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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XX/이홍빈] 킬미힐미 03 | 인스티즈



03


그 누구보다 청량한 미소를 뽐내며 생각보다 날카로운 낱말들을 뱉어내는 저 남자는

이내 웃던 모습 그대로 제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더니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탔다.


"뭐... 엇"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을 뱉어낼 뻔하다가 이내 꾹- 참아내고는 숨을 삼켰다.


쿡- 쿡- 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숨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기침소리 같기도 했다.


아픈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움직이며 내 옆에 멈춰 서는 그 발걸음에 내 두 눈이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 발짝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나면서도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 당황스러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려한 손가락을 뻗어 층수를 누르고는 그걸 가만히 바라봤다.


'10층'


그가 누른 그 번호가 유난히도 더 붉게 빛나는 듯했다.

죄책감이 들게도 붉은 색깔이었다.

아주 새빨간 경보등 같았다.

그걸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올라가는 승강기의 느낌에 나는 이내 그에게서 눈을 거두고는 다시 발끝을 바라봤다.

앞을 볼까 했지만, 문에 비치는 서로의 모습이 신경 쓰여 별로 그러고 싶지 만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숨 막히게도 많은 잔상을 남기고 있었고,

나는 그 거울이 비처내는 수 억 명의 나 자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로처럼 점점 어두워지는 공간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 갔다 오나 봐요?"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천천히 더해지는 그 층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더 새하얀 목대를 그 남자는 가지고 있었다.

전에는 가려져 있어 알지 못 했던 그 부분들.


아니, 몰랐으면 하는 당신의 그 속.


"네" 나는 다시 발끝을 응시하며 말했다.


밖에서 묻혀온 눈송이가 이내 축축하게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

코트 위에 앉아있던 눈송이들은 어느새 물방울이 되어 이제는 자신만의 무늬로 변해갔다.

나는 그와 한 공간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불편해서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여기 사시나 봐요" 내가 말했다.


"몰랐나 보네" 그가 말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그의 언변이 나는 갑갑했다.

아니 불편했다. 뭔지 모르게 점점 말리는 것만 같아서.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다시금 내가 말했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으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이홍빈은 어느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아니 읽을 엄두도 나지 않는 눈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평소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가면이었을까? 가면이라 부르는 게 맞는 걸까?


"병원?" 그가 말했다.


"...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그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이내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


"그런 거 마시니까 빨리 안 났는 거예요, 환자가"


내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이홍빈은 턱으로 슬쩍- 내 손에 들린 봉지를 가리켰다.


"감기에 음주는 금물인데" 


"그냥 사다가 놓는 거예요" 민망해진 나는 서둘러 말했다. 분명 변명처럼 들렸으리라.


"거짓말" 그가 말했다.


"...진짠데"


"그거 혼자 다 마시죠?"


"그럼 혼자 마시지 누구랑 마셔요"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는 대답했다.


그가 웃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매웠다.

나는 숨이 막혔다.

가슴이 아파왔다.


아주 오래전처럼.


이상한 불편함에 숨을 고르게 쉴 수가 없었다.

불쾌감보다는 덜 무섭고 구속이라기엔 더 조심스러운 느낌.

나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이 남자의 이런 분위기가 조금 두려워지려는 참이었다.

혹은 이 폐쇄적 공간의 압박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자꾸만 뺏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내가 잘못 봤나 하는 의문이 문득 뇌리에 스쳤다.


당신은 여우가 아니던가?


아니, 만약 당신이 여우가 아니라면,

그럼 내가 봤던 그 붉은 털은 도대체 무엇이지?

도둑일까? 여우일까? 까마귈까? 아니면... 


"이은우씨"


"네?" 


별안간 나를 부르는 그 낮은 목소리에 나는 조금 긴장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순간 땡-! 하는 소리가 드리며 문이 열렸다.


그것에 맞춰 이홍빈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도착했네요" 그가 말했다.


"아..."


이 의문스러운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홍빈이 다른 말을 하려 했다는 느낌 같은 느낌.

그 느낌을 나는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못내 찜찜했다.


"안 내려요?"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려요"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열린 문틈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상하게도 움츠러드는 신체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후끈거리는 긴장감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나는 알 수 없는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차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

아니, 어쩌면 너무 정신이 없고 너무 어지러웠기에 차마 납득할 수 없었던 감각들.

그런 것들이 지금 내 몸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쓸데없는 상상 때문이라며 나는 애써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쓸데없는 토끼 가면을 쓴 여우와 그의 붉은 털에 관한 상상 때문이라고.

