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사는 도부자
: 행쇼
" 이건 헬퍼비, 이건 뒷풀이비.. "
금요일 밤, 자기 직전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종이 봉투 여러장을 줄세워놓고 앉아있는 나는 곧이어 봉투에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무언가 적어내려갔다.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흐흥~ 저절로 나오는 콧노래와 천장을 뚫을 것 같은 기분에 어깨를 들썩거리자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걷어찬다. 갑작스러운 엉덩이 어택에 아!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엄마.
" 새신부라는게, 내일이 식인데 빨리 안자고 뭐해 "
" 그럼 엄마는 왜 새신부 엉덩이를 까고 그래! "
" 이제 너 시집가면 내가 언제 또 네 엉덩이를 깔 수 있겠어, 지금이라도 많이 까놔야지 "
그렇다.
나는 내일 5월의 신부가 될 몸. 스드메에 '스'자도 모르던 내가 스드메가 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결혼식은 그냥 식장 잡고 행진하고 주례나 듣고 끝내면 되지! 하고 간단하게 생각했던걸 웨딩플래너라는 전문가를 만나 하나부터 열까지 장황한 설명을 듣고 직접 계획하고,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결혼이라는게 믿기지가 않는다. 정식으로 상견례까지 하고, 하얀 청첩장 안에 들어가있는 내 이름 ○○○ 석자와 도경수 씨 이름, 빛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담겨있는 리허설 사진까지 봤는데도 꿈만 같다고 해야하나?
늘어놓았던 돈봉투를 모아서 꼭 쥔 내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니 은반지 대신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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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수 씨에게 정식프로포즈를 받은 건 2월달 중순에 있었던 졸업식 날이었다.
반에 가까운 아이들이 취업 준비 혹은 취업 실패로 인한 우울때문에 참여도 안한다는 대학교 졸업식, 나는 학사모를 쓰고 꼭 사진을 찍어 추억을 남겨야한다는 고집으로 전봇대 브라더스를 소환했다. 엄마는 당연히 딸의 마지막 졸업식이니까 굳이 내가 말을 하지않아도 졸업식 전날부터 나 대신 방방 떠있던건 안비밀...
" 너가 벌써 졸업이라니. 엊그제 오티 때 본 거 같은데 "
" 그러게 말이다. 너랑 오세훈이 갑자기 군대 갔을 때 너는 맨날 먹을 거 보내달라, 오세훈은 피부가 안좋아지는 것 같으니 순한 위장 크림을 사서 보내달라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그때엔 내가 진짜 너네 엄마였지 "
" 근데 나 너가 보내준 것 중에 두박스는 압수당했었던 듯 "
... 이런 미친.. 옆에서 킬킬거리며 웃던 박찬열은 내 머리 위에 얹어진 학사모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바글거리는 교정을 찍기 바쁜 엄마만 박찬열과 함께 나란히 따라가는데 이게 자꾸 시비다. 데뷔가 바로 코 앞이라며 오세훈이 못오는 바람에 박찬열한테 좀 감동했는데 그 감동이 파사삭 부셔지는 것 같다. 그냥 고등학교 때 애들 부를 걸... 괜히 귀찮게 하기 싫다고 안불렀어...
" 야 그래도 귀찮은 몸을 이끌고 이렇게 졸업식에 와주는 친구가 어디있냐, 너도 나중에 내 졸업식 때 꼭 와라 "
" 어 "
어차피 할 것도 없었던 주제에
" 근데 뭐 오늘 경수형이랑은 안만나? "
" 도경수 씨? "
도경수 씨라면... 아무래도 평일에 진행된 졸업식이라 직장일을 하는 도경수 씨가 쉽게 올 수 있을리가 없다. 거기다 이번에 대리로 승진해서 일이 더 바빠졌다고 들었는데... 음..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 도경수 씨는 지금 열나게 일하고 있을 걸, 나 먹여 살리려고 "
" ... 누굴 먹여 살려? "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 박찬열에 나, 하며 날 향해 삿대질을 해보이니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를 낸다.
" 웃어? "
" 너 먹여살리려면 경수형 밤에도 편의점 알바 뛰어야될걸 "
에그머니! 그건 안되ㄴ...게 아니라
" 꺼져라 "
" 밤에 야간 알바하고 아침에 신문 돌리고 잠깐 눈붙였다가 회사 출근해서 일하고 또 밤에 야간알바하고.. 그럼 너 먹여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
" 아 닥치라고 "
머리에 썼던 학사모를 손에 쥐어 모서리로 박찬열을 마구 때렸다. 학사모가 생각보다 단단하거든, 좀 아플거야.
한참을 박찬열과 투닥거리다가 ○○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등을 돌리니 학사가 있는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우는 짱쎈 여자선배부터 복학생 오빠들, 군대 갔다 오느라 졸업은 2년 뒤로 늦춰진 수많은 남자 동기들을 제외한 여자 동기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바쁘거나 개인적인 사정때문에 졸업식에 안온 얼굴들도 많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별 수 없는 노릇이니. 모두 머리엔 학사모를, 품에 한아름 꽃을 안고 한손에는 학위증이 들어있는 남색 단단한 커버를 들고있는 모습에 아, 진짜 졸업식이구나. 하는게 느껴진다.
" 이제 학위증 받고 나오는 거에요? "
" 그렇게됐네, 원래는 강당으로 모이래서 갔더니 학위수여식 그거, 대표 한 명만 받고 끝나는거!! 그냥 시완이나 잘 받고 오라고 하고 다같이 학사들러서 사진찍으러 나오는 길이야 "
내 물음에 여자선배가 대표만 기억해주는 더러운 세상! 하고 대략 10cm는 족히 넘어보이는 힐굽을 바닥에 소리나게 찍으며 분노를 표출했다.하하 멋쩍게 웃자 옆에있던 친구가 꽃으로 나를 살짝 툭 밀며 말했다.
" 나는 너 없어서 깜짝놀랐어, 분명 온다고했는데 왜 안오지~ 하고 "
" 난 일찍부터 강당에 갈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
" 기지배!! 그럼 좀 알려주지!!! "
졸업식이 졸업식인만큼 떠들썩한 분위기에 뒤늦게 엄마가 카메라를 들고 나를 쫓아왔다.
" ○○가 친구들? 사진 한 장만 찍자!! "
오늘따라 열정이 넘치는 사진기사가 된 엄마는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아까 찍었잖아~ 하며 짜증내려하는 나에 비해 친구들은 좋아요! 하며 내 양옆으로 서서 팔짱을 끼고 포즈를 취해주었고 나는 그대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진에 찍혔다.
수차례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은 후 한명씩 가족 혹은 친구들을 만나러간다며 흩어졌고 나는 그대로 옆에서 복학생 오빠와 떠들고 있는 박찬열에게 꽤 무게가 나가는 꽃다발을 떠넘겨주었다.
" 엄마 사진 다찍었지, 점저 먹으러가자 점심저녁"
" 더 같이 찍을 애들 없어? "
" 미안하지만 엄마 딸 학교에서 인기없으니까 가자고 "
" 내가 어쩌다 인기없는 딸을 낳았지, 그럼 찬열이는, 찬열이도 같이 밥 먹으러 가는거지? "
나름대로 엄청난 친화력을 자랑하는 박찬열은 어느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우리 엄마를 꾀었다. 이제는 박찬열까지 챙겨줄 정도니까, 어떻게 꾀었는지는 카페에서 이모한테 이모님!이모님! 하던걸보면 알 것 같다.
" 당연하죠! 짜장면 사주시는거죠? "
" 말만 해! 탕수육이든 양장피든 아줌마가 다 사줄게! "
먹을거 소리에 야호! 하고 좋다며 깨방정을 떠는 박찬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졸업식에 짜장면을 먹나...박찬열 졸업식인지 내 졸업식인지...
