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 하나만 물어보자. "
" 뭔데, 나 바빠. 빨리 말해. "
" 나랑 사귈 때도 쟤 만났어? "
" 촌스럽게 왜 이래, 만났다고 하면 어쩔건데? "
" 나쁜 새/끼... "
" 이제 우리 더 볼 일 없는거지? 야 남자들은 너처럼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 싫어해. 내가 너 불쌍해서 만나준거야. "
대학 입학 후 2년을 쏟아부은 사랑이, 사람이 남이 되는 건 단 1분.
너무 쏟아버려서 너무 많은 걸 줘버려서 넘쳐 흐르다 못해 금이 가기 시작했나보다.
입학을 할 때만 해도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아니었는데...
" 깨가 쏟아질 땐 예쁘다,예쁘다 하더니 형편 없어지니까 돼지 취급이네. "
눈물? 흘리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인간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 내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울어야 하는구나, 나는 버림 받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내가 흘린 눈물만큼 똑같이 갚아 줄 예정이었으니까.
캠퍼스 안을 돌아다니기가 겁났다. 입학 할 때와 너무 달라져버린 내 모습을 사람들은 피하기 바빴다.
그들의 곱지않은 시선이 쏟아 질 때 항상 내 옆을 지켜주던 그가 생각났다.
이렇게 또 한 번 나는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새삼 그의 빈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점차 수그러드는 내 어깨를 누군가 잡아 돌려세웠다.
" 선배! "
"... 이 찬? '
" 와... 선배 제 이름 기억 하고 계시네요? 와 진짜 영광이에요! "
찬이... 참 귀여운 후배다. 입학 한 순간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 때도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꽤 살이 붙었을 때인데도 말이다.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리고 그 남자친구가 나를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 날 때도 유일하게 내 곁을 지킨 아이.
전 남자친구만큼 캠퍼스에서 유명인사인 찬이가 나와 붙어 있는게 아니꼬운지 여기 저기서 날 쏘아본다.
그렇게 내가 다시 한 번 작아지려 할 때 찬이는 날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 피하지 마세요 선배, 지금도 충분히 예뻐요. 이제 저랑 붙어다녀요. "
벙찐 나를 그대로 이끌고 찬이는 한적한 카페로 향했다.
말 한 적도 없는데 내가 좋아하는 메뉴로 척척 시키더니 내 앞으로 와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그런 시선이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자 찬이는 특유의 맑은 미소를 띄며 말을 꺼냈다.
" 그 선배... 복수하고 싶죠? "
" 이야... 소문 빠르다, 벌써 너한테까지 들어갔구나... "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면 찬이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는 게 보였다.
" 선배 저는요, 전 말이에요. 선배가 또 그 사람한테 갈까봐 걱정돼요. "
" 그게 무슨... "
" 그런데 그 땐 제가 못 보내줘요, 아시겠죠? "
" 찬아, 그게 무슨 말이야? "
" 선배, 복수 도와줄게요. 저만 믿고 따라와요. "
못 이기는 척 찬이와 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를 시작했다.
바로 그가 반했던 그 때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기.
살을 빼는 데엔 춤만 한 게 없었다.
춤하면 이 찬, 이 찬하면 춤! 따라서 찬이가 연습하는 곳으로 향했다.
" 선배 저 없을 때도 언제든 오셔도 돼요, 선배니까 괜찮아요. "
찬이와 복수를 시작한지 2달. 몰라보게 달라진 내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홀로 연습실에서 이리저리 몸 가는대로 움직이고 있다보니 어느덧 나를 바라보고 있던 찬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희고 희던 찬이의 얼굴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있었다.
" 너 이거 왜 이랬어? "
" 아... 이거 별 거 아니에요 선배. "
" 별 거 아닌게 이 정도야? 누군데, 너 싸웠어? "
내 말에 잠잠하던 찬이 진지한 표정을 하곤 나의 눈을 쳐다본다.
" 나 애 아니야, 애처럼 싸우고 다니지도 않아 그리고 내가 더 때려주고 왔어. 그러니까 그런 동생보는 눈빛... 하지마요 누나. "
처음보는 찬이의 낮게 깔린 목소리와 어두운 표정에 순간 아차 싶었다.
연습을 하는 내내 찬이의 눈치를 보고 있으면 찬이는 끝내 푸스스 웃으며 내게 말을 건다.
" 선배 말고 누나. 누나라고 불렀어요 아까. "
" 응? 어... 그렇네? "
" 이제 누나 말고 00이라고 부를 거예요. "
" 뭐야 이 찬! 누나한테 반말 하겠다고? "
욱하는 마음에 찬이 앞으로 거침없이 다가가 쫑알쫑알거렸다.