아마 아주 예전에 읽은 책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왜곡되어 그에게 덮여씌워지고 있는 거라고,

그런 거라고.


아무튼 이건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신변의 위협이라 생각하기에는 조금 위화감이 드는 이 긴장감을 나는 생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위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위험한지 모르는 이 어리석음.


덫.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해진 걸 수도 있었다.

정말, 휴식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휴식이.


현관 문 앞에 다다라 비밀번호를 누르려 뚜껑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들리는 가는 마찰음에 손을 멈췄다.


"이은우 씨-" 나를 부르는 이홍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열리는 승강기 문을 나는 응시했다.

이홍빈은 거기에 서서 보기도 좋고 빨려 들어가기에도 딱 좋은 그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우리 자주 봐요"


나는 그의 그 눈을 마주 봤다.


"이웃이니까"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다.

그저 천천히 닫히는 그 문 사이로 즐겁다는 듯이 손을 흔드는

이홍빈의 순수한 얼굴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사람.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차오르는 피처럼 뜨거운 심장이

애써 아픈 가심을 찌르고 있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


청량한 미소와 순수한 얼굴.

나는 문득 내가 그런 표현들로 이홍빈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이 단어들은 내가 승강기 안에서 느꼈던 감정들과는 다르게도 아주 긍정적이며 때로는 유약하기까지 한 낱말들이었다.

그에 비에 밀폐된 좁은 공간 안에서 내뿜어대던 이홍빈 스스로의 분위기는 꽤나 갑갑하면서도 위압감이 들 정도였다.


그래,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는 그랬다.


꽤나 치명적인 분위기.


실로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된 계기나 횟수로 되새겨 보았을 때

나와 그는 안면만 있는 사이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서슴없이 느껴지는 이 오오라를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색 가운 안에 숨겨져있던 견고하게 짜인 니트의 모양만큼이나 그는 알 수 없는 공식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그를 지례 짐작하려는 크나큰 실수를.


다정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예리한 말투.

사려 깊은 행동들 사이로 전해지는 위압감.

보기 좋은 미소로 애써 감춘 알 수 없는 속내.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주 모순적이며, 또 아주 위험한 사람.


치명적인 사람.


단 두 번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그와 멀어지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덫.


덫.


덫.


시작.


나는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새 너무 우울한 책들을 많이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때와 같은 휴식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사직서라는 거... 어쩌면 진짜 내야 할 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일종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마치 내가 이홍빈이라는 사람에서 느낀 저 소년스러운 이미지들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는 꽤나 꾸밈없어 보였다.


꾸밈없이 순수한 감정들.

나는 그것을 간과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의문점은...


너는 왜 나에게 계속 나와 부딪히는가?


그런 생각들을 해대며 골머리를 섞다가 나는 이내 눈가를 비비며

쓸데없는 고민들로 소설을 쓰고 있다며 자신을 타박했다.

나의 상상력은 가끔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일을 늘어놓고 고민을 쌓아가기 마련이었기에,

나는 애써 이 피곤한 취미활동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으며,

처방받은 약을 입에 털어 넣고는 미적지근한 보리차를 들이켰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물줄기를 손등으로 슬쩍- 닦아내며 도달한 결론은 그거였다.


그는 의사이다.

그는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 (특히 미소가).

은근히 예리한 말투를 가졌다.

나의 위층에 산다.

가끔 쓸데없이 친절하다.

그리고...


이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의구심으로 걱정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상상력은 필요 없는 관계.


하지만 이내 상상력을 제외하고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내 혀끝에 맴도는 그 문장을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위험했다.


다만 상상뿐이더라도.


*


금요일 오후와 또 이어지는 토요일 내내 이불 속에서 꿈지럭 거리던 나는

주사의 활약 덕분인지 싹- 달아나버린 감기 기운을 털어내고는

굳은 근육들을 풀어내라는 관절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일요일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나갈 준비를 했다.


아침에 한가한 극장에서 조조영화 한 편 보는 일은 내 주말의 유일한 낙이었다.

조용한 극장에서 오로지 내가 원하는 영화를 보다가 느긋하게 점심거리를 사들고 집에 들어오거나,

아니면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책을 읽다 노을 깔린 서울의 오후를 감상하는 것도 나는 좋았다.


한층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발끝을 모았다.