학과 사무실에 학사모와 가운을 반납하고 꽁짜밥 얻어먹을 생각에 기분이 업되어있는 박찬열이 잘아는 중식집이 있다며 우리 모녀를 안내했다. 이상하게 이런 졸업식같은 행사는 나보다 오히려 내 주변 사람들이 더 요란인 것 같다. 앞에서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 엄마와 박찬열 뒤를 따라가며 몰래 도경수 씨에게 [ 이제 졸업식 끝났어요! ] 라고 톡을 해보았지만 평소에는 칼답이라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광속으로 답장을 해주던 그였는데 오늘따라 답이 없다.
기쁜 졸업식 날인데 자꾸만 한숨이 나오려한다. 직장인이라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내심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나보다.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끝내고 엄마가 나를 집에 데려가려고하자 잠깐!! 잠깐만요!! 하며 엄마를 붙잡는 박찬열
" 아주머니 잠깐만요!! "
" 왜 그래, 먹고싶은게 더있어? "
" 아뇨, 그게 아니라. 졸업식 날인데 이렇게 끝내기 아쉽잖아요~ "
그러자 엄마가 나를 보며 그래?하고 되물었다.
" 잠깐 친구들끼리.. 놀다가... 들어가면 안될까요? 다른 친구들도 다 지금쯤 놀텐데.. "
피곤해서 빨리 들어가고싶은데..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자 박찬열이 어금니를 악물고 억지로 살벌하게 웃는 얼굴을 내게 보였다. 웃는 낯짝에 침 못뱉는다고 엄마는 어머! 내가 눈치가 없었네! 하며 내 품에 든 꽃다발을 뺏어들었다.
" 감사합니다! 술 안마시고 건전하게 놀다가 들여보내겠습니다!! "
술을 안마시면 왜 노는겨.. 대체 무슨 계획인지 모르겠다. 잘놀다 들어오라는 인사와 함께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자며 재빨리 뒤를 도는 박찬열
" 나는 걔네들이 같이 놀자고 말한거 못들었는데? 어디가 "
" 조용히하고 빨리 가자 "
" 뭔데!! 뭐냐고!!! "
내 징징거림은 깡그리 무시하고 갓길에 세워진 택시에 나를 우겨넣는다. 일단 타라고 하니까 타는데... 보통 목적지를 말할 때 목소리 크게해서 어디어디로 가주세요! 하지 않나.. 오늘따라 이상한 박찬열은 택시기사님 귀에 소근소근 속삭였다.
택시 안이라서 소란스럽게 말하지는 못하겠고 나즈막히 물었다.
" 어디가는거야 "
" 가면 알아 "
...
혹시 새우잡이 배에 팔려고... 아니면 인신매매... ㄴ..내 장기.. 내 장기...!!!! 경악스러운 표정을 금치못한 채 녀석을 보고 있으니 조금 높아진 볼륨으로 아! 니가 생각하는거 다 아니야! 하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게 다 아니면.. 정말 친구들 만나러가는건가.. 새끼들.. 나만 빼놓고 놀자는 이야기를 하다니.. 내가 은따라니..
조금은 슬퍼진 눈망울로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한 20분이 훨씬 넘게 흘렀을까, 점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정말 은따였을까? 하는 고뇌에 지나치는 표지판에 관심도 안가져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높은 고층 빌딩이 줄세워져있고 번쩍거리는 외제차의 수가 많아지는걸 보니 강남이라는 사실을 알 수 밖에 없었다.
" 슬슬 도착이다 "
" 뭔데, 왜 강남이야 "
" 아 거참, 성격 더럽게 급하네, 기다려봐 "
성격 더럽게 급하다니.. 박찬열을 흘겨봐주고 내가 얼마나 참을성있는 사람인지 증명해주기위해 입을 꾹 닫았다. 창 밖만 보기엔 지루해진 나머지 힐끔 핸드폰을 내려다봐 톡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도경수 씨로부터 답장이 없다. 요즘 일이 정말 많이 바쁘나..
히유,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고개를 드는데 어둠이 옅게깔린 하늘과 함께 한때 지겹도록 찾아왔던 카페가 눈에 들어왔고 천천히 멈추는 택시에 박찬열은 주섬주섬 돈을 꺼내들었다.
" 잔돈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
빨리 내리라는 박찬열의 재촉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시에서 내리자 내가 올걸 알았다는 듯이 문 앞에 달린 작은 전등이 밝게 켜졌다.
" 뭐야, 도경수 씨 카페에 있대? 뭘, 그걸 비밀로 하고 온거야~ "
" 조용히하고 들어가 "
내 등을 미는 놈의 손길에 어쩔수없다는 듯이 룰루랄라 카페에 들어가자 도경수 씨말고 아무도없는 홀과 여느때와 같이 카운터에서 예흥이가 안뇽,하고 나를 반겨주었다. 나도 수줍게 안녕하고 인사를 받아준후 익숙한 도경수 씨의 뒷통수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 도경ㅅ "
" ㅇ..왔어요!!? "
발랄하게 도경수 씨!! 하고 깜짝 놀래켜주겠다는 내 계획과는 다르게 매우 당황하며 벌떡 일어나는 그에 나도 함께 당황한 나머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못했다.
" ..어.. 네.. 저 왔어요... "
" 그럼... 잠깐 앉을래요? "
오늘따라 박찬열도 이상한데 도경수 씨가 더이상하다. 몸에 빠짝 긴장이 들어간건 물론이거니와 목이 바른지 자꾸 꼴깍꼴깍 침을 삼키는게... 수상해..
매의 눈으로 테이블 밑에서 손을 꼼지락 거리는 도경수 씨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뭐에요!! 하며 테이블 밑으로 머리를 넣고싶지만 그건 매너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도경수 씨와의 어색한 분위기에 코만 훌쩍이고 있으니 머지않아 예흥이가 커피 두 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카운터에서 나왔다.
" 코피 나왔숩미다 "
예흥이의 귀여운 발음에 어색한 분위기 사이 쿡 하고 웃음을 뿜을뻔했다. 초인적인 힘으로 웃음을 참고 눈만 또르르 굴리자 도경수 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
" 오늘 졸업했다구요? "
" 이제 막 학교에서 오는 길이었어요, 근데 도경수 씨 왜 톡 안받았어요? "
" 아.. 일이 바빠서... "
그 놈의 일. 되도않는 투정을 부리듯이 치, 하고 작게 고개를 돌리자 미안해요. 하며 드디어 테이블 밑으로 숨겼던 꽃을 건내준다.
" 졸업 축하해요. 주말이면 갔었을텐데 "
" 이렇게라도 축하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
히히 실없이 웃으며 꽃다발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품에 꼭 안았다. 옛날에는 꽃은 먹을 수도 없고 받아봤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받아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 그 꽃들, 향기가 참 좋아서 샀어요 "
" 그래요? 저 진짜 도경수 씨한테 머리띠든 뭐든 다받았는데 꽃은 처음 받는 것 같아요! "
나는 정말 감동받았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 안면근육이 떨릴 정도로 활짝 웃었지만 도경수 씨의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로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걸까?
*
이게 아닌데
경수는 혼란스러웠다. 두 달 전부터 남몰래 준비한 이벤트가 물거품이 될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졸업한 당일 바로 깜짝 이벤트를 해 감동시켜주겠다는 성대한 계획은 이미 경수가 어정쩡하게 ㅇ..왔어요!!? 할 때부터 망가졌지만 이렇게 심각하게 망가질줄은...