그런데... 그런 나를 자신의 몸 쪽으로 확 당긴 찬이가 중얼거렸다.
" 반말 하겠다는 의미 말구요, 이제 남자로 보이고 싶다는 의미요. "
그렇게 어느덧 대학의 꽃 MT를 가게됐다.
가면 술파티가 열릴 것이 분명했기에 억지를 부려서라도 안 가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찬이의 손에 이끌려 참석하게 됐다.
어떻게 뺀 살인데...!
동기들이나 선배, 그리고 신입생까지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입학 할 때 받았던 그 관심을 배로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내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MT를 가서도 나는 찬이와 떨어지지 않았다, 찬이 또한 부쩍 나를 챙기느라 바빴다.
술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자꾸 어디선가 불편한 시선이 닿았다.
우리의 대각선에 앉아 술에 취한 듯 풀린 눈을 하고 우릴 주시하고 있던 전 남자친구.
그가 불쑥 술잔을 들이밀었다.
" 00아 내 잔도 한 번 받지? "
그를 보기 껄끄러운 내 마음을 아는지 찬이는 자신이 받겠다며 웃으며 잔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찬이의 멱살을 잡아 올리더니 욕을 뱉기 시작했다.
" 이야 이게 누구야, 000 빠돌이 이찬 아니야?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덜 맞았구나 그 때. 이게 선배 말이 말 같지가 않나본데? "
" 이거 놓으세요 선배. "
" 허? 이거 놓으세요? 싫다면. 어쩔건데 꼬맹아. "
" 제가 분명 그 날 경고 했는데, 선배도 말귀를 잘 못 알아 들으시나 봐요. "
금방이라도 주먹이 나갈 것 같은 분위기에 쉽사리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 또한 눈물을 매단 채 불안하게 그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찬이는 그런 나를 한 번 보더니 그에게 잡힌 옷깃을 가뿐히 떼어놓고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를 맞췄다.
" 누나 잠깐만 귀 막고 있어요. "
찬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꼭 감고 귀까지 꽉 막았다.
" 제가 그 때 분명 00누나한테 사과 하라고 했을텐데 선배 안 하셨더라고요. "
" 미/친 이게 누구보고 명령질이야? "
"성격 보니까 딱 답 나오네요 선배, 왜 누나가 선배를 싫어하는지도 알겠고요. "
" 야 이 찬, 너 보자보자 하니까 기어오른다. "
" 애초부터 내가 기어오를 곳이 없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니 여자친구들은 서로서로 다 알아? "
" ㄴ..너 이 ㅅㅐ/끼 입 다물지 못해? "
" 왜, 아 비밀이었어? 비밀이면 진작 행동 좀 조심하고 다니지 그랬어. 우리 00이 안 힘들게. "
"... "
" 아 근데 그건 내가 고마워 하면 되는 부분인가? 덕분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생겼네. 그건 고마워 근데 이제 사람답게 살자 응? "
웅웅대는 소리 때문에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상황은 바로 종료된 듯 했다.
아까는 씩씩거리는 전 남자친구를 말리는 친구들이 보였고 지금은 내 옆으로 와 옷을 걸쳐준 다음 산책을 가자며 나온 찬이가 보였다.
말없이 걷기를 반복하다 조용히 찬이가 말문을 열었다.
" 누나... 그 때 그 말 기억나요? "
" 무슨 말? "
" 내가 누나 안 보내준다 했던 말요. "
" 아... 그럼, 기억나지. "
" 나 그거 빈 말 아니에요, 누나 이제 가고 싶어도 못 가요. 내가 방금 그 선배한테 엄청 대들고 왔거든요. "
" ... 너 그럼 전에 상처도... "
" 척하면 딱 아네, 맞아요 누나랑 붙어다니지 말라고 일종의 경고 차 맞은 건데 별로 안 아팠어 진짜. "
"... 미안해, 진짜 너무 미안해 찬아. 나 때문에... "
대답없는 찬이를 올려다보면 찬이는 나를 자신의 앞에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술 좀 마시고 취했다치고 얘기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알코올의 힘이 영 없다고는 못 말하겠네요. "
" 누나 나는요, 이 학교 들어오는 순간 늘 누나가 전부였어요. "
" 누나가 듣는 강의 따라 듣고 누나가 속한 동아리에 들어가고 누나가 가는 곳에 따라 가고. '
" 적어도 나한텐 누나는 그런 존재에요, 제 전부요. "
" 지금 이 말 사귀자는 말이에요, 00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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