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회고록 外
스물다섯의 재회록
열여덟 여름 이후의 내 고등학교 시절은, 그 전과 같았다. 조용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와 나. 일어나서,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다시 공부를 하고의 반복. 그 지루한 일상 와중에도 나는 가끔 너의 얼굴을 떠올렸다. 흐릿한 듯 선명해지는 너의 얼굴과 목소리, 그 빛이 나를 조금 더 버티게도 했다가, 무너지게도 했다. 그렇게 남은 열여덟을 보내고, 나는 열아홉이 되었다. 열아홉은 좀 더 나은 편이었다.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너를 조금은 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Sns 같은 건 취미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의 얼굴을 보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았으니. 그러다 나는 또 여름을 만났다.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너는 무슨 과 가고 싶니? 성적 같은 거 다 떠나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그 때, 다시 네가 생각났다. 너를 그리며 글을 끄적였던 몇 번의 순간이 생각났다. 내 말이, 내 시선이 예쁘다고 해주었던 너의 따뜻한 글씨가 떠올랐다.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너의 몽글한 글씨를 펴보았을 때, 나는 결정했다. 글을 쓰는 걸 한 번 배워보기로. 그렇게, 나는 국문과에 진학했다.
내가 대학 생활에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네가 데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무살이 되어 시작한 Sns에 네 이름이 없는 이유가 그거구나, 생각하며 다시금 너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앓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서, 너를 앓기 시작했다. 멀리서 너를 보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이번엔 내가 너를 아무리 빤히 바라보아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차마 공연에 갈 용기는 없었다. 네가 혹시라도 날 알아본다면, 그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스물 셋의 겨울을 맞았다. 너는 너의 따스한 빛을 맘껏 뽐내는 중이었다. 주위 사람들 중에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그 때 즈음, 너를 향한 마음이 많이 옅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너 만큼 진심을 다 해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지만, 어쨌든 연애도 두어번 해보았다. 가벼운 연애였지만, 충분히 사랑 받았다. 나도 빛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느껴본 시간이었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몇 번의 다툼 끝에 나의 두 번의 연애는 모두 끝이 났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 때 즈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건 대단한 일은 아닌가 보구나. 너와 내가 그 때에,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서로 바라봤다면, 우리도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담아서 글을 썼다. 몇 개의 단편이 꽤 반응이 좋았고, 장편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장편 소설은 더 반응이 좋았다. 감사하게도 그 이후엔 더 많은 출판 제의가 들어왔고, 그래서 나는 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이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가라는.
겁이 많았다. 그래서 너의 공연 한 번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소설가로 살기를 2년째, 내가 너의 팬임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내게 몇 번씩 제의를 하곤 했다. 너의 노래에 가사를 한 번 써보지 않겠냐고. 나는 겁이 많았다. 답은 항상 같았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지인들은 모두 아직 감성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사실 나는 아직 너를 만날 자신이 없다는 뜻이었지만. 일년 남짓을 너에게 나 혼자만의 화살표를 긋고도, 사년 쯤을 더 너에게 화살표를 긋고 있었다. 스물다섯의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습관처럼 너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너의 노래를 듣고, 너의 영상을 틀었다. 네가 물들인 그 마음이, 아직도 옅게 남아있는 모양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런 일의 연장선이었다. 너의 인터뷰를 찾아본 것은. 새삼스레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었다. 너의 첫사랑은, 어땠냐는 질문.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답에서 나를 찾았을 때, 너에게 남아있는 나의 흔적을 보았을 때,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 이미 7년이나 흐른 뒤였지만, 아직도 너는 내게 선명한 한 자락이었다. 너는 내게 가장 순수하게 빛나는 감정을 전하던 순간이었다. 네게도 내가 그런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소름이 돋았다. 어쩐지 무언가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네가 물들인 마음 한 구석이, 좀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재환이 신곡 내는데, 이번엔 걔가 부탁하더라."
"뭘?"