사실 경수가 꽃을 숨긴 이유는, 보통 꽃다발이었다면 그냥 축하해요! 하며 건내주면 됐겠지만 경수가 준비한 꽃다발은 중간에 있는 장미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물고있었기에 숨기기에 바빴던 것이었다. 거기다 꽃다발을 건내주면 음~ 향기가 좋네요~ 하며 꽃다발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반지를 발견해줄줄 알았는데 그냥 품에 안기만하니 이대로 반지는 온전히 장미의 소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반지를 발견하면, 이게 바로 지금 반지가 다이아몬드로 바뀌는 마술이에요!! 하고 외치고 창고에 숨어있던 김종인 씨가 나와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헬륨 풍선을 풀고 불을 끄면 카페 곳곳에 두었던 촛불이 환하게 빛나고, 최상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이렇게되면 김종인 씨는 오늘 밤 카페 창고에서 자야하는 ㅅ.. 하..
경수는 타는 목에 두 달 전부터 몰래 이모님께 카푸치노 만드는 법을 배워서 그녀가 카페에 오기전 자신이 미리 만들어둔 커피를 들이켰다. 이 순간에도 희끗희끗 장미 위에서 반짝이는 반지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 무튼 꽃 정말 고마워요, 빨리 집에가서 물에 꽂아놔야겠어요 "
○○씨를 빨리 집에 들여보내야 반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정적이 흐르는 카페 안, 문에 달린 팻말을 CLOSE로 바꾼 후 카운터에서 예흥군과 함께 나를 바라보는 찬열군의 시선이 애처롭다. 창고에 박혀있느라 많이 찌뿌둥한지 조금씩 떠드는 김종인 씨와 세훈군의 목소리도 들리고.. 어쩌면 좋지, 하고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 문뜩 직접 꽃을 사러갔었을 때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인테리어에 비해 우직한 남자 플로리스트가 장미를 다듬어주며 한 말이 떠올랐다.
' 여자친구분께 드릴건가봐요 '
' 네, 꽃은 처음 주는거라 좋아할지는 모르겠네요 '
' 좋아하실거에요. 빨간 장미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
' .. 사랑..? '
' 정답, 거기에 좀더 덧붙이자면 빨간 장미는 열렬한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분명 여자친구분도 좋아하실거에요 '
..
꽃말에 감명을 받은 나는 꽃다발에 들어간 꽃말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플로리스트의 말을 경청했고 아직까지 뇌리에서 잊혀지지않는 열렬한 사랑, 다섯글자를 되새기며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
" ○○씨, 혹시 분홍색 장미의 꽃말 알아요? "
난데없이 손을 뻗어 내 품에 안겨있는 꽃 중 분홍색 장미를 가리키는 도경수 씨
" 분홍색 장미요? 장미면 사랑아니에요? "
" 맞아요, 분홍색 장미는 행복한 사랑이래요 "
" 우왘! 오글오글! "
ㅋㅋㅋㅋㅋ갑자기 웬 꽃말 설명
" 그럼 여기 이 튤립의 꽃말도 맞춰봐요 "
" 튤립? 튤립은 모르겠어요 "
빨간 튤립을 톡톡 건드리는 그에게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려주었다.
" 사랑의 고백이에요 "
오글거린다는 제스쳐는 여전했지만 열심히 도경수 씨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 다음은 안개꽃, 이것도 맞춰볼래요? "
" 안개니까... 어.. 비밀? "
"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랑의 성공이더라구요 "
내 궁예질이 틀리다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음 꽃으로 옮겨가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꽃다발 한 중간에 있는 빨간 장미에서 눈이 멈추었다. 빨간 장미 꽃말은 뻔하지 뭐 사ㄹ.
..
....
" 그럼 이 빨간 장미는 뭘까요 "
이 반지는 뭘까요
" 이것도 사랑인데 "
" ... "
" 열렬한 사랑이래요 "
도경수 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장미 위에 있던 반지를 집어들고 육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스에상에!!!!!!!!!!!!!!!!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런 말도 나가지가 않는다.
" 보여줄거라고 했잖아요 "
" .. "
" ○○씨 졸업하면 지금 반지가, 다이아몬드 반지로 바뀌는 마술 "
작게 떨리는 내 손에서 반지를 가져가 천천히 내 왼손에서 기존에 꼈던 은반지를 빼곤 준비한 반지를 끼워주는 도경수 씨
" 원래 계획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마술 하나는 제대로 보여줬네요 "
" 뭐야.. 도경수 씨... "
" ..○○씨 ㅇ..울어요? "
갑작스러운 프로포즈에 놀란 마음과 그동안 홀로 삭혔던 마음고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가자 여러 복잡한 감정에 눈물이 터져나온다. 정말 도경수 씨가 나같은 여자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도 의문이거니와 다른 평범한 남자에 비해도 많이 모자란 나인데. 으헝헝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자 도경수 씨는 당황한 것도 잠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한참을 품에서 울다가 잦아드는 울음에 내 등을 토닥여주던 도경수 씨가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다.
" 결혼해요 "
*
프로포즈 받았던 때가 다 생각나고 하하 이거 참, 드라마에서 결혼식 전날에 여자주인공이 엄마와 자는 장면이 무색하게 나는 내 방에서 홀로 덩그러니 누웠다. 같이자면 내 잠버릇이 더러워서 일어나서는 몸이 쑤시다나 뭐라나..
내가 결혼한다는게 실감이 안나서 잠만 잘올 것 같았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잠이 오기는 커녕 정신이 또롱또롱하다. 이불을 꼭 끌어안고 뒤척거리다가 의미없이 청첩장을 읽다가 전봇대 브라더스한테 청첩장을 직접 줄 때도 생각나고..
박찬열은 만나자고하면 곧바로 튀어나오는 애니까 청첩장 주기는 쉬웠는데 오세훈이 가장 문제였다. 데뷔해서 신인이라고 쳐도 꽤나 큰 기획사인 나머지 데뷔부터 인기가 수직상승하질 않나 인터넷에 생각없이 돌아다니다보면 이번 신인 남돌 미모 클래스하고 오세훈 사진이 떠돌아다니질 않나. 내가 알던 오세훈이 맞나 싶을 정도다. 전에는 영상통화 걸어주면 미칠듯이 기뻐하던 녀석이 요즘 걸면 안받거나 매니져가 받거나 가끔 받아도 반가워는 해주지만 금방 바쁘다고 끊어버리니까.. 청첩장을 팬레터처럼 보낼까 싶어도 소속사에서 스팸으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릴 것같고..
아무래도 오는 건 무리려나 싶어 일단 문자로 오세훈에게 [나 결혼해, 너 바빠서 못오지] 하고 문자를 넣고나서 아마 그 다음 날 아침에 답장이 왔던걸로 기억한다. 그니까 답장 내용이
[ 누구 ]
였나... 엄청 괘씸한 내용이란건 똑똑히 기억한다. 황당한 나머지 답장을 받자마자 오세훈에게 전화를 거니 여전히 그 번호를 쓰고있는 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너나 모르냐며 따지자 숨이 넘어갈 듯 웃었던 오세훈
「 아 나는 팬이 장난치는 건줄 알고, 어떻게 네 번호를 알고 설마해서 」
" 됐거든 이미 빈정 상했어, 너네 노래 처음나오자마자 스트리밍 해줬는데 이제는 안하련다 "
「 너는 이미 우리 노래에 빠졌을걸, 특히 내 목.소.리.에 」
" 염병, 너 파트 2초던데 "
「 2초라도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강력한 임팩트가 존재했느냐가 문제지 」
소속사 들어가서 헛소리 하는 방법만 배워온건가. 여전히 땅콩왕자 때의 똘끼를 숨기지 못하는 오세훈과 농담따먹기를 하다가 본래 전화를 건 목적을 다하기 위해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 너 그.. 5월달 중순쯤에 시간 있냐? "
「 몰라 매니저형한테 물어봐야돼 」
" 아니.. 뭐.. 나 그 때 결혼하거든.. 그냥 올 수 있냐고.. "
결혼 이야기에 어? 하고 한참 말을 잃었던 오세훈은 다시 푸핫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 장난 즐, 훈이 숍 가야 되니까 전화 끊는다 」
" 야!! 내가 장난하려고 문자까지 보내고 지금까지 기다렸겠냐? "
「 ... 진짜? 」
" 어 나 진짜 결혼한다고, 기쁜 소식을 꼭 이렇게 전해야겠냐고 "
「 누구랑, 경수형? 」
" 그럼 누구랑 해 "
「 헐 야, 미친거 아니야? 왜 훈이한테 청첩장 안줘!!! 」
... 이 시ㅂ.. 아니야 아냐.. 빨리 청첩장을 달라며 징징거리는 오세훈이 내 앞에 있었다면 한 대 갈기고 싶은 심경이다.
