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인사 06 |
그동안 체력이 많이 약해진 탓일까. 모자란 체력을 잠으로 보충하려는 듯 늦잠을 자는 횟수가 늘었다. 지호는 오늘도 열 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집안이 조용하다. 아무래도 지훈은 집에 없나보다. 그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때면 머리가 띵-하며 현기증이 일었지만, 요즘은 그런 증상까지 많이 잠잠해진 것을 느꼈다. 지훈이 안다면 다행이라고 말을 했을 테지만, 오히려 통증이 줄어가고 제 몸이 잠잠해지는 것이 지호는 두려웠다. 병의 진행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 급성HIV증후군의 증상이었던 두통, 발열, 구토와 같은 증상들이 점점 사라져가면서 그 다음 2기가 쉬지 않고 찾아온다는 뜻.
가끔은 전보다 많이 나아진 몸 상태에 착각을 일으키는 날도 있었다. 나 혹시 괜찮은 거 아니야? 괜찮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다 나은 거야. 별거 아니었네―. 하지만 가방 안에 들어있는 하얀 약봉지들을 볼 때마다 지호의 가슴은 공허함으로 가득 차곤 했다. 그런 날들의 반복에 날이 갈수록 지호는 예민해졌다. 언제 저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지훈을 감염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에 없던 결벽증과 같은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물론 지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손이 닿는 것과 같은 단순한 접촉으로는 감염될 병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더 힘이 들었다. 닿고 싶었다. 다가가 안기고 싶었다. 따뜻한 그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처럼 꽉 잡고, 지훈의 어깨에 기대서 조용히 제 마음을 고백하고, 지호야- 이름을 부르는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나중엔 더 힘들어질 자신과 지훈을 알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지훈 몰래 이곳저곳 집을 알아보러 다닌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지훈에게 말해두었던 시간도 이제 겨우 3일의 말미밖엔 남지 않았다. 공원 벤치에 걸터앉아 호흡을 고르던 지호가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섰다. 지호의 수첩에 표시해 둔 마지막 주소지는 이 언덕길의 끝에 위치한 콘크리트 주택 위의 작은 옥탑 방이었다. 겨울 해는 일찍 떨어진다던가. 언덕길을 오르는 지호의 등 뒤로 벌써 붉은 노을이 가만히 내려앉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빨갛게 얼어붙은 지호의 귀와 코. 하나, 둘. 발걸음을 옮기며 차는 숨을 내뱉는데 지호의 입에서 희뿌연 입김이 마치 한숨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 . .
‘아유- 그럼! 우리 집만큼 싸게 세놓는 집도 없어! 학생은 땡잡은 거야!’ 이 근방에선 이만큼 싼 가격에 세를 놓는 집은 이곳이 유일하다며 내내 강조하는 집주인 아줌마에게 지호는 가만히 웃어보였다. ‘언제부터 들어올 수 있을까요?’ 묻는 지호에게 아주머니는 힐끔 방안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오늘 내일 청소해놓을 테니까, 정 급하다면 내일도 상관없어, 들어와도 돼. 학생이 짐 옮기는 김에 거들어주면 난 더 좋구.’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이나 모레 쯤 오는 걸로 할게요.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요 언덕 아래에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구……”
꾸벅 인사를 한 지호가 대문 밖으로 나서자마자 아주머니는 제 집안으로 재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드디어 집을 구했다. 수첩 귀퉁이에 적힌 주소지에 지호는 펜을 들어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분명 먼저 나가살겠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자신인데 막상 내일 혹은 모레로 집을 떠날 생각을 하니 왠지 마음이 착잡해졌다. 펼쳐진 수첩을 곱게 접어 가방 안에 던져 넣고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새로 구한 집은 지훈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오히려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집집마다 불이 켜지면 새로 이사 온 집의 창문 너머 먼발치 아래에서 지훈의 방 창문이 반짝일지도 모르겠다.
***
집에 돌아온 지호는 구석에 세워둔 커다란 여행 가방을 꺼내 자신의 물건을 하나 둘 담기 시작했다. 서랍 안에 들어있는 자신의 옷가지들부터 노트북과 신발장안의 신발들까지. 그동안 지훈이 알게 모르게 챙겨두었던 자신의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책이나 기타 등등의 작은 물건들은 이미 지호의 빨간 가방 안에 모두 들어 있었다. 책상위에 올려놓았던 나무 액자를 한참 바라보며 챙겨갈지 말지 고민했다. 손을 뻗다가 거두기를 두세 번쯤 했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 공기와는 다르게 포근한 집안에 지훈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신발을 벗는다.
“어....? 우지호....?”