"작사. 내가 너 아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나한테 부탁하더라고. 혹시 한 번 부탁해 줄 수 있냐고."
내가 있어야만 내 편지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너의 말이 신경 쓰이던 와중이었다. 이상하게도 열여덟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시리던 와중이었다. 내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너의 부탁을 들은 건. 그 때에 나는 술에 조금 취했었고, 잔잔한 가게의 음악에 취했었고, 너에 대한 기억에 취해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그런 대답을 한 건?
"한 번....해볼까?"
겁쟁이의 찰나의 용기였다.
여전히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지만, 취해서 그런 대답을 해버렸다. 너에게, 나의 말을 한 번 전해보겠다는, 그런 대답을.
나는 취해서였지만, 너와 내 친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친구는 그 다음 날, 파일을 하나 보내왔다. 이 파일에 맞추어 가사를 써달라는 짧은 글과 함께. 열어 본 파일에선 어쩐지 네 향기가 묻어나왔다. 온통 파란 빛이었던, 바다 빛의 너의 향기가. 새삼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다시금 너의 쪽지를 한 번 더 펴보았다.
말이 너무 예뻐서, 좋았어. 네 시선이 참 예뻐서, 좋았어. 고마워, 잘 지내.
이번에는 내가 대답을 한 번 해볼까 싶었다. 그 쪽지에 대한, 나의 대답을. 너의 말이 예쁘다는 말에 나는 말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너의 시선이 예쁘다는 말에 나는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담아주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맙다고, 너도 잘 지내라고.
소설가를 직업으로 삼은 뒤엔,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에 거침이 없던 몇 년이었다. 그럼에도 이번엔 수십번을 더 손가락을 멈춰야만 했다. 어떻게 써도 유치한 것 같아서, 몇 번을 뒤엎은 가사였다. 어째 열여덟의 너에게 고백한 그 편지보다도 자꾸만 과하게 적히는 것 같아서, 나 답지 않게 자꾸 붕붕 떠지는 것 같아서, 몇 번을 뒤엎었다. 사실 내 소설을 펴낼 때보다도 좀 더 열심히 쓴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가사를 적은 메일을 전송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그 쪽지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도 너는 나의 말을, 시선을 예쁘다고 해줄까,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리고 픗내 나는 마음을 가지면서. 주책 맞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쩐지 다음 작품은 로맨스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음 이대로 라면, 그 때처럼 맑은 빛을 담아 소설 속의 사람들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나 떨리는 기분이라면, 설레는 이들의 마음을 잘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받았다. 회사에서 나를 좀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출판사는 아니었고, 김재환의 회사 쪽에서. 새삼 두려웠다. 편집장님과 둘이서 대면할 때도 떨어본 적이 없는 나였는데, 이상하게도 너의 회사의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이토록 떨릴 수가 없었다. 약속 시간에 다다랐을 때, 나는 계속해서 입술을 깨물었고, 이대로 라면 애써 공들여 한 입술 화장도 다 지워질 판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기 그지 없는 인사였다. 너의 회사 분은 날카로운 인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래도 좋아 보이셨다. 너는 너와 비슷한 사람들과 일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처럼 따스한 빛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따스한 빛을, 몽글한 빛을 잃지 않고 음악을 했구나.
"반가워요. 황민현이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이랑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까, 새롭네요."
너와 함께 음악을 하는 분이라고 하셨다. 너와 아주 오랜 시간을 붙어 있다고도, 그리고 나의 소설의 팬이라고도 하셨다.
"보통은 작사가 분이랑 미팅을 한 번 하거든요. 원랜 의뢰를 부탁드릴 때 어떤 식으로 써주셨음 좋겠다고 말씀을 드리는데, 이번엔 재환이가 그냥 작가님께 다 맡기자고 하더라고요. 재환이가 작가님 글 정말 좋아해요. 걔 작업실에 작가님 책을 쌓아뒀어요. 걔 한 권도 다 빠짐 없이 있거든요."