" 우편으로 보낼까 했는데 너네 숙소생활 하지 않아? "
「 우편 안돼, 훈이 청첩장 처음 받아보는거란 말이야 그니까 꼭 직접 받아야돼 」
" 그니까 널 언제 만나냐고 "
「 지금 」
그리고 나는 진짜 오세훈한테 청첩장 주려고 청담동에 있는 숍까지 찾아갔더랬지...^^ 청첩장을 주고 나는 교통비 대신 사인시디를 얻고, 나중에 프리미엄 붙여서 팔면 잘 팔릴거라고 당부했던 오세훈의 말은 아직까지 잊지못한다.
" 식장에서 슈퍼스타 훈이가 특별 출연으로 춤춰줄게 "
청첩장을 받고 보는 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요망한 춤사위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대로 매니저한테 숍 안으로 끌려들어갔지만 끌려들어가면서도 꼭 간다!!! 내 친구 아줌마 되는 거 보러간다!!! 하고 외치던 것도 아직까지 귓가에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굳이 기억해내려고 애쓰지 않아서 그렇지 결혼 준비하면서 꽤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소소하게 하자는 내 의견과는 다르게 무조건 성대하게 특급호텔에서 해야한다는 시가와의 의견 충돌부터 한두달 동안만 시집에 들어가 산다는 내 말에 어릴 적부터 벌써 시집살이를 하냐며 서글퍼하던 엄마, 웨딩드레스 맞추는 거에 꼭 따라나서고 싶어하는 도경수 씨를 말리던 것, 주말마다 혼수준비라 치고 하루종일 도경수 씨와 붙어다니던 것, 리허설 웨딩 촬영 때 가까이 입술이 닿을랑 말랑할 때 도경수 씨가 참지 못하고 쪽 뽀뽀했던 것까지.
물론 예식은 시가 체면때문에 특급호텔에서 진행하는 터라 내가 꿈꾸던 소소한 결혼식은 물건너가고 우리 집에 있던 내 짐의 반은 이미 도경수 씨 집에 있고 본식에서 입을 웨딩드레스는 도경수 씨에게 철저하게 숨기고 식때 내 풀파워메이크업과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본 도경수 씨의 표정을 상상하니 내일이 기다려진다.
이제야 조금씩 결혼이란게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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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떨리시죠~ 말로만 듣던 오월의 신부라니 너무 부러워요~ "
" 보통 신랑분이랑 같이 오시던데 신랑분은 어디계세요? "
" 어디서 결혼하세요? 식장 잡기 힘드셨을텐데~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충 세안을 하고 미리 예약을 잡아놓은 청담 숍은 내가 등장하자마자 분주해졌다. 정신없는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들어간다는 말도 없이 내 얼굴을 토닥거리고 머리를 만지는 손에 다소 경직된 표정을 하자 이런저런 말을 건내는 직원들과 함께 막 도착한 포토그래퍼가 옆에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기시작했다.
" 도경수 ㅆ.. 아니 신랑은 식장에서 준비하기로 했어요 "
" 어머~ 예쁜 모습해서 식 때 깜짝 놀래켜주려구~ "
내 입에서 나오는 신랑이라는 말이 이렇게 어색할 줄이야...
서서히 변신해가는 내 모습을 거울을 통해 지켜보자니 어색해진 나머지 슬금슬금 시선을 내렸다.
" 성수기라 가격도 많이 쎌텐데 예식장 1년 전부터 예약 해놓으셨어요? 저도 오월의 신부하려다가 팔월의 신부됐잖아요! 호호홓!! "
" .. 아뇨, 식장은 제가 안골랐어요. 시댁에서 다 해주셔서 "
" 어머 진짜요? 시댁이 너무 좋으시다! 그럼 식은 이 주변? "
" 아뇨, 한강 건너서.."
" 한강 건너서? "
" 저기.. 연예인들 많이하는데.. "
나도 참 주책맞게 그동안 해보지도 못했던 돈자랑인데 결혼식 날이라고 이렇게 의도치않게 하게됐다. 좀 재수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왠지 기분이 좋은 느낌적인 느낌..? 연예인들 많이하는데.. 라고 말을 얼버무리자 한참 조잘거리던 입을 닫고 눈두덩이에 아이쉐도우를 바르다가 다시금 떠드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 아 그.. 호텔이요? "
" .. 네 "
" ... 시댁이 참 좋으시네요. 부러워요 "
아까와는 사뭇다른 목소리톤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리고나서 말이 없을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또 신나게 떠들었고 나는 도대체 메이크업 하기에도 바쁜데 이렇게 떠드는지 하나도 이해를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겨우 이해 할 수 있었다. '
한시간정도면 끝나겠지 했던 메이크업과 헤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가만히 앉아있던 나마저 힘이 빠질 노릇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건지 묵묵히 있던 헤어 아티스트가 머리를 틀어올리며 말했다.
" 힘드시죠,근데 가장 이뻐보이려면 어쩔 수 없어요 "
" 생각보다 이뻐보이려고 하는게 힘드네요 "
" 그럼 남편 자랑 좀 해보세요, 다른 분들은 말하라고 굳이 안해도 두 세시간동안 꽉 채워서 다 하시던데, 내 남편은 판사다~ 강남에 집이 몇채다! "
남편 자랑..!?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얼굴에 무언가 바르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눈을 마주치니 호호 웃는다.
" 음.. 도경수 ㅆ... 아니 제 남편은 "
" 어머 아까부터 생각했던건데 존댓말 부부세요? "
" 네, 어쩌다보니 계속 존댓말을 쓰네요 "
" 존댓말 부부가 그렇게 안싸우고 좋다던데~ 어쩜 하나부터 열까지 부러운게 천지야! "
가짜 속눈썹을 얼마나 붙인건지 무거운 눈커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슨 말을 하든 말끝마다 부럽다~라는 소리를 들어 해보라는 남편 자랑 얼마 하지도 못하고 헤어와 메이크업이 끝나갈 때쯤, 리허설 때도 만난 헬퍼이모가 준비한 웨딩드레스와 함께 숍 안으로 들어오셨다. 식이 끝날 때까지 지금 공들여 한 화장과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마무리로 픽서까지 뿌린 후 안면을 튼 헬퍼이모에게 인사를 한 뒤 탈의실로 안내를 받는데 다른 사람들의 손을 이렇게 많이 타본 날도 처음인데다가 모두가 나를 떠받듯이 치켜올려세워주니 내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되어 대우받는 느낌이다. 이래서 결혼식이 신부가 주인공인 날이라고 하는건가.
딱봐도 엄청 작아보이는 웨딩드레스에 몸을 구겨넣기위해 온몸에 힘을 빡 주고 숨을 흡 들이키고 어깨를 폈다.
그래, 오늘은 내가 짱짱걸이다.
*
" 도경수 씨, 나 긴장해서 토할 것 같아. 청심환 있어? "
신랑의 가장 가까운 지인으로 오늘 결혼식에서 축의금 관리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종인은 준비 완료 후 대기타고 있는 경수에게 청심환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더 긴장해서 토할 것 같은 건 경수쪽이었다. 다만 너무 긴장해서 말을 할 정신이 없을 뿐. 손에서 넘쳐 흐르는 땀을 수시로 닦아보지만 오히려 더 날 뿐이었다. 수건을 쥐고있었으면 한시간내로 수건이 축축해질 정도이니까 말이다.
