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하늘하늘 흩날리는 날 다시 꺼내든 기억의 끝자락에는, 네가 있었다.
[강다니엘 시점] 연홍빛 첫사랑
A
그러니까, 누구든 살다 보면 그런 계기를 마주치게 된다. 괜스레 감성에 젖어 옛 추억을 곱씹어 보게 되는 그런 매개체 말이다. 내게는 그것이 4월의 벚꽃이다. 파란 하늘 높이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는 지금 이 순간, 기억을 더듬는 내 손끝에 이름 석 자가 걸려든다.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던 너의 이름. 그러면 내 시간은 너를 처음 만난 그 날 그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고향의 강물을 찾아드는 연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
너를 처음 만난 것은 막 고등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네 첫 인상이 어땠더라, 작은 입술을 꼭 다물고 앞만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앙칼진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다른 반에서 온 친구를 만나 얼어붙은 빙판에 봄의 숨결이 닿았을 때 그러하듯 네 얼굴에 웃음이라는 균열이 번지는 순간을 보았을 때, 문득 나 역시 너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평소에는 활발하던 성격이 이번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나는 네 곁에서 맴돌며 네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글쎄. 다른 아이들과는 출발점부터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침내 내 바람이 통한 것은 벚꽃이 만개했을 즈음이었다. 여자애들이 체육 선생님을 졸라 학교 바로 밖에 있는 벚꽃 길을 구경하게 된 것이었다. 늘 그렇듯 너의 뒤를 따르던 내게 행운이 찾아왔다. 너는, 정확히 말해 너와 네 친구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을 찾아 눈을 굴리고 있었다. 내게는 다시 없을 기회였고, 이 기회를 놓치기에는 나는 너무 오랜 순간을 기다려 왔다.
'사진 찍어 줄까?'
그날 밤 너는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나는 너와 네 친구들이 나온 사진 몇 장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단 한 장, 실수인 척 너만을 담았던 사진 한 장만은 망설이고 망설이다 끝내 보내주지 못했다. 네게 내 마음이 들킬까 두려웠던 탓이다. 내 휴대폰에는 아주 오랫동안 그 사진이 남아 있었다. 분홍빛 뺨을 하고 벚꽃처럼 화사하게 웃던 네 모습. 아직도 내 마음 한 켠에 각인되어 있는 첫사랑의 연분홍빛 초상화, 그게 너였다.
*
너와 내가 처음으로 '우리'라 묶였던 날을 기억한다. 4월의 마지막에 다다른 어느 체육 시간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더워진 날씨에 지쳐 탁구 수행평가 따위는 내팽개치고 구석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열심인 너는 계속 연습을 하고픈 눈치였고, 그 모습은 결국 선생님 눈에 띄었다.
'여주야, 연습 상대가 없어?'
'네. 다들 힘든가 봐요.'
'그럼 남자애랑 해볼래? 다니엘! 이리 와 봐.'
마침 쉬고 있었던 나는 선생님께 지목되는 행운을 얻었다. 너는 멋쩍게 웃으며 좀 봐달라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생각보다 실력이 형편없었다. 진지한 표정과 상반될 정도로 허우적거리는 몸짓을 보면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어 가며 무진 애를 썼지만, 탁구대를 맞고 튕긴 공이 내 미간을 맞춰 버리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헐, 괜찮아?'
탁구채를 다급히 내려놓고 내게 다가온 너를 보며 나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진짜 대박이다. 이렇게 탁구 못 치는 사람 처음 봐.'
나 살면서 탁구 처음 쳐 보거든. 너는 불퉁한 얼굴과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모습이 나를 향한 것은 처음이었다. 행복함. 그것 이외의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피어올랐다. 나는 벙싯벙싯 바보처럼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여전히 네 서투름 때문에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너는 툴툴거리듯 말했다.
'나도 잘 칠 수 있어.'
'진짜?'
'어. 내기할래?'
'무슨 내기?'
내가 오늘 너한테 5점 이상 따면 아이스크림 사주기. 너는 그렇게 말하며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맑게 웃었다. 그 날 너와 나는 종이 칠 때까지 함께했다. 이유도 모르고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은 덤이었다. 결국 너는 내게 7점을 따냈다. 물론 그 중 반은 내가 너를 보며 서브를 치다가 낸 실수였다. 가슴에서 시작한 떨림이 손끝까지 퍼져나가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너는 탁구채를 부채 삼아 부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덥다. 매점 가자.'
'같이?'
'당연하지. 아이스크림 안 사줄 거야?'
우리 콘 먹자, 콘. 너는 신이 나서 앞섰고, 나는 너와 내가 우리로 묶인, 아이스크림보다 달콤한 순간을 음미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햇빛은 따가웠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네가 있는 한 나의 계절은 언제까지고 봄에 머무를 터였다.
시나몬와플 |
안녕하세요. 프롤로그만 올려 놓은 '너의 하트를 픽업!' 설정을 갈아엎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다른 글 먼저 써 보려구요. 제가 원래 글 하나가 막히면 다른 글을 쓰는 성격이라... 다니엘의 첫사랑 이야기, 많이 사랑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