의외였다. 그리고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내가 정말 너의 한 자락으로 기억에 남았구나, 싶어서. 그리고 조금은 후회되기도 했다. 네가 볼 줄 알았다면 좀 더 공을 들여서 쓸 걸 그랬다, 하는. 솔직히 열여덟과 같은 감정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네게 내 글이 읽히는 것은 이토록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근데 한 번쯤 여쭤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그런 가사를 쓰시게 된 거예요?"
"아, 그냥...그 인터뷰 봤어요. 그...첫사랑에 대한. 그거 읽고, 그 첫사랑 친구한테 전하듯이 하면 어떨까 싶어서."
실은 너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 노래는 너의 것이었으니. 나 대신 너의 대답을 써보았다. 너의 생각도 이랬을지, 확신이 가지 않아서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내 멋대로 너의 이야기를 써도 되는 걸까 많이 조심스러웠지만, 내 이야기를 쓰는 건 이상하니까.
"아, 그랬구나. 재환이가 그거 보고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작가님이 무슨 자기 첫사랑이라도 되는 것처ㄹ, 어, 쟤가 왜 여깄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네가 있었다. 여전히 바다같은 빛을 내면서, 여전히 밝고 따스한 빛을 내면서 그 곳에는 네가 있었다. 그런 너의 모습에, 나는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너를 빤히 바라보는 것은, 열여덟에 그러했듯, 스물다섯의 나에게도 벅찬 일인 모양이다. 그런 나를 보고서도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의 발이 조금씩 내 쪽으로 걸음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발걸음에 시선을 옮기면서, 나는 또 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고개를 들어 너의 얼굴을 보았다. 해사한 미소였다. 따스한 빛이었다. 아아, 여전히 너는 내게 그런 빛인가 보다. 바다빛이 나는, 나의 열여덟을 빼곡히 채웠던, 그 따스하고 밝은, 나의 빛.
그렇게 열여덟의 너와 나는, 스물 다섯이 되어서야, 아주 먼 길을 돌아서야 마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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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번에 내는 신곡은 어떤 내용인지?
A. 많은 분들께서 7년 전에 냈던 그 곡을 참 좋아하셨어요. 내가 첫사랑에게 대답하듯이 불렀던 그 곡을. 그 곡의 후속작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여전히 첫사랑에게 하는 이야기거든요.
Q. 그 때 당시 가사를 재환씨가 쓴 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 분께서 쓰신 건가?
A. 아시다시피 그 때 그 곡의 가사는 제 첫사랑이 써준 거예요. 이번엔 제가 직접 써봤어요. 그 친구 가사에 반도 못 미치지만요. 이번엔 제가 그 친구한테 할 말이 좀 더 많아서.
Q. 가사 내용을 설명해준다면?
A. 그 때, 열여덟에 제가 써줬던 쪽지가 있어요. 그 땐 그게 고백의 답이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요. 그 땐 제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지도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냥 제가 하고 싶었던, 그 친구한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써버렸던 거거든요. 엄청 투박하게, 그냥 네 글과 시선이 참 예쁘다고 했어요. 그리고 잘 지내라는 말도요. 그래서 이번엔 아직도 예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과 시선 외에도...알고 보니 다 예뻤다고. 이번엔 나랑 평생 잘 지내보자고. 아, 말로 하니 엄청나게 화끈거리네요. 그 친구가 안 봤으면 좋겠어요, 이 인터뷰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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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첫사랑 회고록을 좋아하셔서....! 후딱 후속편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제가 잘 써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재환이가 워낙 예뻐서 그런 것 같지만ㅋㅋㅋㅋㅋㅋㅋ 이번 글도 많이 부족해요ㅠㅠ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걱정 중입니다. 혹시 앞 전 글 느낌이 이 글 때문에 다 망쳐졌을까봐....8ㅅ8... 글은 모자라지만 여전히 재환이는 예쁘잖아요...하하 재환이 최고....사랑해 재환아 데뷔해 흑흐긓그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