" 아 그니까 왜 나한테 돈을 맡겨! 아니야, 내가 가장 믿을만한 지인이니까.., 아니그래도!! "
신랑을 따라 덩달아 긴장한 나머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종인. 평정심을 잃기 시작했다.
" 진짜! 왜 내가 축의금. 하. 나 진짜 축의금 중에서 오만원 빼서 고기 사먹을거니까 나중에 돈 비어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
겨우겨우 정신을 붙들고있는 경수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애초에 축의금을 바라는 마음도 없었거니와 축의금을 받지말까했지만 일단 받아서 저축해놓으라는 부모님의 말씀때문에 받는거지 축의금을 많이 받아봤자 특급 호텔에서 식을 진행하면서 쓴 돈에 얼만큼을 충당하겠는가.
" 오만원으로 되겠습니까, 한 오십만원정도 빼서 어머니랑 한우 사드세요 "
" 어, 진짜? 나 하라면 하는 사람인데? "
" 청심환 대신 드리는 선물입니다 "
한우소리에 평정심을 되찾은 종인은 오~ 하며 감탄사를 날려주었고 경수는 아무말 없이 연신 바지에 손바닥을 쓱쓱 문지르며 땀을 닦았다.
" 진짜, 내가 왜 이렇게 긴장되지. 결혼식은 나름 가볼대로 많이 가봤는데 이렇게 긴장되는 결혼식은 처음이야 "
" 저도 많이 가봤는데 이렇게 긴장되는 결혼식은 처음입니다 "
...
" 그야 도경수 씨 결혼식이니까! 뭐 내 결혼식이야? "
생각없이 아무말이나 떠오르는대로 내뱉은 경수는 아차싶어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매만지고 머리를 쓸어넘기려는데 종인이 기겁을 하며 막았다.
" 미쳤어? 한시간동안이나 머리 만지고 메이크업 받아놓고! "
" 아.. "
신랑의 상태를 보니 이래서야 제대로 식 진행이 되려는지 걱정스러운 종인이다.
식 진행시간이 가까워지고 양가 부모님들과 한 명, 두 명 도착하는 하객들에 축의금을 받을 준비를 해야겠다며 일찍이 종인이 먼저 나가버리고 홀로 남은 경수는 쿵쿵 벽에 머리를 찧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는 자기 반성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머리를 세팅해놓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런걸보면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하다.
빨리 하객맞이를 하라며 재촉하는 식장 직원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로비로 나간 경수는 먼저 부모님들께 인사를 드린 후 차근차근 도착하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하객맞이가 시작되고 아는 얼굴이 하나 둘 늘어나 긴장이 풀어지자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담고 꾸벅꾸벅 인사를 하는 경수
" 경수야!! "
밀물 밀려오듯 하객들이 넘쳐나는 로비 한중간에서 갑자기 빠르게 달려와 경수를 안는 남자 한명, 경수와 같은 유치원부터 초,중,고 까지 함께 나온 친구인 종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버리는 바람에 연락할 구실도 없이 멀어지나했더니 혹시나 하고 보내본 청첩장을 보고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와 준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핀 경수의 말문이 터졌다.
" 어떻게 온거야, 못올 줄 알았는데 "
" 이게 그냥 결혼식이냐, 너가 장가간다는데 와야지.때마침 한국에 볼 일도 있고.. 너 한 마흔에 장가갈 줄 알았는데 쌔끼 이거 나보다 더 빨리 가다니,어떤 여자야 대체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인은 좋은 친구에 대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 오늘 나도 우리 신부 털끝도 못봤어, 본식 때 최고로 이쁜 모습 보여줄거라고 얼마나 꽁꽁 가리고 다니는지 "
" 왠지 너랑 닮았을 것같아 "
" 안닮았어, 엄청 이쁜데 "
" ㅋㅋㅋㅋㅋㅋㅋ와, 도경수. 내가 알던 도경수 맞으십니까? "
한참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로비에 사람들이 조금 더 늘어나자 눈치를 보다 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종대
" 아무튼, 축의금 완전 빵빵하게 넣었으니까 그걸로 냉장고나 한 대 사라ㅋㅋㅋㅋㅋㅋㅋ "
" 자신 있나봐, 얼만큼 넣었길래. 기대할게 "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식장에 들어가는 종대의 어깨를 툭 쳐주던 경수는 이내 로비에 가득 차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우월한 키를 이용해 빼꼼 머리를 내민 찬열과 세훈을 발견했다. 역시 전봇대 브라더스
그런데 손에 캠코더를 들고있는 찬열군 꼴이 수상쩍다. 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계속 경수의 시선은 전봇대 브라더스에게 꽂혀있는데 둘이 캠코더를 향해 떠들다가 갑자기 바쁘게 축의금을 받아 명단을 작성하는 종인에게 캠코더를 들이밀었다.
" 종인이형! 니니형! "
" 뭐야, 너네 지금 뭐해? "
" 결혼 축하 영상 찍어요. 식 끝나면 캠코더 채로 ○○○한테 줄거에요 "
귀를 쫑긋 세우고 뭐하는지 몰래 들어보니 나름대로 준비한 귀여운 이벤트인듯 싶다.
" 우리 새신랑! 새신부에게 한마디! "
힐끔 전봇대 브라더스를 바라보자 찬열군 옆에 서있던 세훈군이 작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 형도 시킬거에요 '
...
미리 멘트 준비해놔야겠네요.
*
" 세상에 마상에~ ○○○ 맨날 결혼 못할 것 같다고 그러더니 "
" 그니까 고딩 때 지 맨날 시집은 다갔다고, 누가 데려가냐고 그러더니 자기가 제일 빨리가~ "
다소곳이 신부 대기실에 있는 공주 의자에 앉아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가장 화두가 되는 이슈는 역시나 내가 어디서 이런 빵빵한 남자를 만났냐는 것이었다.
" 너 대체 어디서 이런 남자 꼬셨어? 스물 다섯에 호텔 결혼식까지 하고 말이야! "
너네도 강남 카페에서 알바해..^^ 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남편 직장 근처에서 만났다고 하니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꺄악 거리며 고딩 때처럼 호응이 쩔어주신다.
" 뭐하는 남자야? "
" 그냥.. 기업 다녀 "
우리 남편은 리터소프트 후계자야!!!!!!!! 하고 자랑할 수가 없어 도도하게 기업 하나 다닌다고만 대답해주자 싱거운 대답이었는데 우우~ 하며 야유를 날리는 친구들
" 뭐 대기업 다녀? 제성? 대경? "
" 아냐, 그냥 IT회사 하나.. "
" 허유 기지배, 겸손 떠네. 여기서 결혼 할거면 IT회사 그냥 다니는게 아니라 이사는 되야 할거다 "
ㅎ, 의미심장한 미소만 날려주고 헬퍼 이모가 파우더 좀 바르자며 분을 가져오는데 난데없이 신부 대기실 안으로 캠코더를 든 박찬열이 난입했다. 화장이 깨진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입을 쩍하고 벌리자 박찬열 뒤로 수줍게 따라들어오는 오세훈
" 오늘의 신부 ○○○입니다!!!!! 쨔쟈자라라랸 "
미친놈...
시끄럽게 떠들면서 주위를 한 번 크게 돌며 내 모습을 캠코더에 담는 박찬열
" 이야 역시 신부 화장이 쩔긴쩔어? 맨날 학교나 카페에 눈썹만 그리고 오던게 "
" 꺼져! "
" 신부님은 오늘 하루 이쁜 말만 하기 "
저 이런.. 씨... 오늘같은 날에도 입방정 떨기 여념없는 박찬열과 스타병에 쩔어 얼굴을 가리기 바쁜 오세훈의 번듯한 얼굴에 넘어간 친구들은 눈을 번뜩이며 내게 작게 말을 걸었다.