안짱다리가 된다며 내 버릇을 싫어하던 엄마가 봤으면 등짝을 때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자세가 주는 기묘한 안정감은 생각보다 컸으므로 나는 이 버릇을 그다지 고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도착을 알리는 맑고 경쾌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겨울 아침의 찬 공기를 맞는 것이 싫었는지 남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는,

두툼한 야상을 갖춰 입은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웅크린다고 그의 제법 큰 체형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스스한 앞머리는 방금 감은 듯 조금 젖어 있었다.


그가 슬쩍 몸을 옮겨 자리를 비켜줬기에 나는 목례 한 번을 하고는 승강기에 올라탔다.

모자와 마스크 사이 언뜻 보이는 그의 눈이 활처럼 휘어지며 웃음을 보내는 듯하였기에 나도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조용한 적막 사이로 그가 몇 번 기침을 뱉어냈다.

기침감기에 걸린 듯 꽤나 칼칼한 숨소리였다.


"또 보네요 이은우씨" 쇠된 목소리로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약간 쉰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나를 마주 보는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무례한 줄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뭐야, 설마 못 알아봐요?" 그가 물었다.


"네?"


"섭섭하네-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지?" 그는 의아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몸을 완전히 내 쪽으로 돌린 후였다.


나는 이 칼칼하게 갈라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인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몇 번이나 초속으로 깜빡거리는 그 예쁜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아- 하는 탄식을 뱉어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 선생님" 내가 말했다.


"참나-" 어이가 없다는 듯 그가 마스크를 내리며 웃었다. 


"죄송해요 얼굴이 안 보여서 몰랐어요"


"어쩐지 웃는다 했어" 그가 중얼거렸다.


"원래 잘 웃어요"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그리 대답했다.

왜 변명을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 하면서.


"뭐 그러시다면야" 그는 핀잔을 주듯 나를 내려다보다 이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

그와 별로 접점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그런 그를 마주 보았다.


사실 나는 몇 번이고 그랬다.

몇 번이고 나는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럼에도 몇 번이나 정신 차려보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마술 같은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묘술 같은 일이었다.


너는 다 알고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다.


"일요일 아침부터 어디 가요?" 이홍빈은 승강기 한 쪽 면에 등을 기대며 내가 물었다.


"그냥 바람 쐬러 가요" 나는 대충 그리 둘러댔다.


"바람 쐬러 나가기엔 좀 춥지 않나-" 그가 다 안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 감기 걸리셨나 봐요?" 나는 그게 싫어 말은 돌리려는 듯 물었다.


내 물음에 이홍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이 정적에 나는 당황해 눈알을 굴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9층에서 1층까지 이 짧은 시간이 왜 이리도 길게만 느껴지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이 공간이 주는 압박감이었을까.

아니면...


"...그게" 아주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문득 들렸다.


"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그가 그런 내게 물었다.


"아니, 방금 뭐라 하신 것 같아서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꽃 피듯 그의 얼굴에 보조개가 번졌다.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정말 잘못 들었구나 싶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발끝을 봤다.

승강기가 천천히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 동안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기분.

정해진 법칙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느낌.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륵- 열렸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발을 뻗어 밖으로 향했다.

뒤에서 쿡- 쿡- 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익숙하다 말해야 하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


"바람 쐬러 어디로 가요?"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느새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나와 발을 맞추며 그리 물었기에

나는 여전히 모자를 뒤집어쓴 채로 마스크를 턱 끝에 걸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눈길을 돌렸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바닥을 잘 보고 걸어야만 했다.

그래,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영화 보러 가요, 조조영화" 내가 답했다.


"어, 나돈데" 그가 그리 말하며 웃었다.


나는 괜히 드는 이상한 기분에 문득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그는 세 발자국 정도 더 걸어가더니 빙글- 돌아 나를 마주 보고 섰다.

여전히도 기분 좋은 미소가 만연한 그 얼굴에 예쁜 꽃처럼 보조개가 피어있었다.

겨울의 동백꽃처럼 탐스럽고 붉은 꽃잎들.

어제 쌓인 눈에 반사된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런 어쩌면 감격스럽다고 말할 만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겨울바람에 등골이 시린 참이었다.

뼛속까지 파고들어 혈관 하나하나 타고 흘러내려가는 눈의 결정들처럼 바람이 아리게도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당신의 그 조금 젖은 검은 머리카락도 겨울바람에 얼어가는 듯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무슨 영화 볼 거예요 은우씨" 그가 문득 물었다.