지훈이 몰랐으면 했다. 자신을 붙잡을 지훈을 알기에, 그 목소리에 약해질 제 마음을 알기에, 떠나는 순간만은 지훈에게 비밀로 붙이고 싶었는데……. ‘아-!’ 당황한 눈빛의 지훈과 눈이 마주친 지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신발장 앞에서 벙찐듯 서있던 지훈이 성큼성큼 다가와 지호의 앞에 섰다. 좁혀진 미간이 꼭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저기- 그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지호는 바닥만 쳐다보았다. 따지고 보자면 저가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자꾸만 작아지는 제 모습을 감출수가 없었다. 티셔츠를 접다말고선 그 끝을 말아 쥐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면으로 맞닥뜨린 상황에 지호는 도망갈 곳을 찾지 못했다.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변명할 여지를 찾고 있는데, 지훈의 큰 손이 덥썩 지호의 손목을 잡아챈다. 놀란 눈을 하고 지호가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호의 손에 들린 티셔츠가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훈아...!”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듯 지호의 얼굴과 챙기다 만 짐들을 여러 번 번갈아 보고서야 지훈이 입을 열었다. 지훈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거였어?” “....저기...-” “가버리려고 그랬던 거야? 이렇게, 나 몰래 혼자서?”
지호의 입이 달싹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했지만 지훈의 눈빛과 목소리에 압도당해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뱉는 말은 모두 지훈에겐 변명거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테니....- 지호의 손목을 잡은 지훈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아팠던 지호가 손목을 빼내려 팔을 비틀자 지훈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호의 손목을 더 꽉 쥘 뿐이었다. ‘지훈아, 이것 좀 놓고서…….’ 사정하며 지훈을 바라보았지만, 무서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 지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훈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은 꼭 배신감 같기도, 슬픔 또는 두려움 같기도 했다.
“내가 말 했잖아....- 그냥, 그냥 그 전처럼만 같이 있어달라고.”
“.....”
“근데, 왜.... 대체.... 왜!!”
“.....”
“....왜......자꾸 도망가.......”
악에 받힌 듯 소리를 지르다가도, 마지막 말을 뱉는 지훈의 목소리엔 울음이 섞였다. 미처 뱉어내지 못하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듯, 지훈이 숨을 멈추었다. 지호의 손목을 잡은 지훈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떨림이 전해지듯, 지호의 몸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호의 머릿속을 스치는 수만 가지 생각. 그냥 말해버리고 싶다. 모든 걸 다 말해버리고, 지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싶다. 못난 내가 너를 너무나 아프게 해 미안하다고.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약봉지가 한 움큼 들어있는 빨간 가방과, 고개 숙인 지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지호는 몇 번씩이나 이성과 이기심 사이에서 고민했다.
“지호야……. 내가 잘못했어...”
“지훈아.”
“....내가 잠깐 미쳐서, 내가 잠깐 어떻게 돼서-........”
“지훈아....그게 아니야-”
“이제 안 사랑할게. 사랑 안 할게.......”
“표지훈!!”
더 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겠노라 말하는 지훈의 목소리에 지호의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깨물며 눈물을 참는 지훈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끝내 지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나왔다. 힘없이 풀려버리는 다리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훈에게 잡혀있던 손목이 너무나도 쉽게 빠져버렸다. 문득 너무나 서럽고 서러웠다.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병의 선고에도 모자라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멀어져야 하는 이 거지같은 상황이, 지호를 너무나도 서럽게 만들었다. 엉엉- 지호의 입에서 아이 같은 울음이 터졌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지훈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지호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라 지호의 모습이 왜곡되어 일렁거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덜덜 떨리는 마른 어깨를 웅크린 채 눈물을 쏟아내는 지호를 지훈이 와락 끌어안았다. 지호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런 엉망인 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꽉 안아주며 등을 쓸어주는 따뜻하고 커다란 손길에 마치 구원받는 것처럼, 그렇게 느꼈다. 지호의 어깨를 꽉 끌어안은 지훈은 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지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귓가에 들려오는 지호의 흐느낌에 가슴이 아파 눈을 꼭 감아버렸다.
“...표..지훈......”
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고서 꺼낸 한 마디. 표지훈. 잠시 제 품안에서 저를 떼어내고 얼굴을 마주하는 지훈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그렇게 붉어진 눈을 한 두 사람이 드디어 마주보았다. 불안한 듯 떨리고 있는 지호의 눈동자와, 지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담아내겠다는 듯 흔들림 없는 지훈의 눈동자.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 너 안 싫어해....”
“.....”
“나도.........사랑해.”
“...우지호...-!”
옛날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끅끅거리는 소리를 애써 삼키며 지호가 말을 이었다. 지호의 갑작스런 고백에 지훈은 적잖이 놀란 반응이었다. 지호의 어깨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면서도 연신 지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마주치는 시선을 먼저 피한 쪽은 지호였다.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지호가 입을 열었다.
“나..... 에이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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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과도 같은 연재덕분에 너무나도 빠르게 끝이 다가오고 있네요...
일주일이 채 안걸려서 연재를 완결낼 수 있다는 신기한 체험을 하고있습니다.....ㅎㅎㅎㅎㅎㅎ
힘을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이예요! 마지막까지 함께 달립시다 ㅎㅎㅎ
아, 그리고 완결 낸 후에 텍파 공유.....................할까요? (소근소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