" 누구야? "
" 아 대학교 때 만난 또라이들, 미쳤나봐 진짜. 내가 쪽팔려서... "
" 너 이 기지배.. 우리 온다고 또, 이런 선물을 준비하고 "
?
넘어가지마 이것들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전봇대들이 좋다며 눈에서 하트를 날려보낸다.
" 야 너 그래도 꼴에 신부라고 오늘 좀 이쁘다 "
박찬열은 들고있던 캠코더를 내려놓고 서슴없이 내 왼쪽편으로 다가와 씨익 웃었다. 자꾸만 자라처럼 코트 속으로 얼굴을 숨기던 오세훈도 얼른 사진 찍자는 사진기사님의 말에 쭈뼛거리며 오른쪽 가까이 섰고 오늘 하루 웃는게 일인 나는 덜덜 떨리는 안면근육으로 있는 힘껏 미소를 지었다.
" 어, 나 저 남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무방비상태로 있는 오세훈을 가리키며 외치는 친구 한 명에 모두들 벌써부터 작업걸지 말라며 깔깔 웃었지만 그 친구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느끼는 이유를 아는 나와 전봇대브라더스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봤겠지.. 오세훈이 이런 결혼식장이 아니라 초등학교나 중학교 갔으면 알아보는 애들 꽤 될 걸..
언제 식이 시작되려나 하고 먼산만 바라보는데 때마침 곧 식이 시작되니 하객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식장으로 입장해주시길 바란다는 방송이 나오고 꺄르르 시끄럽게 떠들던 친구들이 싸그리 빠져나갔다. 꾸물떡꾸물떡 신부대기실에 끝까지 남아서 캠코더를 만지던 박찬열은 캠코더 렌즈를 내게 가까이 하고는 말했다.
" 너가 마지막이다. 새신랑, 너의 남편, 경수형한테 할 말! "
" 도경수 씨한테 할 말? "
" 빨리, 나 들어오래잖아 "
박찬열의 재촉에 음, 하고 고민하던 것도 잠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도경수 씨 "
"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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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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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
그와 함께 어두운 식장 가득 잔잔한 음악과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깔렸다. 저 카펫 끝에 서있는 도경수 씨를 비춰주는 조명과 아빠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나를 향해 비춰주는 조명이 서서히 가까워져간다. 넘어지면 어떡하지, 발을 삐끗하면 어떡하지 하던 걱정과는 달리 걸음은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도경수 씨의 눈이 동그랗게 커져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걷다보니 어느새 환하게 웃고있는 도경수 씨가 날 맞아주었다. 오늘따라 엄숙한 분위기로 내 손을 잡은 아빠는 한 번 꼭 쥐어보고는 주기 싫다는 듯이 느리게 도경수 씨에게 손을 건냈고 그는 들리지않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라고 조근거리며 내 손을 받아쥐었다.
맞절이라는 진행답게 마주보고 선 나와 도경수 씨는 시선을 맞추자마자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릴뻔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그냥 마냥 좋다는 눈빛이었지만 오늘은 모든게 다 새롭고, 따뜻하고, 뭉클한, 그런 눈빛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인사를 하고 결혼 하기 두 달 전부터 주례사분께서 읽어주시고 의미없이 네네, 하고 대답하는 것보다 직접 말하는게 더 의미있을것 같다고 끙끙 함께 머리 싸매며 준비했던 혼인서약서를 받아들었다. 전에 확인했을 때는 완벽해! 하며 자화자찬을 했지만 이렇게보니까 왜 이렇게 오그라드는건지. 나란히 서서 눈빛을 주고 받다가 첫문장을 함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저희 두 사람은 부부가 되는 오늘, 부모님과 참석해주신 여러분들 앞에서 다음을 서약합니다 "
그리고 먼저 스타트를 끊은건 도경수 씨
" 언제나 당신이 기대어 쉴 수 있는 넓은 포용과 이해를 가진 자상한 남편이 되겠습니다 "
" 힘들다고 투정 부리지 않고 무슨 일이 있든 당신의 편에서 생각할 수 있는 성숙된 아내가 되겠습니다 "
" 아낌없는 사랑과 표현으로 당신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 궂은 일이 있어도 미소를 잃지 않아 당신의 얼굴에서도 웃음꽃이 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
한문장 한문장 읽어나가며 곁눈질로 하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는데 비교적 낮은 연령층에서는 오글거린다는 반응과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대게였고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분들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가득 담겨있었다.
" 늘 가정을 중심으로 생각할 것이며 화목한 가정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 가정을 책임져야한다는 책임감을 나누어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
" 장인,장모님께 믿음직한 사위이자 듬직한 큰아들이 되어드리겠습니다 "
" 아버님,어머님께 슬기롭고 현명한 며느리이자 애교 많은 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
" 앞으로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당신과 함께하는 더 큰 행복과 사랑을 찾도록 더욱 노력하고 맞잡은 두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
" 앞으로 어떠한 시련이 와도 당신을 믿고 맞잡은 두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
" 저희 결혼을 축하해주신 여러분들의 따뜻한 마음 잊지 않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신랑 도경수 신부 ○○○ "
어릴 적 엄마아빠를 따라 결혼식장에 가면 혼인 서약이 마냥 지루하고 따분했었는데 이렇게 내가 혼인 서약을 하는 입장이 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어서 성혼선언문 낭독에 주례사, 고등학교 때 친구들의 축가와 댄스에 케이크 컷팅식까지 식이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짧게 부모님께 인사, 내빈께 인사까지 한 후 대망의 행진, 도경수 씨와 꼭 낀 팔짱과 내게 집중되어있는 시선에 다리가 조금씩 떨린다. 후.. 작게 숨을 뱉으니 내가 긴장했다는 걸 눈치챈 그가 낮게 말했다.
" 괜찮아요? 저기 끝 보이죠? 저기까지만 가면 우리 이제 진짜 부부에요 "
어린아이 달래듯이 카펫 끝을 눈짓으로 가리키는 도경수 씨에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따라 꿈만 꿔왔던 결혼 행진곡이 울려퍼지고 아까 전 입장했을 때보다 더 큰 박수소리부터 여기저기서 도경수 멋지다! 잘생겼다! 라고 소리지르질 않나 심지어 내 하객 쪽에서는 경쟁하듯이 ○○○ 이쁘다!!! 여신이다!! 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걷다가 기어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내 웃는 모습이 흉하지는 않았던듯 웃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번쩍거리는 플래쉬와 셔터소리가 여러번 터졌다. 카펫 중간쯤 다와갈 때는 어느정도 여유가 생겨 미스코리아 진처럼 한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니 내가 손을 흔들어준 곳에서는 마치 연예인 실물을 영접한 것처럼 우와!!!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난생 처음하는 경험에 신이 난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워버리고 여느 때처럼 호탕한 웃음을 치며 여기저기 손을 흔들어주기 바빴다.
처음했던 긴장은 어디론가가버린듯 행진이 끝나고나서 사회자가 폐식을 알리고 너나할것없이 달려나와 찍는 기념촬영. 양가부모님들과의 사진 촬영이 끝난 후 도경수 씨와 낀 팔짱을 놓지않고 한중간에 기다리니 서로 자기가 신랑신부한테 붙어 찍겠다며 요란이다. 그러거나말거나 나는 도경수 씨한테 붙어있으면 되니 아무소리도 않고 가만히있자 어느새 자기들끼리 이쁘게 정렬을 맞춰놓고 서있다. 혹시나 하고 하얀옷을 입은 결혼식 사진 브레이커를 찾아보았지만 다행히도 모두들 이쁜 무채색 모노톤으로 맞춰입고 와주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내가 활짝 웃자 거기에 맞춰 하나,둘, 셋! 하고 외쳐주는 사진기사님.
