같은 태세다. 매우 안심이 됐다. 침묵 속에서 조용히 혼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무난히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리는데, 칠판 위에 쓰이는 번호가 많다...?
”음, 세 명? 비누공예부는 한 반에 두 명이 최대 인원인데 가위바위보 해야겠다.”
내 앞과 옆에는 손을 든 사람이 없어 뒤를 돌아보니 맨 끝자리에 함께 앉은 배진영과 이대휘가 손을 든 게 보인다. 곧이어 그들을 보던 어떤 여자애도 손을 번쩍 들더니 비누공예부에 들겠다고 소리쳤다. 나는 당황했다. 왜냐? 이런 적이 없거든. 이렇게 비누공예부가 박터진 적이 없거든! 쟤네 역시 비누에는 흥미 없고 동아리를 같이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진영아, 너 내가 같이 비누공예부 들자니까 좆같아서 안 한다며....”
”내가 언제.”
”그, 그래. 배진영이 언제 그랬냐? 거 참, 말도 안 되네.”
마지막에 손을 든 여자애까지 포함해 총 네 명이었다. 여기서 두 명은 빠져야 하는데 누가 봐도 나는 이방인이라 빠져야 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문자로 비누공예부 꼭 들어가겠다고 김현지한테 잔뜩 입 털었는데. 그냥 마지막에 남는 반에 들어가겠다고 말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저 다른 동아리 들어갈.....”
”아니, 아니!!!!!!”
”......?”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제, 제, 제가 다른 동아리 들어가겠습니다!!!!!!!”
이대휘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태세를 하곤 외쳤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반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도 다시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도 그냥 다른...
”김, 김재은도 다른 동아리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왜 다른 동아리 들어가! 얘 미쳤나! 나 진영이랑 같은 동아리 들어갈 거야!!!”
이게 무슨.... 이대휘가 나한테 빠지라고 눈치 주는 게 분명했다.
”제가 빠질....”
”이대휘랑 김재은 빠졌으니까 둘 됐죠? 여주랑 저랑 넣어주세요.”
”......?”
빼도박도 못하게 칠판에 이름이 적혔다. 비누공예부. 김여주, 배진영. 여자애가 나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그냥 저 다른 동아리 들게 해 주세요... 제발... 속으로 얼마나 외쳐댔는지 모르겠다. 손도 들고 말했으나 세 번이나 의견이 묵살되니 당황스러웠다. 근데 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이내 멍청한 생각임을 인지했다. 뭘 어떻게 알아, 같은 반인데. 한 번 시끄러워지니 시장 같은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진영아, 너... 분명 비누 냄새 개좆같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배진영 비누 존나 좋아해.”
”진짜야?”
”응, 쟤 장래희망도 비누공예가임”
”뭔 소리야, 배진....”
”어제 장래희망 바뀌었어. 너는 쟤 따라다니는 애가 그런 것도 모르냐?”
어쨌든 나는 찝찝하게 비누공예부에 들어가는 것을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