나는 잠시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았는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낮고 그럼에도 소년처럼 호탕한 웃음이어서 나는 그 소리가 울리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았던 그 감정들을 이홍빈은 아주 쉽게 넘나드는 희한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호감인지 아니면 비호감인지 알 수 없는 관계의 단계에서 그 남자는 아주 간단하게도 허물을 벗어 던져 버렸고,

이내 마치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이런 이야기를 나눠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아주 자연스레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내심 그게 불안했다.


하지만 그 불안감 또한 내가 인간관계에서 매번 언뜻 느꼈다가

이내 뛰어넘어버리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또 평소와 같은 덤덤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늑대의 밤이요"


"독립영화 좋아하나 봐요-" 그가 내가 말했다.


"그냥..." 


"그냥?" 나의 얼버무림에 그는 추궁하듯 되물었다.


"좋아해요" 내가 말했다.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아니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 나는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그런 그의 웃음소리를 가만 듣다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잘 됐네요-"


문득 제 옆을 지나치려는 나를 붙잡으며 이홍빈은 말했다.

나는 힘 있게 나의 팔을 잡아채는 그 남자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다시 한 번 화사하게 웃었다.


"같이 가면 되겠네"


"....?"


"나도 그 영화 보러 가거든요"


"저는 영화 혼자 보는 거 좋아해요" 내가 말했다.


"나도 그래요" 그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럼 따로 보죠?" 


그렇게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발걸음을 떼려 하는 나의 팔을 그는 다시금 잡아당겼다.

아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그 손길로,

아까보다 조금 더 잔잔해진 그 표정으로.


"난 오늘 은우 씨랑 같이 보고 싶은데?"


"굳이 왜요?" 미간을 찌푸리며 내가 물었다.


그런 나를 가만 내려다보던 이홍빈은 이내 활짝 웃더니 입을 열었다.


"팝콘 먹고 싶은데 혼자는 다 못 먹겠더라고-"


목감기에 꽤나 시달린 듯 조금은 탁한 그 목소리가 나는 아주 기묘하게만 들렸다.


"참나"


*


아무도 없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더구나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직업, 그리고 사는 층 밖에 모르는 이 이홍빈이라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아침부터 커플 콤보를 사서 먹는다는 것도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별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홍빈은 의외로 이 기묘함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즐기고 있는듯하기도 했다.


"이상하죠?"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 이홍빈은 음료 하나를 내게 건네며 물었다.


"뭐가요"


"조조영화 나랑 보는 거"


"이 선생님이 같이 보자 한 거잖아요" 나는 콧등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그가 웃으며 답했다.


"나는 싫다고 했어요"


"그래도 같이 보러 왔잖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기껏 같이 와줬더니 쓸데없이 타박하는 게 괘씸해져 말했다.


"그럼 어차피 사람도 없는데 자리는 따로 앉아요, 서로 편하게"


"어, 그건 안 되지"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럼 팝콘 못 먹잖아요"


나는 눈알을 굴렸다.


그 모습을 보고는 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다 문득 마스크를 올려 기침을 하더니 이내 모자를 벗고는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이내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넣은 그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 이제 장난 그만 칠게요"


"드디어-"


그가 씩- 웃었다.


"들어 갈까요?"


*


어때 이상하지 않아?


들어본 적 있지 않니?


이 이야기...


내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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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엉엉....작가님 절 가지세여..ㅠㅠㅠㅠ홍빈이 특유의 묘함이 너무 잘 담겨있는...ㅠㅠ신알신하고가욤...ㅠㅠㅠㅠ사랑합니다
8년 전
스몰
고마워요♥ ^^
8년 전
독자2
음..되게신비로워..5화를보고나서생각해보니까난아직앞에껄읽지않았어..ㅎ
8년 전
스몰
저도 지금 답댓 거꾸로 달고 있어여ㅋㅋ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요♥사랑사랑
8년 전
독자3
꼬이에요!으어ㅓㅇ마지막에뭐죠!!무서워우어!!!!홍빈이랑 너무 잘 묘사돼서 막 와.... 하구 봤어요 만약 저게 홍빈이가 아니라 다른 일반인이었다면 소름끼쳤을거에요.... 의사라더니 같은아파트에서 만나고 나갈때도 만나고 갑자기 영화본다니까 자기도 본다그러고 (진짜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으 이렇게 해놓으니 좀 무서운데 그래도 홍빈이생각하니까 잔잔한 일상같아요!!
8년 전
독자4
아 뭐야ㅜㅜ 이홍빈 겁나 사람 잘 홀리네... 으아가우ㅏㅣ사ㅏ 그나저나 킬미힐미 브금은 다 너무 좋아요 모두 제 취향 ^0^/ 감사합니다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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