오늘은 제가 주인공이니까 이쁘게 찍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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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백까지 깔끔하게 끝마친 후, 친구들에게 뒷풀이비를 쥐어주고 많은 이의 축복 속에 항상 타왔던 도경수 씨의 차에 올라탔다. 원래 웨딩카라고 리본 붙이고 풍선 붙이고 난리를 치지만 민망하다는 나와 도경수 씨의 의견에따라 평범하게 가기로 했다.
차에 타서 창문만 내려놓고 한명한명 굿바이 인사를 하는데
" 기념품 사와 "
오세훈이 톡 끼어들어 헛소리를 한다.
" 땅콩으로 사오면 되는거니? "
" 아 그 놈의 땅콩, 좀! "
" 그럼 마카다미아? "
명불허전 땅콩왕자를 골려주는건 여전히 현재진행형. 아직 대중들에게는 얼굴이 많이 안알려져있다는걸 오늘부로 깨달았는지 이젠 얼굴을 대놓고 들고 다닌다. 씨이 거리며 억울하다는 듯한 콧김를 내뿜는 오세훈을 뒤로하고
" 나도!! 나도 부탁할거있어!! "
창문틀을 턱하고 잡으며 얼굴을 들이미는 박찬열에 깜짝 놀란나머지 뒤로 주춤거리자 헤헷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내는 녀석, 왠지 불안한 느낌에 안돼, 라고 말하려고했지만 박찬열이 나보다 더 빨랐다.
" 나는 조카 부탁해 "
" ... "
" 경수형 힘! "
...
오늘 하루 이쁜 말만 하라고 하던 놈이 도저히 이쁜 말만 나오게 만들어주질 않는다. 부끄러운 마음에 마구잡이로 박찬열의 머리를 때리자 이어서 김종인 씨까지 합세했다.
" 왜 그래, 찬열이가 좋은거 부탁했구만. 나도 부탁해 "
" 뭐라는거에요! 이제 식 끝났으니까 좀 가세요! "
" 나는 여자애가 좋아, 하긴 뭐 내가 좋아하면 뭐해. 도경수 씨는 남자애가 좋아 여자애가 좋아? "
아 뭐라는거야! 창문을 닫아버릴 수도 없게 차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김종인 씨가 운전대를 잡고있는 도경수 씨에게 말을 걸었다. 넘어가지 말아요. 하는 눈빛을 도경수 씨에게 보냈지만 내 눈치를 한 번 보던 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저는 상관없습니다 "
.. 이 사람이....
도경수 씨의 대답에 소녀같이 웃던 김종인 씨는 알았어 그럼 꼭 성공해!! 하며 머리를 빼고 전봇대 브라더스와 함께 도망쳤고 남은건 민망함뿐. 주변에서 조카 소리를 들은 친구들은 짖궃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저 미소 속에는 분명 음흉한 의도가 담겨있으리...
신혼여행을 위해 공항으로 달려가는 차 안, 싱글벙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저 웃고만 있는 도경수 씨가 입을 열었다.
" 우리 진짜 부부에요 "
" 여행 갔다와서 혼인신고부터 해야지 진짜 법적으로도 부부에요 "
내 단호한 말에 시무룩해진 도경수 씨에 박찬열이 여행가서 많이 찍어오라며 준 캠코더를 네비게이션 옆에 두고는 말했다.
" 그래도 일단 식 올렸으니 진짜 부부라고 할까요? "
" 빨리 여행다녀와서 혼인신고부터해요 우리 "
" 알았어요, 우리 일단 박찬열이 준 영상 한번 봐요! 완전 허풍을 떨면서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뭐다 하던데 "
캠코더의 소리를 가장 크게 키워놓고 영상을 틀었다. 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건 부담스럽게 화면을 가득 채운 박찬열의 얼굴
' 야 잘보이냐? 안보여도 그냥 봐,나같이 이런거 챙겨주는 친구도 없다 '
그냥 꺼버릴까
' 이거 보면서 울지 마 '
정말 동영상을 꺼버릴까 했지만 옆에서 톡 튀어나오는 히터대 아이스 프린스에서 땅콩왕자로 전직한 오세훈의 얼굴에 계속 영상에 시선을 집중했다.
' 훈이 왔어 '
역시 영상을 끄는게 좋을것ㄱ...
' 혹시 영상 끄는 건 아니겠지 '
뜨끔
' 한 번 틀었으면 끝까지 다 봐, 무튼 너 진짜 언제 남자친구 사귀나 했더니 어디서 벤츠남을 끌고와서 놀라게 하질 않나 이제는 갑자기 결혼한다고 연락하지않나, 불도저세요? '
옆에서 세훈아 내가 안보이잖아.. ㄴ..내가 안보여.. 하는 애잔보스 박찬열이 뒤로 밀려나고 오세훈이 캠코더를 채가 화면에 자신의 매서운 이목구비를 자랑한다.
' 너도 부럽고 경수형도 부럽고 다 부럽다! 훈이도 나중에 결혼 이 호텔에서 할거야!!! '
' 나도 좀 말하자고!! '
어느새 다시 박찬열의 낮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운전 중이라 영상을 제대로 보지는 못하지만 전봇대들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웃긴지 실실 웃는 도경수 씨
' 야! 진짜 결혼 축하하고 경수형!! 제가 경수형 진짜 많이 좋아하는 거 알죠!! ○○○가 속 썩이면 말해요!! 열이가 대신 뭐라고 해줄게요!! '
' 맞아 진짜 ○○○가 막 망나니처럼 굴면 저한테 말해요. 열이하고 같이 뭐라고 해줄게요!! '
누구한테 쫓기듯이 속사포로 말을 내뱉은 전봇대 브라더스에 내용을 이해하느라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들이나 잘하지, 짜증나지만 묘한 중독성을 가진 영상에 집중을 하니 다시 박찬열의 손으로 넘어간 캠코더는 천천히 멀어져 두 녀석의 얼굴로 꽉찬 화면이 조금 여유있어졌다. 그리고 멀리 양가 부모님과 함께 식장에 들어가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도경수 씨를 클로즈업하더니 다시 자신들의 얼굴을 꽉차게 잡는다.
' 솔직히 경수형이랑 ○○○랑 결혼 할 줄 몰랐는데 막상 하니까 역시~ 하는 생각도 들고 .. "
과거 회상을 하며 말끝을 흐리는 박찬열에 오세훈이 다시 끼어들어 떠들었다.
' 결혼 축하하고 행쇼행쇼!!!!!! 경수형 행쇼!!!!!!!!! '
행쇼라고 외치는 오세훈이 말에 도경수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경수 씨는 모를만도 하지, 행복하쇼~ 의 줄임말이에요 라고 알려주니 아하하 소리내어 웃는다. 또 전봇대들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화면이 급하게 흔들리더니 김종인 씨를 부르는 박찬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종인이형!!! 니니형!!! '
축의금 명단을 쓰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캠코더를 올려다보는 김종인 씨
' 뭐야, 너네 지금 뭐해? '
' 결혼 축하 영상 찍어요. 식 끝나면 캠코더 채로 ○○○한테 줄거에요 "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치를 한 번 보고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 오 안녕 ○○○ 씨, 도경수 씨 '
' 우리 새신랑! 새신부에게 한마디! '
뻘줌하게 앉아있던 김종인 씨는 눈동자를 한 번 굴려주고 음~ 하며 말을 시작했다.
' 일단 우리 오월의 신부 ○○○씨! 진짜 도경수 씨가 ○○○씨 거의 처음 만날 때부터 지켜봤는데, 그거 알아? '
' 거의 초창기 때 도경수 씨가 ○○씨 한테 보고싶다고 보낸 적 있잖아!! '
' 그거 사실 나야!!! '
( 4화참조 )
... ㅁ.. 뭣이? 학교에 있는데 갑자기 보고싶다고 보내온 도경수 씨의 톡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내게 엄청난 설레임을 준 그 톡이.. 이럴 수가.. 이런.. 이럴..이..이..!!!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듯한 충격에 옆에서 못본 척, 못들은 척하는 도경수 씨를 노려보자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 김종인 씨가 한 말 진짜에요? "
" .. 그때 손이 아파서 김종인 씨가 대신 내용 쳐주기만 한 거에요.. 보고 싶어했던건 진심이었어요.. "
괘씸...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못하다가 이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영상 속 김종인 씨에게 시선을 옮겼다.
' 물론 나는 그때 도경수 씨 마음을 대신 써준거니까, 용기를 줬다고 해야하나? 그니까 둘은 내가 이어준거나 다름없지! 그리고 우리 도경수 씨! 아니, "
' 도대리님... '
도대리님.. 하는 김종인 씨가 서서히 화면 가까이 살벌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 나는 아직도 김종인 평사원인데 왜 도경수 씨만 도대리야? 왜?? '
번쩍 희번뜩이는 김종인 씨의 짙게 쌍커풀 진 눈
'두고 봐, 나중에는 내가 초엘리트가 돼서 도경수 씨 자리를 위협해주겠어 '
살 떨리는 위협에도 옆에 있는 도경수 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시 화면에서 멀어진 김종인 씨는 제 턱을 만지며 눈동자를 한바퀴 굴리다가 언제 눈을 희번뜩였냐는 듯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 뭐 위협해주는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서른 전에 장가가서 축하해 '
' 꼭 내 새끼들 시집,장가 보내는 것 같아서 짠하다, 진짜 둘이 만난지 엊그저께같은데 맨날 둘이 연애문제 속으로 끙끙 앓고 찌질이 처럼 굴다가 언제 이렇게 결혼을 한다고.. '
' 종인이 형 울어요? '
결혼을 한다고... 하며 코를 훌쩍이는 김종인 씨에 오세훈은 졸렬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 아냐 임마, 누가 울어 '
' 잉잉 형 울지마요 '
' 저리가 이것들아 '
손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는 김종인 씨에 전봇대들의 방정맞은 웃음소리와 함께 흔들리던 화면은 뒤이어 축의금 봉투를 들고있는 이모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 이모님!! '
' 어머, 세훈이하고 찬열이 아니야, '
오늘 가까이서 인사는 못드렸지만 꽤나 치장을 하고 오신 모습이 고우시다.
' 우리 새신랑,새신부에게 한 마디 하셔야죠! '
' 한 마디? '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꿈뻑꿈뻑 눈을 깜빡이는 이모
'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
' ... '
'그리고 나는 우리 언니한테 한 마디 했으면 좋겠다 얘 '
' 하세요! '
' 언니! 언니 딸 내가 시집보낸거야, 알지? 이걸로 언니 어렸을 때 공장 다니면서 나 미술 시켜준거에 대한 빚은 갚은거다? '
반박불가
내가 이렇게 도경수 씨라는 벤츠남에게 시집을 갈 수 있는데에 대한 모든 것의 시작 8할 정도는 내게 직접 카페 부매니저를 부탁한 이모의 공이 컸다. 2할은 영드를 자막 키고 보다가 카페로 쫓겨난 지난 날의 나...?
그 말을 끝으로 열심히 해! 하고 쫄랑쫄랑 식장 안으로 사라지는 이모와 막 로비로 들어서는 안나가 보였다.
' 안나!! '
' 뭔데 이거, 뭐하냐? '
다음 달에 유학을 가는 바람에 얼굴을 자주 보지못했던 안나의 직설적임은 여전했다.
' 우리 새신랑,새신부에게 한 마디! '
' 어 ... ㅇ.. ○○○ 너는 좋은 친구야 '
' 장난하냐, 새신랑,새신부한테 한 마디하랬더니 '
자신을 나무라는 박찬열에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뒷목을 긁적이다 말을 하는 안나
' 새신부한테는 이쁘게 잘살라는 말밖에 못하겠고 새신랑분한테 할 말은 많다 '
' 그럼 새신랑한테! '
' 신랑 이름이 어... 도경수 씨, 그래 도경수 씨. 오늘 처음 얼굴 보니까 번듯하니 잘 생기시긴 하셨는데 그래도 운 좋은줄 아세요, 어떤 여자가 한창 젊고 이쁠 때 덥썩 시집간다고 그래요. 내가 ○○○ 아는데 심지어 걔는 제대로 놀면서 즐기지도 못한 애에요 '
계속해서 도경수 씨만 생각하던 전봇대들만 보다가 이렇게 날 생각해주는 안나를 보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안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정적으로 차례차례 나오는 하객들의 한마디를 듣다가 십여분정도 흘렀을까 딱하고 나오는 도경수 씨의 얼굴에 산만하게 가방을 뒤적거리는 손을 멈추었다.
' 그럼 이제 우리 경수형! 오늘 형의 아내가 될, 신부 ○○○에게 한마디!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하는 도경수 씨
'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죠, 한마디로 부족할 정도로. 일단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너무 고맙고 '
자신의 얼굴이 나오자 창피한 듯 조용히 운전을 하던 그가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 결혼 생각해준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승낙까지 해줘서 더 고맙고, 결혼 준비하면서 많이 싸운다고 하던데 불평불만없이 진행해준 것도 고맙고, 고마운거 투성이네요 '
' 식장 보면 오히려 ○○○가 더 고마워 해야 될 것 같은데.. '
박찬열의 쓸모없는 덧말에 주먹을 꽉 쥐었지만 영상 속의 도경수 씨는 상관없다는 듯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 곧 식 진행되면 보겠지만 그래도 하루종일 못봤는데, '
' 우리 신부 보고싶다 '
그리고 툭 끊기는 영상에 흐흥 하며 도경수 씨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 때 진짜 보고싶었다며 하소연을 한다. 더 도경수 씨를 놀려주고 말고 할 틈 없이 켜진 영상은 박찬열이 신부대기실에 쳐들어온것부터 시작되었다.
' 오늘의 신부 ○○○입니다!!!!! 쨔쟈자라라랸 '
혹시나 내가 박찬열에게 꺼지라고 외쳤던 것까지 찍혔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내 주변을 한바퀴 돌아 찍은 뒤 영상이 잠깐 끊겨있다.
' 너가 마지막이다. 새신랑, 너의 남편, 경수형한테 할 말! '
' 도경수 씨한테 할 말? '
' 빨리, 나 들어오래잖아 '
아까 도경수 씨가 영상에서 자신의 얼굴이 나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엄청 뻘쭘하다. 오글거리기도하고 민망해서 영상을 꺼버리고싶은 심정.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영상 속의 나는 곧게 캠코더를 바라보며 어느때보다도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도경수 씨 '
' 우리 '
...
' 꼭 행복하게 살아요! 사랑해요! '
꼭 행복하게 살아요.사랑해요. 어쩌면 형식적인 말이겠지만 저때 나는 저 말 밖에 기억나지 않았거니와 내가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최선을 다한 말이었다.
강하게 밀려오는 민망함과 훅 끼쳐오는 열기에 얼른 캠코더를 꺼버리자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을 가린 내 왼손을 잡아 내리는 도경수 씨
" 마지막 말 직접 듣고 싶은데, 직접 들으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 나중에 영상 돌려보세요.. "
" 그래도 직접 듣는것만 못하죠 , 이제 부부인데 뭐가 부끄러워서요 "
그래도 전 여전히 부끄러워요..
끝까지 못하겠다는 내 굳건한 의지도 좋다며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못하겠으면 제가 먼저 할게요. 하고 나긋나긋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 ○○씨 "
" ... "
" 우리 꼭 행복하게 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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